소설리스트

검신검귀-55화 (55/328)

055화 항아리 속의 쥐

“그래, 태대형은 장기를 두던가요?”

우연순이 다시 자리에 앉은 연태조에게 느긋이 묻자, 연태조가 웃으며 답했다.

“장기는 둘 생각이 없어 꺼내지 않았습니다.”

“허허, 그러시었소?”

“대신 제 뒤에 선 여인이 길흉화복을 조금 볼 수 있어 어두운 이야기를 하였지요.”

어두운 이야기란 소리에 우연순이 관심을 보이며 모용설을 인자하게 시선을 옮겨 듣고자 했다.

“보기와 달리 재밌는 재주를 지녔구려. 남의 길흉화복은 들어선 안 되지만, 들려주실 수 있겠소?”

“음,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 아무도 믿지 않을 터이니, 못 들려 드릴 이유야 없지요. 말씀 올리시게나.”

연태조가 모용설을 대신해 답하고는 그녀에게 다음 말을 전적으로 믿고 맡기었다.

“태대형께서 듣고 물러나거라 하신 내용이라… 태대사자께선 듣고 그저 소녀의 재주가 신통치 않다 생각하시옵소서.”

“그래, 그런 무속은 본디 혹세무민하는 것으로 사람을 겁주어 따르게 하여 이득을 얻는 게 목적이니, 듣고 묻어 두겠소. 말하시게.”

우연순이 선선히 응하자 모용설이 신중한 표정으로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태대형과 자제 되시는 내평께선 온달과 괴한에게 목숨을 잃게 되신다 말씀 올렸습니다.”

“뭣이라? 온달과 괴한이 태대형과 내평을? 허허허, 태대형이 듣고 물러가라 할 만하구나. 정말 연태조 그대가 급했나 보구려. 외적과 내통했는지 떠보려고 일부러 한 소리요?”

“…….”

“그 정도론 그대를 대신하여 간적 혐의를 쓰고 죽을 이를 찾기란 쉽지 않을 터인데… 그대도 급했나 보구려. 하하하.”

자신을 비웃듯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우연순에게 연태조는 대답 대신 미소로 답하며 슬쩍 모용설을 돌아보았다.

모용설은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고개 숙이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참으로 무서운 여인이다. 우연순은 운명을 바꾸지 못하고 죽겠구나.’

연태조가 모용설의 이야기에 내심 만족하고 있는 동안, 한참을 웃던 우연순이 그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면 구호탄랑(驅虎呑狼)의 계책이라도 써서 싸움이라도 붙일 생각이셨소? 허나 온달 그자와 태대형이 싸움이 될 리가 없을 텐데… 그대처럼 영리한 이가 참으로 알 수 없는 행동을 하셨구려. 상대가 나라면 모를까? 온달이라니… 하하하.”

여전히 우연순은 모용설이 본 죽음에 자신도 있는 줄 모르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연태조는 북주 잔존 세력과 내통한 간적의 수괴는 찾지 못하고, 곧 죽음을 맞이할 이들만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애써 찾지 않아도 모두가 죽으면 죽은 이들이 간적이 될 것이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 * *

사냥 대회를 하루 앞두고 요동성뿐만 아니라, 신성과 낙랑 사냥 대회 인근에도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이들도 묘한 분위기에 경계를 늦추지 않는 상황에 평원 태왕이 서부총관 강이식과 을지문덕을 불러 물었다.

“연태조 그가 대실호연부터 우연순과 목원의를 바삐 만나고 다닌다고 들었네. 외적을 맞아 큰 전쟁을 치르기 전 내부의 간적을 없애자, 을지문덕 그대가 제안하여 연태조를 자유롭게 한 것이 위험을 키우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구나.”

당장이라도 피바람이 일 것 같은 살기가 곳곳에서 느껴지며 예전보다 많은 수의 사병을 목원의가 요동성으로 불러들인다는 소식을 접한 평원 태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수가 몇이 되든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신이 모두 싸잡아 두개골을 으깨 놓겠습니다. 고작 일천, 많아야 삼천입니다. 그 정도의 군사로 감히 요동성의 정병과 맞서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강이식이 당당히 나서 말하였으나, 태왕의 근심을 덜기엔 부족했다.

“총관의 용력과 요동성의 군사만으로도 압도할 수 있다니 다행스런 일이지만, 목원의는 그리 허술한 이가 아니지 않는가?”

본래 낙랑 사냥 대회는 오부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이끌고 세를 과시하는 전통이 있으나, 이번 목원의의 사병 수는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총관부에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목원의의 세력인 오골성, 개모성, 백암성, 비사성에서의 군사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며.

