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운명은 변하는 법이다 (5)
연태조와 모용설, 모용상 남매가 떠난 자리에 서부총관 강이식과 을지문덕이 대신해 평원 태왕 앞에 허리를 숙이고 섰다.
“모용설과 모용상 두 남매를 잡아 북주 잔존 세력에게 건넨들 전쟁은 피할 수 없겠지?”
먼저 침묵을 깬 평원 태왕의 물음에 을지문덕이 살며시 고개 들어 아뢰었다.
“그들은 북주를 재건할 영토를 원하는 것이옵기에 누굴 바치든 전쟁은 불가피하옵니다.”
을지문덕의 말을 성미 급한 강이식이 대뜸 끊으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하오나 폐하, 돌궐은 수의 황제 명을 받은 공손성이 대돌궐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압박 중이옵기에 우문도웅에게 병력을 내주어 우리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일 여력은 없다 사료됩니다.”
“그러한가?”
“더구나, 돌궐은 현재 수의 이간책과 내부 분열로 동과 서로 나뉘어, 우리 고구려로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거란의 영토와 요하 동쪽에 자리한 수의 대고구려 전초기지인 영주 총관을 지나야 합니다.”
“음…….”
“이는 즉, 북주의 잔존 세력이 돌궐에게 병력을 도움받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한 북주의 잔존 세력 역시 수의 영주 총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고구려 땅을 밟지도 못할 것입니다.”
“총관의 이야기는 전쟁은 없을 것이란 뜻이오?”
강이식의 장황한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태왕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아마도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을지문덕의 주장에 마음이 실린 듯했다.
“그것은 아니옵고…….”
다음 말을 미쳐 준비 못 한 강이식이 더듬거리자 을지문덕이 나서 대신 말하였다.
“폐하, 총관이 아뢰고자 한 것은 전쟁이 없다는 것이 아니옵고, 전쟁이 연속하여 일어날 것이란 뜻으로 사료되옵나이다.”
“무엇이라, 연속하여?”
“본디, 중원에 대국이 나오면 그들은 언제나 두 가지 절차를 진행하였사옵니다.”
“두 가지 절차라 하였는가?”
“그러하옵니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정비 기간으로 북방에 이이제이 정책을 내어 서로 반목하고 다투게 하며, 정비가 완료된 뒤에는 정벌을 진행하였사옵니다. 낙랑을 기억하시옵소서.”
“낙랑이라…….”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을 떠올리며 평원 태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돌궐과 거란 같은 기마 민족은 수나라가 공격을 하면 터를 지키지 않고 멀리 물러나기에, 선비족 출신의 대돌궐 총사령관 공손성은 이들을 멸하기 어려움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
“하오나 우리 고구려는 결코 한 치의 영토도 포기하지 않으니 이들과 다르옵지요. 또한 돌궐과 거란은 우리 고구려가 강성하면 우리의 편에 서고, 중원의 대국이 기를 올리면 그들의 편에 서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수는 우리 고구려가 강성해져 돌궐과 거란이 우리에게 복종하지 못하도록 전쟁을 부추길 것이옵니다.”
“그러나 북주의 황위를 찬탈한 수의 양견은 북주 잔존 세력이 돌궐 기병을 이끌고 우리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아 힘을 기르기를 원할 리 없지 않는가?”
“수의 황제 양견은 영리하고 치밀한 자로 독고 황후 역시 계략이 풍부하다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이호격산의 계책으로 우리 고구려와 북주의 전존 세력 그리고 돌궐이 서로 총력전을 펼쳐 힘을 잃기를 바랄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 후엔 전쟁으로 진이 빠진 북방을 정벌하겠지요. 우리 고구려의 대적은 바로 수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수의 영주 총관은 물론이요. 영주 총관에 지휘를 받는 거란 역시 우문도웅에게 길을 열어 줄 것이 분명하옵니다. 서로 싸우기 바라면서…….”
“그러하다면 북주의 잔존 세력과 돌궐을 물리친다 해도, 그 다음 수의 대군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뜻이로군.”
“그렇사옵나이다. 길고 긴 전쟁이 시작될 것이옵니다. 하여.”
“하여?”
“긴 전쟁을 대비하여 영주 총관 너머, 거란의 영토를 지나, 돌궐의 세력 바로 위. 몽고 초원 그곳에 우리 고구려의 비밀 군사 기지를 세우셔야 하옵니다.”
