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운명은 변하는 법이다 (6)
“고작 투석전에서 도망친 죄로 개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너무도 잔혹하지 않습니까?”
평강 공주의 매서운 꾸중에도 목충의 표정은 반성의 기미 없이 차갑기만 했다.
“잔혹하다니요? 이 개는 본디 토번에서 자란 개로 사자견이라 하온데, 도적과 외적을 이 개에게 던져줘 먹이지요. 원래 인육을 먹는 개라 다른 먹이는 신통치 않게 여겨 굶기에 이 개를 먹이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지요.”
목충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금덩이를 주고도 이 고구려 땅에선 구할 수 없는 이런 귀한 개가 굶어 죽는다면 그것이 잔혹한 일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이 갈기… 서역 상인들이 말하던 사자의 모습이 바로 이 개를 일컫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장황하지만,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였다.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끼면서도 인육을 먹여 키운다는 소리에 분노가 치민 평강의 눈이 붉어져 갔다.
평강의 손을 꽉 쥐었던 독고영이 앞으로 불쑥 나오며 조그만 입을 앙증맞게 벌리고는 목충을 향해 꾸짖었다.
“말도 안 돼요! 개가 사람을 물어도 나쁜 개인데, 사람을 먹이로 준다니요? 안 돼요!”
“뭣이라? 이 조그만 것이…….”
무릎 언저리밖에 안 오는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꾸지람을 들은 목충은 기도 차지 않아 말을 버벅거렸다.
“공주님, 온달님께 말씀드려 혼내주라 하셔요.”
망우산에서 팽무일의 수하들을 온달이 홀로 대적하며 자신을 구한 것을 기억하는 독고영은 이 무자비한 사내 역시 온달이 혼쭐 낼 거로 믿으며 평강 공주를 졸랐다.
“뭣이, 온달? 온달 따위가 나를 혼낸다 하였느냐?”
목충은 평강 공주와 혼담이 오가던 중, 그녀가 궁을 나와 온달을 찾아간 것에 크나큰 모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독고영이 온달을 언급하자 격분하고 말았다.
그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리더니 사자견의 목줄을 쥔 손에 힘을 일부러 풀며 그토록 자랑하던 개를 놓아주었다.
컹!
동료 개가 쓰러져 홀로 남은 사자견이 살기 품은 시뻘건 눈을 흉측히 빛내며 독고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무슨 짓이요?”
평강이 놀라 급히 독고영을 품에 안고 소리쳤으나, 달려오는 개의 기세가 너무나 사나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온동이 평강과 독고영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오며 돌을 주워 보려 했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급한 마음에 신을 벗어 날렸다.
냅다 날린 온동의 신은 비검술의 위력이 실리지 못해 사자견의 갈기를 맞추고 맥없이 떨어졌으며 오히려 개의 광기만을 부추겼다.
개는 이제 자신을 공격한 온동에게로 목표를 바꾸었다.
맹렬히 달려드는 개의 기세에 눌린 온동은 그만 다리조차 못 놀리며 꼼짝없이 사나운 개의 아가리에 목을 내놓게 생겼다.
“하찮은 털북숭이 개 따위가 감히 사람을 공격하다니!”
그때, 쇠 종 치듯 귀청 울리는 요란한 고함이 허공에서 들려왔다.
그리고는 곰 가죽을 두른 기골이 장대한 젊은 사내가 날아와 온동의 앞에 내려섰다.
곰 가죽을 두른 사내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순간!
동그랗게 커진 온동의 두 눈에 사내가 휘두른 오른팔이 마치 거대한 칼처럼 사자견의 두개골을 으깨며 뇌수를 허공에 뿌리는 것이 들어왔다.
금덩이를 주고도 못 산다는 사자견은 곰 가죽을 두른 사내의 일격에 고깃덩어리로 변하였고, 냉랭하기만 했던 목충의 두 눈 역시 동그랗게 커지며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놈은 무엇 하는 놈이더냐!”
아끼는 사자견 두 마리나 목충이 잃었으니, 그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 것을 우려한 호위 무사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곰 가죽을 두른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는 그대는 무엇 하시는 놈이시오?”
곰 가죽을 두른 사내의 억양에서 하북 탁현의 성조를 느낀 온동이 고개 들어 사내를 올려보았다.
그러자 사내가 큼직한 손으로 온동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하였다.
“용감한 아이구나. 네가 진정 소협객이다. 저자는 악이고.”
너무도 단순하면서도 순박하게, 느낀 감정 그대로 표현하는 사내의 말에 온동은 경계심을 살며시 풀 수 있었다.
“이런 시건방진, 뭐가 소협객이고? 누가 악이란 말이냐! 당장 저놈을 잡아 살을 도려내 사자견의 밥으로 주거라!”
