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53화 (53/328)

053화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법 (1)

“팽가장의 젊은 장주시군요. 여기 고구려까지 어인 일이시온지요?”

평강은 곰 가죽을 두른 사내가 하북 팽가장의 장주 팽무성이란 사실에 적잖이 놀라 당황했다.

그러나 그가 위험에 처한 자신들을 도운 점과 일신에 상당한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목충의 호위 무사들을 함부로 다치게 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경계를 풀며 물었다.

“부끄러우나, 저의 형님께서 부친상 중에 장주의 신물인 금강대도를 훔쳐 이 지역으로 몸을 피하셨지요. 듣자 하니, 망우산에서 도적 떼의 수괴가 되었다 하기에, 인근 백성들에게 화가 될까 우려되어 산채를 허물고 형님이 가져가신 금강대도를 찾고자 했습니다.”

“…….”

“그런데 마침 요동성에 망우산 도적 떼가 붙잡혀 왔다기에, 저의 선친과 평소 친분이 돈독하시던 부총관 을지 공을 찾아뵈었더니, 공주님의 부군 되시는 온달 대인께서 홀로 도적 떼를 토벌하셨다 하여, 온달 대인을 찾아뵙고 형님의 행방을 여쭙고자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연을 남김없이 소상히 말하는 팽무성의 얼굴엔 거짓은커녕 순박함만 그지없었다.

‘팽무일은 간교하고 바르지 못한 위인인데 아우되는 팽 장주는 눈매가 우리 장군님 마냥 선하고 얼굴에 거짓이 없어 보이는구나. 더구나 을지문덕 공과 친분이 있으며 장주의 신물을 형에게 도둑맞은 사실을 부끄럼 없이 숨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헛되이 남을 속일 인물은 아닐 것이다.’

평강이 이렇듯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팽무성은 두 손을 모아 읍하며 평강에게 정중히 부탁을 하였다.

“공주께옵서 저를 온달 대인 앞에 데려가 주실 수 있으시온지요? 감히 머리 숙여 청하옵니다.”

팽무성의 형을 온달이 혼쭐내었다는 소리에 곁에서 듣던 온동이 앞으로 나서며 평강을 대신해 또박또박 말하였다.

“우리를 구하신 것은 고마운 일이구먼유. 지가 이렇게 엎드려 절하겠슈.”

대뜸 엎드려 절하며 온동이 마저 말하였다,

“하지만유. 나리의 형을 우리 온달님이 혼내셨는디, 어찌 동생을 쉬이 만나시겠슈? 더구나 지금 우리 온달님은 중한 일을 준비 중이시라 뵙기 어려울 것 같아유. 장주 나리 형님 행방은 요동성 관아를 찾아가서 묻는 게 나을 것 같구먼유.”

온동의 맹랑한 말에 팽무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이는 평강을 향해 다시 예를 표하고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잡다한 소리 하나 남기지 않는 그의 행동에 온동마저 당황해 평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평강이 생각을 정리해 온동의 머리에 손을 올려 다독이며 다정히 말하고는 팽무성을 불렀다.

“온동아, 괜찮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팽 장주! 우리와 함께 가 식사라도 하시지요. 곧 날이 저물 터인데, 요동성까지 언제 걸어가시겠습니까.”

그녀의 부름에 우중충히 축 늘어졌던 팽무성의 어깨가 활짝 펴지며 급히 몸을 돌려 달려왔다.

그리고 평강에게 연신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읍하옵니다. 소협객도 고마워. 꼬마 아가씨도 고맙고.”

평강뿐만 아니라 온동과 독고영에게까지 연신 감사를 표하는 모습에 악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

오골성을 다스리며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은 물론이요.

요동의 고구려 해군 기지인 비사성까지 세력을 형성한 태대형 목원의는 태대사자 우연순과 달리 객잔이 아닌 요동 서부총관부 못지않은 사택을 따로 마련해 임시 거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거처는 태왕이 머물고 있는 서부총관부보다 경계가 삼엄하며, 건물들이 높고 넓었다.

하인의 뒤를 따라 태대형 목원의의 처소로 향하는 모용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가에 비웃음을 실었다.

‘태대형이란 자의 삶이 태왕보다 낫구나. 이곳 임시 거처가 이럴진대 평양성 내의 사택은 어떠할지 안 봐도 짐작 가능하구나.’

이어서 눈빛이 날카로운 호위 무사들이 병장기를 비켜 들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잘 꾸며진 방 안 긴 탁자 상석에 흰 수염을 기른 목원의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연태조 일행을 맞이했다.