“비밀 군사기지라 하였는가?”
을지문덕이 너무도 뜻밖의 제안을 말하자, 평원 태왕이 놀라 물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침착히 준비해 온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하옵니다. 몽고 초원 위에 우뚝 선 홍산이란 지역이 있사온데 이곳에 우리 고구려의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적봉진이라 명하신다면 훗날 수와의 전쟁에서 그들의 수송로를 끊고 돌궐과 거란의 움직임을 묶을 수 있사옵니다.”
“비밀 군사 기지라… 적을 속이려면 내부에도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인데, 군사 기지의 대군을 지휘할 인물이 마땅치가 않구나.”
을지문덕의 제안이 타당하다 생각되어도 오부의 귀족 중 누가 외적과 내통하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군을 지휘할 믿을 만하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떠오르지 않아 평원 태왕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있사옵니다. 폐하.”
여전히 성미 급한 강이식은 을지문덕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나서서 아뢰었다.
“있는가?”
“그러합니다. 믿을 만하고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당장 우리 고구려에서 자취를 감추어도 오부의 귀족 누구 하나 관심 두지 않을 인물들이 있습니다.”
촛불에 비친 강이식의 얼굴엔 칭찬받을 일을 한 아이처럼 자신감이 가득했다.
* * *
“대대로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모용상은 대대로에서 물러나 다시 제가회의를 통해 대대로에 선출되고자 하는 연태조에게 여전히 대대로라 칭하였다.
아마도 그가 다시 대대로에 오르리란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찾아야겠지.”
“간자들과 내통한 간적들을 찾으실 방안이 있으신지요? 삼짇날까지 촉박하지 않겠습니까?”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잠시 응시하며 연태조가 답하였다.
“촉박하지. 그러나 찾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모로 몰려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낙랑 사냥 대회 전통에 따라 오부 귀족들이 각기 군을 이끌고 온 상황입니다. 차라리, 따르는 귀족을 모아 태왕을 꺾는 것은 어떠신지요?”
살길이 보이지 않은 모용상이 위험하면서도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하였다.
연태조는 물끄러미 모용상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모용설에게로 옮겨 물었다.
“태왕이 올해를 넘기겠더냐?”
“태왕은 올해 무탈할 것이옵니다.”
차분히 답하는 모용설의 눈빛이 흔들렸다.
“곁에 단공은 어떠하더냐?”
“그 역시, 올해 무탈할 것이옵니다.”
“허허…….”
허탈히 웃는 연태조도, 답하는 모용설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하였다.
태왕과 그를 모시는 단공이 무탈하단 의미는 사냥 대회에서 반란이 의미 없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설아, 그러하다면 나는 어떠하더냐?”
연태조의 물음에 모용설이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환히 웃고는 곁에선 모용상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대대로께옵선 일전에 제가 아뢰었던 것과 동일하시옵니다. 제 동생 상이 역시 천수를 누릴 것이옵고요.”
“그래? 그러하다면 잘 되었구나. 가자.”
모용설의 답에 만족한 연태조가 거침없이 발을 옮기며 말하자, 성미 급한 모용상이 뒤따르며 물었다.
“어딜 가시는 것이십니까?”
“역도들을 찾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어찌 찾으실 생각이시온지?”
“본디 외적과 내통해 나라를 팔아먹는 재주를 지닌 자가 이 고구려에서 그 세력이 하찮은 에는 없었다. 역모도 재주라 어느 정도 급이 되어야 하는 법이지.”
“…….”
“대대로, 태대형, 태대사자, 대장군 정도는 되어야 외적과 내통 시 격이 맞지 않겠느냐? 다행스럽게도 모두 이 요동성과 신성에 모여 있으니 우리가 함께 가 올해를 넘기지 못할 자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시원스레 답하는 연태조에게 모용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하였다.
“사람의 생과 사는 다양한 연유가 있는 법이온데, 올해를 넘기지 못할 이가 역모를 저지른 이라 단정 짓기 어렵사옵니다.”
“안다.”
“하시오면?”
“설이 너는 그저 올해를 넘기지 못할 이를 내게 말하면 된다. 그가 외적과 내통했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모두를 죽이면 그 속에 역도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산다.”