목충이 핏대를 세우며 목이 터지라 외치자,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사내를 향해 칼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사자견이 또 있단 말이로군. 대단한걸?”
곰 가죽을 두른 사내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호위 무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충에게 사자견이 더 있다는 소리에 놀라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목충은 낙랑 사냥 대회가 마무리되면 오부 귀족들과 함께 신성 인근에서 범 사냥을 할 생각으로 사자견 일곱 마리를 특별히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아끼는 두 마리를 잃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그에겐 태왕의 금지옥엽 공주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치를 떨며 더욱 거세게 외쳤다.
“죽여라! 고기를 도려내고 뼈를 갈아 놓거라!”
목청의 외침에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곰 가죽을 두른 사내에게 칼을 휘둘렀다.
십여 개의 칼이 바람을 가르며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노리는데도 사내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우렁차게 소리 높여 말하였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을 위해 그 개들도 찾아내어 대가리를 박살내야겠구나!”
호위 무사들의 칼이 매섭게 찌르고 베어 오는데도 한가로이 호통이나 치는 곰 가죽을 두른 사내의 모습에 오히려 온동의 마음이 급하고 불안해졌다.
그리하여 온동은 바닥을 굴러 잽싸게 작은 돌을 쥐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호위 무사의 정수리를 향해 던졌다.
“어이쿠! 이 망할 놈이!”
이마가 터져 피를 줄줄 흘리는 호위 무사가 잡아먹을 듯 험악히 눈을 부라리며 온동에게 칼을 휘둘렀다.
“아이고! 나 죽어유!”
놀란 온동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파산귀검의 보법을 저절로 펼치자, 호위 무사의 칼은 허공을 갈랐고, 제힘을 못 이긴 호위 무사는 중심을 잃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곰 가죽을 두른 사내는 온동이 갑작스레 돌을 던지고는 비명을 지르자, 구하기 위해 자신을 노리는 칼들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렸으나, 온동이 제법 보법을 잘 놀리며 몸을 피하자 호탕히 웃으며 말했다.
“소협객의 재주가 여간이 아니로구나. 돌팔매질뿐만 아니라 보법도 훌륭하니, 무학 대가에게 지도를 받은 게로군. 하하하.”
그는 몸을 돌려 온동의 범상치 않은 재주를 칭찬하면서도 자신을 공격하는 십여 개의 칼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고 큰 몸을 살짝살짝 틀어 모두 피해내었다.
그러나 실전 경험이 부족한 온동은 여전히 사내가 십여 개의 칼날에 휩싸여 위험하다 생각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려 바닥에 고꾸라진 호위 무사의 칼에 시선을 두었다.
‘곰 가죽 아저씨가 당하면 저 내평이란 자가 나는 물론이고 영이와 공주님까지 해할지 모르겠구먼. 어여 저 칼을 주워 저 곰 가죽 아저씨에게 드려야 좋겠구먼. 서둘러야 혀.’
곰 가죽을 두른 사내는 온동의 보법이 범상치 않음을 깨달은 후 더욱 느긋하게 몸을 놀렸다.
그러나 온동의 눈엔 사내가 점점 더 위험에 처해 간다고 생각해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바닥에 고꾸라진 호위 무사가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몸을 날린 온동이 땅을 밟듯 허공을 내달려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걷어차 버렸다.
해진에게 발재간을 배운 일 없고, 파산귀검엔 없는 재주로 손에 쥔 무기가 없는 온동이 급한 마음에 보법을 밟으며 무작정 내지른 시정잡배들의 발길질이었다.
“컥!”
조그만 온동이 아무렇게나 내지른 발길질이었으나, 보법만은 정확히 파산귀검의 보법을 따랐기에, 온동에게 걷어 채인 호위 무사는 외마디 비명만 난기고 벌러덩 뒤로 넘어져 혼절하였다.
“됐구먼! 아저씨, 이 칼 받으셔유!”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든 온동이 비검술을 이용해 곰 가죽을 두른 사내에게 칼을 날려 보냈다.
“아차! 이건 칼인디.”
물건을 건네듯 날렸어도 날아가는 것이 칼인지라 곰 가죽을 두른 사내가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몸에 칼이 박힐 것이기에, 정확히 날아가는 칼을 보며 그제야 온동이 놀라 외쳤다.
“소협객 자네는 재주가 다양하군. 대단해!”
곰 가죽을 두른 사내를 향해 날아간 칼은 신기하게도 사내가 손을 뻗어 손바닥을 활쫙 펴자 속도가 느려지더니 마치 허공에 부딪힌 것처럼 멈추었다.