요동성 인근과 신성 인근에 각기 일천의 정병과 사냥 대회 장소에 배치된 일천 그리고 목원의가 평양성에서 이끌고 온 이백의 호위 무사들은, 겨우 이백 내외의 사병들을 이끌고 사냥 대회에 참여하는 다른 오부 귀족들의 사병 수와 확연히 구분되고 있었다.

물론, 요동 서부총관부의 군사 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사냥 대회에 요동성의 대군을 이끌고 갈 수는 없으며.

만일 총관부의 움직임을 목원의가 눈치 챌 경우, 목원의의 세력이 닿는 요동 일대의 각 성에서 일시에 군사가 움직여 요동성을 에워쌀 터라 태왕의 근심이 컸다.

“모르면 당하겠으나, 우리가 방비를 하고 있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되시옵니다.”

연신 강이식이 태왕의 불안을 덜어 보려 애썼으나, 여전히 태왕의 수심은 걷히지 않았다.

“나 역시 연태조가 외적과 내통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허나…….”

“…….”

“그가 간적을 잡아 누명을 벗겠다고 돌아다닌 뒤로 오히려 우연순과 목원의의 움직임이 수상해졌으니, 이젠 누가 간적인지 알 수도 없을 것이다.”

수심 가득한 태왕이 말을 이어 갔다.

“거기에 저들이 언제 역심을 품어 군사를 일으킬지 걱정스럽지 않은가? 차라리 연태조가 억울하더라도 그를 벌하여 내부를 단속함이 옳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요동성에서 역심을 품은 이를 맞이함이 두려움은 당연한 것으로 태왕의 근심을 이해한 을지문덕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폐하, 소신 감히 아뢰옵니다.”

“말해 보거라.”

“신이 총관을 찾아 요동성 서부총관부에 왔을 때는 흉년이 들고 인근 거란족의 약탈이 심대하였습니다. 또한 요동성 내의 쥐 떼마저 들끓어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갉아 먹으니, 날로 백성과 병사를 먹일 식량이 줄어드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 당시 사정은 평양성에서도 들어 알고 있구나.”

“평소라면 외부의 거란족은 군을 이끌고 물리치면 되는 작은 일이나, 흉년에 쥐 떼마저 극성으로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거란족을 물리치기 전에 백성과 병사들이 굶주려 싸우기도 전에 내부에서 무너질 상황이었습니다. 하여.”

“하여, 어찌 헤쳐 냈는가?”

태왕이 을지문덕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하여, 소신과 총관은 커다란 항아리 하나에 곡식을 가득 담아 쥐가 드나드는 어두운 길목에 묻었습니다.”

“항아리를 묻었다?”

“그러하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항아리 가득 쥐가 들어와 곡식을 먹으며 점점 줄어드는 곡식 탓에 갇히게 되었고, 항아리 속 곡식이 다 떨어질 때까지 갇히는 쥐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미끼로 쥐를 잡았군. 그런 절차로 항아리 수를 더 늘려 쥐 떼를 소탕했는가?”

“아니옵니다. 항아리 수는 늘리지 않았습니다. 항아리 속의 곡식을 먹어 치우며 풍족히 지내던 쥐들은 곡식이 떨어지자 굶주림을 참지 못해 서로 공격해 배를 채웠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항아리 속 쥐들은 십여 마리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어찌 되었는가?”

“총관과 소신은 이 쥐들을 풀어주었습니다.”

“뭣이라? 기껏 잡은 쥐들을 풀어줘?”

“그러하옵니다. 동족을 잡아먹으며 배를 채운 이 쥐들은 풀려나자, 곡식은 쳐다보지 않고 동족을 찾아 잡아먹기 시작했으며 곡식 창고는 이 쥐들이 지켜내었습니다.”

을지문덕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태왕은 그제야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물었다.

“허허허, 이호격산의 계이며 구호탄랑의 계를 쥐에게 적용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로다. 을지문덕 그대가 생각하는 항아리 속에 갇혔던 쥐는 연태조인가? 목원의와 우연순인가?”

“소신이 생각하건대, 타인을 죽여야 자신이 삶을 아는 이가 항아리 속 쥐라 생각하옵니다. 연태조는 목숨을 걸고 모두를 죽이고자 동분서주하고 있으니, 그가 항아리 속 쥐겠사옵니다.”

“허허, 그렇구먼.”

“그는 살기 위하여 외적과 내통한 간적뿐만 아니라 불충한 역심을 품은 이들마저 몸을 드러내게 하리라 믿사오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연태조는 부친 연자유가 세상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목원의와 우연순보다 세를 지니지 못하였고, 오부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왔네. 그런 그가 둘을 누를 힘이 있겠는가?”

