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운명은 변하는 법이다 (7)
태대사자 우연순이 머문 객잔 앞에 선 연태조 일행은 마중 나온 시종의 뒤를 따라 객잔 이 층으로 올랐다.
마침 우연순이 큰 탁자에 앉아 책사 계부방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
“연 대가, 어서 오시오.”
우연순이 앉은 채 인사를 건네자 계부방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권하였다.
“자리하시지요. 대대로.”
제가회의를 통해 우연순 역시 대대로를 노리고 있음에도 그의 책사 계부방은 연태조를 대대로라 칭하며 심기를 살피었다.
“부방이 오랜만이군. 대대로는 여기 계신 태대사자 어른께서 되실 듯한데 내게 예를 갖추어 고마운 마음이네. 하하하.”
칠순이 지난 우연순이 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나 말이야. 그저 예의일 뿐이지만 고마운 일이지. 아무렴. 하하하. 그런데 연 대가가 나를 찾아올 일이 뭐가 있을까?”
이미 요동성 내에 외적과 내통한 간자가 붙잡혔다는 소문을 을지문덕이 흘린 뒤였음에도 우연순은 여유로웠다.
“장기나 한판 두러 왔지요.”
연태조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장기 말을 정리하자, 우연순도 웃으며 장기 말을 정리해 새로 배치하며 말하였다.
“듣자 하니, 간자가 잡혔다더군.”
“그렇다 합니다.”
“우문선비와 내통한 이가 있다는 것 같던데…….”
“저 역시 그렇게 들었지요.”
“연 대가는 누가 가장 의심스러울 것 같은가?”
“제가 의심하는 이를 말씀하시는 것이온지요?”
“아닐세. 자네가 의심하는 이는 궁금하지 않고 자네를 제외한 이들이 의심하는 이가 궁금하다네.”
우연순의 물음에 장기 말을 배치하던 연태조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잠시 우연순의 주름진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심드렁히 답했다.
“오부 귀족 대다수의 생각이 궁금하시군요. 의심할이라기보다 없애고 싶은 이는 아마도 제가 아닐는지요.”
“하하하, 맞네. 역시 연 대가는 총명해. 그러니 쉰도 안 되어 대대로에 올랐던 것이지. 사람이 너무 뛰어나면 다들 두려워한다네. 조심하고 또 조심하시게.”
우연순이 껄껄껄 웃으며 다시 장기 말을 천천히 배치하기 시작했다.
“태대형의 자제 목충은 서른도 되지 않았음에도 대대로 자리를 원하는데 그가 저보다 더 뛰어나지 않겠습니까?”
연태조가 목충을 언급하자, 우연순의 얼굴에 노기가 가득 서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시건방지고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야. 그럴 그릇이 못 되지. 오늘도 우리 애들을 자극해 투석전을 벌였다지. 내 일흔이 넘도록 그렇게 못돼먹은 놈은 본 적이 없다네.”
“…….”
“이번 제가회의에서 반드시 놈을 누르고 내가 대대로에 올라 목 씨 일족을 엄히 다스려야 이 고구려에 분란이 없을 게야.”
연태조가 목충을 비난하면서 은연중에 대대로에 오르겠다 말하는 우연순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저 역시 대대로 자리에 다시 오르려 제가회의에 참여할 생각이온데 저는 안중에 없으신지요?”
“하하하, 안타깝게도 자넨 이번 위기에서 목숨을 부지한다면 당분간 자중해야지 않겠는가?”
외적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거나, 살아도 재기 불가하단 뜻을 담고 있어 연태조의 심기를 불쾌히 만들었다.
“대대로는 만나 보았는가? 대실호연은 자네가 지난번 제가회의에서 지지한 덕에 세도 없으면서 대대로가 되었으니, 보답을 해야지. 그래, 자네를 구명하는데 앞장서겠다던가?”
우연순의 말대로 연태조는 대실호연을 먼저 만나고 온 뒤였다.
온화한 성품의 대실호연은 자신이 태왕께 잘 아뢰어 누명을 쓰지 않도록 노력할 터이니, 부디 자중하라 권한 바 있었다.