사내는 그 짧은 순간에 어느새 자신을 공격하는 칼날들을 몸을 틀어 모두 피하고는 허공에 멈춘 칼의 칼끝을 손가락으로 툭 쳐 팽그르르 한 바퀴 돌리고는 멋들어지게 쥐었다.
“소협객, 이 칼을 내게 보내줘 참으로 고맙네. 하지만 나는 내 칼을 찾기 전까지 다른 칼은 쓰지 않을 생각이라 이 칼은 그대에게 다시 보내겠네.”
사내가 온동을 향해 칼을 쑥 들어 올리듯 띄우자,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칼이 날아 온동을 향했다.
그런데 그 속도가 무척이나 느려 작고 어린 온동도 쉽사리 손잡이를 쥘 수 있을 정도였다.
사내의 신묘한 재주에 오랜 세월 무예를 수련한 호위 무사들은 그가 자신들보다 월등히 뛰어남을 깨닫고 일제히 거리를 벌렸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이다!”
호위 무사 중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외치자, 이야기로만 전해 내려오는 중원 무림 비기에 모두가 놀라 곰 가죽을 두른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런 신기까지는 아니고. 그저 힘 조절해 던진 것뿐이다. 하하하.”
사내의 호탕한 웃음에 점점 더 기가 질리는 호위 무사들이었다.
“내평! 그대는 개를 풀어 나를 해하려 한 것이오? 고구려 왕실을 그대 목 씨 일가의 노예로 생각해 개의 먹잇감으로 던지려는 것이오?”
사자견의 위협에 놀라 독고영을 품에 안고 주저앉았던 평강이 어느새 마음을 추스르고 당당히 일어나 감히 자신을 향해 개를 푼 목충을 엄히 꾸짖었다.
비로소 목충도 자신이 순간 격분해 태왕의 금지옥엽인 평강 공주를 향해 개를 풀었던 것을 깨닫고, 수습하기 위해 황망히 손을 내저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동료가 죽은 것에 사자견이 분을 못 이겨 제 손을 뿌리치고 달려든 것이옵니다.”
그는 급히 변명을 하고는 호위 무사들을 손짓으로 불러 칼을 거두게 하며 궁리하였다.
‘저 곰 가죽을 두른 놈이 여간 성가셔 평강과 조용히 이야기할 수 없겠구나. 더구나 이곳엔 눈도 많아 더 이상 일을 벌여선 안 될 것이다.’
보는 이들만 없다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평강을 해칠 위인이었으나, 곰 가죽을 두른 사내와 소동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들로 더는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분명 평강이 오늘 일로 앙심을 품을 것이며 태왕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나 역시 무사할 수 없다. 요동성으로 돌아가 아버님과 상의해야겠구나.’
목충은 심성이 바르지 않고 잔인하였으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을 쏘아보는 평강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태연히 말하였다.
“공주님의 수하들이 나의 사자견을 때려죽인 연유는 훗날 다시 여쭙기로 하고, 오늘은 곧 있을 사냥 대회 준비와 제가회의 준비를 위해 요동성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자신의 말을 마친 목충은 평강의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듯 몸을 획 돌려 천막 앞에 매어 둔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피 흘리는 노예들은 내버려 둔 채 호위 무사들만 이끌고 바삐 자리를 떠났다.
오만불손한 목충의 태도에 입술을 질끈 깨문 평강이 다시 얼굴을 환하게 펴고는 독고영의 손을 쥐고 곰 가죽을 두른 사내에게 깊이 머리 숙여 예를 표했다.
“오늘 저희가 큰 화를 모면한 것은 장사님 덕분이옵니다.”
“나는 사실 아무 일도 한 것은 없고, 저 소년 협객이 맞선 것이라… 하하하.”
곰 가죽을 두른 사내가 겸손히 온동에게 공을 넘기자, 평강이 웃으며 온동을 불렀다.
“온동아, 그 칼을 버리고 이리 오너라.”
온동이 칼을 바닥에 떨구고 앞에 서자,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평강이 말하였다.
“너는 아직 아이란다. 앞으로 위험한 일은 피하거라.”
“알겠구먼유. 공주님.”
온동이 공손히 머리 숙여 답하였고 이를 지켜보던 곰 가죽을 두른 사내가 조심스레 평강에게 예를 표하며 물었다.
“혹시, 태왕의 금지옥엽이시며, 협객 온달님의 부인 되시는 평강 공주님이시옵니까?”
“우리 공주님이 평강 공주님이시고요! 우리 온달님이 공주님 낭군이셔요!”
평강이 답하기도 전, 독고영이 작은 손을 번쩍 치켜들며 잘도 종알거렸다.
“공주님을 뵈옵니다. 소인 하북 팽가장의 장주 팽무성이라 하옵니다.”
다시 예를 갖춰 팽무성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평강과 독고영의 두 눈에 놀라움이 가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