“소신이 생각하온데, 연태조는 그럴 힘은 없으나, 미끼의 재능은 지니고 있다 판단되옵니다.”

“미끼의 재능이 된다?”

“그렇사옵니다. 목원의가 일천의 병사를 사냥 대회에 이끌고 나옴은 요동성의 군사 수에 비할 바는 못 되옵니다.”

“계속 말해 보거라.”

“정적들의 목을 벨 위세는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연태조가 외적과 내통하였다고 주장하며 간적들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태조를 추포하지 않은 총관과 소신의 목울 베어 폐하께 바치어 요동성의 병력마저 흡수하려 할 것입니다.”

“음…….”

“또한 오랜 정적이었던 우연순의 목도 이번에 취하겠지요. 평양성에 입성하기 위해 망령되게도 겉으로는 태왕 폐하와 태자 전하를 역도들로부터 지킨다는 명목으로 볼모로 세울 것이며, 사냥 대회에 참여한 오부 귀족들 또한 인질이 되겠지요.”

“뭣이라 하였소? 감히 폐하와 태자 전하를 볼모라 하였소?”

자신의 목이 베어진다 하여도 아무런 기색조차 없던 강이식이 태왕과 태자가 볼모가 된다는 말에 참지 못하고 버럭 역정을 내었다.

“총관은 듣게.”

태왕이 그를 진정시키자, 을지문덕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여기까지는 소신이 예상한 태대형의 역심으로 그는 스스로 나라의 우환을 제거하고 태왕 폐하께 충성을 바쳤다고 자처할 것이옵니다.”

을지문덕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태왕이 차분히 물었다.

“예상하고 있으니, 막을 수 있겠구나.”

“가능한 일이옵니다.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자가 권세를 지니면 언제든 발생할 일이오나, 연태조가 미끼가 되어 미리 촉발시켰으니, 외적을 맞아 큰 전쟁을 치르기 전 내부를 정리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 * *

모용설, 모용상 남매와 모용상을 지도하는 단 사부도 함께 자리한 가운데 연태조가 입을 열었다.

“목원의와 우연순, 대실호연 이들 중 누구라도 태왕을 찾아가 나의 불충을 의심하는 고변을 하거나, 서로를 의심하는 행동은 아직 없던가?”

“아직 그 누구도 태왕을 찾지 않고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어제 평양성에서 군사를 이끌고 도착한 가람에게 우연순, 계부방과 목원의, 목충 등을 감시토록 하라 명하였으니, 가람이 돌아오면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을 듯합니다.”

호위 무사들을 시켜 형세를 판단하던 단 사부가 답하자, 연태조는 다시 침묵을 유지했다.

단 사부가 언급한 가람의 일가는 대를 이어 연 씨 일족의 사병을 지휘하며 정보 수집을 해왔다.

그리고 이번 사냥 대회에서 연태조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병 이백을 이끌고 어젯밤 도착해 단 사부의 지시로 우연순과 목원의 등을 살피고 있었다.

“간적을 찾겠다고 태왕과 약조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사냥 대회를 마친 후 태왕은 반드시 대대로와 저희를 불러 경과를 물을 것이고, 이후 제가회의에서는 오부 귀족들이 대대로를 간적으로 지목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도 세를 불려 수를 써야 합니다.”

모용상이 답답한 듯 참지 못하고 종용하자, 연태조가 가만히 시선을 그에게 옮기더니, 짧게 꾸짖었다.

“조급해 경거망동 말거라.”

“하오나…….”

“목원의가 지나칠 정도로 사병을 늘리고 있다. 이는 곧 우연순에게 위협이 되어 섣부른 행동을 불러올 것이다.”

“목원의가 사병을 늘리는 것이 어찌, 우연순의 행동을 불러올 수 있는지요?”

“네 누이가 목원의 부자를 온달이 해한다 우연순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우연순의 입장에선 목원의가 사병을 늘리는 것은 온달 혹은 그 이상을 제거하기 위함으로 느껴질 것이고 혹여라도 목원의가 역심이라도 품어 성공할 경우 이는 곧 정적 관계인 우연순의 죽음을 의미한다.”

“…….”

“그럼에도 태왕을 찾아가 목원의의 지나친 사병 늘림을 고변하지 않음은 우연순 그 스스로도 태왕에게까지 말 못 할 일을 꾸민다는 뜻이다. 내일은 네 누이가 예언한 대로 그들이 죽고 우린 살 것이다.”

연태조의 단호한 어조에 모용상이 입을 다물며 자신의 누이 모용설에게 시선을 옮기자, 모용설은 동생에게 차분한 눈빛으로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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