대대로의 지위에 있으나 세가 약한 대실호연으로서는 그 이상 도움이 될 말은 할 처지가 못 되었다.
“대대로께서 말씀하시길 본인이 태왕께 잘 아뢸 터이니 걱정 마라 하였지요.”
“걱정 말라? 하하하, 그래그래. 대실호연 그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위안과 위로가 전부겠지. 그래 위안이 되던가? 아니지, 위안이 되었다면 나를 찾아오진 않았겠지. 아니 그런가?”
놀리듯 즐거이 묻는 우연순의 장기말을 바라보던 연태조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말이 모두 놓였습니다.”
“그런가? 그럼 시작하세. 먼저 두시게나. 저네와 마지막 장기가 될지도 모르니, 신경 써야겠어. 하하하.”
먼저 두란 우연순의 말에 연태조는 손을 뻗어 자신의 말이 아닌 우연순의 궁으로 향하더니, 거침없이 왕을 들어 올려 손에 쥐고는 놀란 우연순의 오른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는 우연순의 차를 쥐어 궁으로 옮겨 놓고는 태연히 말하였다.
“태대사자께옵서 연륜도 깊고 장기 말을 다루는 실력 또한 저보다 높으시니, 이렇게 두심은 어떠신지요?”
“차나 포를 떼어 주고 두는 장기는 있어도 왕을 떼어 주고 두는 장기도 있던가?”
우연순이 침착히 묻자, 연태조가 빙긋 웃으며 답하였다.
“왕을 떼어 주고 두는 것이 아니옵고, 차가 궁에 들어가 왕이 된 것이옵니다.”
연태조의 이 말에 노회한 우연순조차 얼굴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여 곁에 서 있는 계부방을 바라보았다.
계부방은 국상 계연수의 후손으로 소수림 태왕 당시 계연수가 후연과 결탁해 역모를 일으켜 태왕을 바꾸려 한 것을 훗날 광개토 태왕으로 불리는 태자 담덕이 반란을 진압하여, 계 씨 일족은 폐족으로 전락하여 세상에 나오지 못하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문무와 지략이 뛰어난 이 계부방 역시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우연순에게 몸을 의탁해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계부방이 탁자에 놓인 삼족기 모양의 술잔에 술을 따라 우연순 앞에 놓았다.
그리고 연태조에게도 삼족기 모양의 술잔에 술을 따라 바친 뒤 공손히 말하였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술을 따랐사옵니다. 편히 드시옵소서.”
잔을 바꾸지 않았다는 말에 우연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고는 연태조에게 말하였다.
“정혁은 없다 하는군. 이렇게 다리가 셋 달린 향로, 솥, 술잔을 삼족기라 부르고, 황제와 군왕을 뜻하기도 하지. 왜 그런 줄 아나?”
“정혁은 없다라…….”
“이 세 개의 다리가 명예욕, 재물욕, 지위욕을 뜻하기 때문일세. 다시 말하면 황제와 군왕은 이 세 개의 욕망이 균형 있게 지탱한다는 것이겠지.”
삼족기에 담긴 술을 들이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네. 이런 삼족기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술잔을 만든 후, 다리를 붙인다네. 다시 말하자면 원래 삼족기로 불쑥 태어난 것이 아닌 술잔이 만들어지고 다리가 하나하나 붙는다는 거야.”
“…….”
“그러니, 황제나 군왕의 자식으로 태어나고도 모두가 황제나 왕이 못 되는 것과 같은 이치지. 만들어져야 하는 거야.”
술잔 또는 솥을 바꾼다는 의미의 정혁이, 황제나 왕을 바꾸는 혁명을 의미함을 잘 아는 연태조로선 이미 ‘정혁은 없다’고 우연순이 말한 뒤이기에, 그가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내 나이 일흔이 넘어 이제 와 이 몸뚱이에 언제 다리를 붙이겠는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네의 궁박한 사정은 이해하나만 나는 이렇듯 불편한 장기는 두지 않겠네.”