“연 대가, 오랜만이오. 양옆에는 요즘 소문이 자자한 젊은이들인가 보우.”

회의실 겸 직무실로 사용하는 방 안에는 목원의 혼자였으나, 그의 호령 한 번에 호위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올 터이니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었다.

목원의와 우연순은 연태조의 부친 연자유와 권력을 다투었던 인물들로 이들은 대놓고 연태조를 하대하였고, 이를 누를 힘은 연태조에겐 없었다.

“제가 대대로 임기를 마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인사가 뜸했습니다.”

연태조는 자신이 대대로를 역임했음을 일부러 강조했으나, 목원의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허허, 그런가? 우리 충이도 대대로에 관심을 두던데, 오거든 선임자로서 잘 이야기해 주게나.”

연태조도 이번 제가회의에서 대대로에 선출되고자함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목충이 대대로가 되려함을 강조한 것은 이미 연태조는 안중에도 두지 않음이 분명했다.

‘이 늙은이 역시 우리 대대로께서 이미 산사람이 아니라 단정 내리고 있구나. 이번 일을 수습한다면 가죽을 벗겨 놓아야 할 것이다.’

모용상이 심중에 칼을 품는 동안 연태조는 탁자 끝에 앉으며 태연히 말을 받았다.

“내평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태대사자도 그렇고 이 연태조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그런가? 듣자 하니 돌궐과 힘을 합친 북주 잔존 세력이 우리 고구려에 간자를 보냈다고 하던데, 내통한 이가 누구로 의심되던가?”

“소문을 벌써 들으신 것이옵니까?”

“일부러 내는 것인지 서부총관부에서 간자를 추포했다는 이야기가 벌써 이 요동성에 돌았다네. 자네가 태왕께 불려 간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비밀로 조사한 후 내통한 간적을 찾아야 할 것인데 어디서 말이 샜는지, 쯧쯧.”

연태조는 자신이 태왕에게 제안하여 간자를 추포했다는 사실을 을지문덕이 퍼트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문이 남았다.

‘내가 태왕을 접견한 것까지 어찌 아는 것일까?’

연태조의 이런 심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원의는 이 상황을 즐기듯 말을 이었다.

“자넨 적이 많아. 안 그런가? 사람이 너무 뛰어나고 강해도 적이 생기는 법이지. 태왕께서 자네를 간적과 내통했다고 의심하지 않으시던가? 자넨 그 의혹을 풀지 못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걸세. 누구도 자네를 두둔할 이 하나 없이 말일세.”

‘내가 의혹의 당사자란 것은 우연순도 말하였다. 하지만, 지금 목원의가 말하는 투는 같은 말이라도 무엇인가 그 색이 달리 느껴진다.’

머릿속의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며 연태조가 얼굴의 긴장을 풀고 천천히 답했다.

“어찌 사람이 하지도 않은 일로 죄를 덮어쓰겠습니까? 하온데, 태대형께선 제가 태왕의 부름을 받고 알현한 일을 어찌 아셨습니까?”

“하하하, 이 요동성에서 내가 모를 일이 뭐가 있겠는가? 우리 목 씨 일가가 오랜 세월 얼마나 공을 들인 곳인데 말일세. 하하하.”

“…….”

“그래, 대실호연과 우연순은 뭐라던가? 대실호연은 자네를 변호한다 하던가? 우연순은 아마도 자네가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겠지.”

“하하하, 태대사자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오나 태대형 어른의 정보력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래, 내게도 장기 두자고 찾아온 것인가? 나도 말일세. 궁에 차를 올리는 장기는 관심이 없다네. 세상 누가 그런 장기를 두겠나?”

우연순에게 장기를 두자고 제안한 것마저 목원의가 알고 있자, 연태조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받았다.

“궁에 차가 들어간 장기 말이옵니까? 하하하, 왕이 궁에 있는 것보다 그런 배치가 상당히 유리한데 다들 싫어하시는군요. 태대사자를 뵙는 자리에 마침 장기판이 있어 재미 삼아 제안한 것이고, 여기엔 장기판이 없으니 둘 생각은 없습니다.”

태연스런 대답과 달리 연태조의 머릿속은 어찌 목원의가 알았을지 파악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그 자리에 우연순과 그의 책사 계부방 밖에 없었다. 목원의와 사이가 나쁜 우연순이 알려줄 리 없고… 계부방 그 자인가? 아니면 몰래 염탐하던 이가 있었던 것일까?’

노회한 목원의는 연태조의 생각을 방해하며 재차 질문을 건넸다.

“그래, 그렇다면 왜 온 것인가? 우리가 한담이나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생명줄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연태조가 태연한 표정 속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급히 말을 몰아오느라 흙먼지를 뒤집어쓴 목충이 안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부친을 대신해 그 장기 내가 두겠소!”

아들의 철딱서니 없는 소리에 목원의가 당황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꾸짖었다.

“이놈! 어디서 감히 예의도 갖추지 않고 대화에 참여하느냐! 썩 물러가거라!”

이미 분을 못 이겨 태왕의 금지옥엽인 평강 공주에게 개를 풀었던 목충인지라 추후 태왕과 태자 혹은 오부의 귀족들이 죄를 물을까 염려되어, 앞뒤 생각 없이 정혁을 함께 하자는 정기를 두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ㅏ나 부친의 호통으로 정신을 차려 급히 허리를 숙이고 뒤로 돌아 방을 나섰다.

“내평이 워낙 호승심이 강해 장기를 두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 꾸짖어 망신 줄 일은 아니십니다.”

연태조가 돌아나가는 목충의 뒷모습을 보며 넌지시 말하자 목원의가 웃으며 답했다.

“불충한 장기 아니오? 이런 시국에는 입에만 담아도 목이 떨어질… 살려면 태왕께 발고할 상황인… 하하하.”

목원의의 웃음 속엔 연태조를 나락 끝까지 밀어넣겠단 뜻이 담겨 있었고, 이를 연태조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모용설이 살며시 허리 숙여 연태조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사였다.

“목충이 바로 그 비단 옷을 입은 사내였습니다.”

연태조가 모용설의 속삭임에 내심 놀랐으나,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목원의에게 말하였다.

“제가 온 것은 사실 제 뒤에 선 여인이 사람의 길흉화복을 잘 보기에 태대형께서 얼마나 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실지 봐드리려 했던 것입니다만, 이 여인이 지금 제게 말하길 좋지 않다 하니 더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뭣이라! 좋지 않다?”

목원의의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했고, 상대적으로 연태조의 만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운명은 변하는 법이오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괘념치 말라?”

여유로이 의자에 등을 대고 미소 짓는 연태조에게 목원의가 불쾌함을 담아 물었다.

“그렇습니다.”

연태조의 대답이 짧자, 목원의가 노골적으로 분을 얼굴에 드러내며 모용설로 시선을 옮기고는 말했다.

“말하라! 내게서 무엇을 보았느냐?”

“한낱, 흔한 무녀일 뿐입니다. 알아서 좋을 일은 없으십니다.”

연태조가 대신하여 답하자, 끝내 목원의가 버럭 역정을 내었다.

“내가 저 여인의 신분과 능력을 모를 줄 아는 것이오? 나는 저 여인의 출신과 행적 또한 파악하고 있는데 어찌 괘념치 말라 하시는 것이오?”

“…….”

“그녀의 동생 모용상은 후연 황실 모용선비 일족의 직계이며, 수의 독고 황후조차 그녀의 행방을 찾고 있고, 북주의 잔존 세력 수장 우무도웅의 아우 우문도지를 죽이고 목에 황금 백 냥이 걸린 여인.”

“……!”

“그러나 실상, 다들 저 여인을 찾는 목적은 저 여인의 능력을 얻기 위함이잖소.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 모용설. 저 여인이 나에 대해 말한 것이 무엇이오? 당장 말하시오!”

놀랍도록 모용설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목원의의 정보력에 연태조도 적지 않게 놀랐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되물었다.

“태대사자 우연순은 물론이요. 태왕께서도 이토록 자세히 이 여인에 대해 파악하시지 못하셨는데, 태대형께서는 어찌 그리 손바닥 보듯 아시는지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연태조가 떠보는 줄 알면서도 위세로 누르기 위해 목원의가 엄히 말하였다.

“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대대로에 오른 적은 없지. 허나, 그 아래 태대형 자리를 그대 나이부터 올랐다네. 고작 삼 년 임기로 연임조차 못 하는 대대로에 비해 이 고구려에서 내가 부족함이 있어 보이는가?”

“…….”

“나의 수하들은 이 삼한뿐만 아니라, 수와 돌궐, 거란과 여진.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오? 그대는 얻고자 하는 것이 있어 저 여인의 말을 내게 슬쩍 흘린 것이 아니오? 어서 마저 말하시오.”

아랫사람 대하듯 윽박지르며 재촉하자, 연태조는 난감하단 표정으로 고개 돌려 모용설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하였다.

“보이는 것을 말하시게.”

“보이는 대로 사실을 말하여도 되옵니까?”

목원의가 듣도록 모용설이 또박또박 묻자, 연태조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눈치 빠른 모용설은 분명 나의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맡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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