“허허, 이 장기가 불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왕은 궁에 있어야지. 궁에 차가 들어가 왕 행세를 하면, 두는 사람조차 헷갈리게 된다네.”
입가에 미소를 가득 담아 말하는 우연순을 빤히 바라보며 연태조가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대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의 장기 수가 부족하여 조금 이득을 보고 두고자 태다사자의 차 하나를 궁에 옮기자 제안한 것을, 삼족기 제작 과정까지 언급함은 과하시군요. 아마도 태대사자는 나를 곡해하는 듯 보입니다, 그려.”
* * *
“어찌하시겠습니까?”
연태조가 떠난 자리에 계부방이 대신하여 앉으며 물었다.
“무엇을 말이더냐?”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장기 아니옵니까? 역심을 품지 않고서야 어찌 궁에 왕을 대신하여 차를 올리고 두자 하겠습니까? 태왕에게 발고하셔야 하옵니다.”
우연순은 계부방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궁에 올려진 자신의 장기 말 ‘차’를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내게 왕을 바꾸자 말한 것은 아니지 않더냐? 그의 말대로 장기를 두자 한 것이니 그냥 놔두거라. 어차피 연태조 그자는 곧 외적과 내통한 의혹을 벗지 못하여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오나…….”
“살고자 발버둥 치며 여기저기 돌아다닌들 누가 그의 편에 서겠느냐. 부질없는 짓이지.”
이미 우연순의 심중에 연태조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천지 분간 못하는 아둔한 목충과 장기를 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계부방이 목충을 언급하자, 여유롭던 우연순의 눈빛이 변하였다.
“음, 목충이라… 그런데 부방이, 내 차가 궁에 들어가 있으니 왕보다 위력이 더 좋지 않은가? 감히 정면으로 맞설 상대 장기 말이 없구만…….”
* * *
우연순이 머무는 객잔에서 나온 연태조는 뒤를 따르는 모용설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어떠하더냐?”
“대실호연과 마찬가지로 그의 목숨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대실호연도 그렇고 우연순 역시 목숨줄이 다했다면 이들이 북주 잔존 세력과 내통한 것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모용상이 연태조에게 바짝 붙어 생각을 말하자, 연태조가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대실호연과 우연순은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함께할 일은 없을 것이고, 저 중에 누가 내통했을지도 모르나, 간적과 내통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을 수도 있으니, 아무튼 단정 짓기는 어렵구나. 설아, 저 둘은 어찌 죽겠더냐?”
“동일하게 많은 이가 보는 앞에서 목이 베어지옵니다.”
“누가 목을 베더냐?”
“누군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모용설이 말꼬리를 흐리자, 연태조가 이를 놓치지 않고 바로 물었다.
“단지?”
“네, 단지 비단 옷을 입은 젊은 사내의 칼이 그들의 목울 벨 것이옵니다.”
‘비단 옷을 입은 젊은 사내라… 오부 귀족은 모두 비단 옷을 걸치는데 그런 이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다만… 비단 옷이라면 일개 사병은 아니겠구나.’
모용설의 답변에 잠시 고민한 연태조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어디로 향하실 생각이시온지요?”
궁금함이 많은 모용상이 급히 따르며 묻자, 연태조가 시큰둥하게 답하였다.
“대대로와 태대사자를 만났으니, 이제 태대형도 목이 베어지는지 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오나 이미 죽을 이들을 알아내었고, 대대로는 올해 무탈하실 거로 누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굳이 저런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필요가 있으신지요?”
모용상의 이야기에 연태조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운명이란 변하는 법이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신중하고 또 신중히 우리를 대신해 세상을 떠날 이들을 모두 확인해야 한다.”
“…….”
“기억하거라! 만약 한 치라도 실수가 있어 외적과 내통한 간적이 살아남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반드시 우리를 역모로 엮을 것이다.”
높지 않은 연태조의 목소리가 정확히 전달되었다.
모용상이 자신의 누이를 돌아보자, 모용설은 철부지 동생에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연태조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운명은 바뀔 수 있다. 어찌 바뀌는지가 문제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