우리가 산다는 말에 모용상의 표정은 밝아졌고, 모두를 죽인다는 말에 모용설의 얼굴에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 * *
말 위에서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땅히 머물 곳이 보이지 않자 평강 공주를 근심한 온달이 조심스레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온 것 같으니 신성에 들어가 객잔을 찾아 머물며 사냥 대회에 참여함이 어떻겠소?”
“신성은 본래 태왕들의 사냥터와 휴양을 위한 곳이옵기에, 계루부의 왕종들과 귀족들 상당수가 머물 것이옵니다. 사냥 대회 전까지 그들과 거리를 둠이 좋을 듯하오니, 이곳에 천막을 치고 숙영(宿營)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자신을 배려해 제안한 온달의 마음을 느끼면서 평강은 웃음으로 숙영을 권하였다.
“저기가 좋겠습니다! 제가 당장 천막을 칠 터이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눈치 없는 막바우가 괜히 신나 평강의 말이 끝나자마자 온달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서둘렀다.
“아니, 이 사람이!”
경우가 면박을 줬으나, 벌써 말에서 내린 막바우는 자리를 다듬느라 그녀의 말은 귓등으로도 담지 않았다.
“경우 자네도 어여 와서 돕게나! 뭐해?”
오히려 자신을 채근하는 막바우의 말에 어이없어하면서도 경우 역시 말에서 내려 그를 돕기 시작했다.
“막바우님, 지도 도울게유. 공주님 천막은 잘 치셔야 혀유.”
눈치 빠른 온동이 온달과 평강을 번갈아 살피다가 막바우 곁으로 달려가 도우려 하자, 막바우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어허! 아이는 가서 놀고 있어라. 저기 가서 독고영이랑 놀다가 천막 다 치면 공주님 천막 잘 정리나 하고. 어서 가.”
“그래, 영이랑 조금 거닐다 오려무나.”
경우마저 도움이 필요 없다 하니, 온동이 뻘쭘해 서 있었다.
그러자 해진과 양만춘, 독고선이 다가와 막바우를 도와 천막을 치며 온동의 머리를 차례차례 쓰다듬었다.
“공주, 아이들과 잠시 거닐다가 오시구려. 나도 천막 세우는 것을 도와야겠소.”
온달도 별수 없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막바우에게 향했다.
평강은 사람들과 천막으로 가득한 광경이 신기해 재잘거리는 독고영의 조그만 손을 쥐어 걸었고, 온동이 이들을 보호하려는 듯 앞장섰다.
* * *
주위를 구경하며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사내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의 방향으로 고개 돌린 독고영이 놀라 평강의 손을 꽉 쥐며 외쳤다.
“공주님, 사자예요! 사자!”
멀리 커다란 천막 앞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머리와 온몸에 피를 흘렸고, 비단 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호위 무사들을 대동한 채 사자처럼 갈기가 무성한 큰 개 두 마리의 목줄을 쥔 채 사내들을 공격하게 시키고 있었다.
“내평 나으리 살려 주십시오.”
“으악!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사내들의 처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사자처럼 갈기를 지닌 큰 개들은 피로 얼룩진 사내들을 향해 으르렁거리더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송아지만 한 개가 덮치자 사내는 맥없이 뒤로 넘어졌고, 사내의 몸에 올라탄 개들은 사내의 얼굴과 목을 사정없이 물어 생살을 뜯어내었다.
끔찍한 광경에 다른 사내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나서서 구하지도 도망치지도 못하였다.
목줄을 쥔 젊은 사내는 냉랭히 웃을 뿐이었다.
“이 개들이 미쳤구먼유! 이거나 처묵어라!”
보다 못한 온동이 주먹만 한 돌을 쥐어 냅다 던지자, 비검술이 실린 돌이 정확히 사내의 목을 물어뜯는 개의 대가리를 맞추었다.
온동이 날린 돌에 맞은 개는 깽 소리도 못 내고, 사내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널브러졌다.
갑작스레 날아온 돌에 젊은 사내가 놀라 시선을 온동에게로 옮겼다.
젊은 사내의 뒤에 서 있던 호위 무사 하나가 칼을 빼어 들고 나오며 소리쳤다.
“감히, 내평 나리의 사자견을!”
“아서라! 귀한 분이 계시다.”
젊은 사내는 온동에게서 시선을 평강에게로 옮기며, 가볍게 머리만 까딱여 예를 표했다.
누가 봐도 평강 공주를 업신여기는 인사로, 평강 역시 젊은 사내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인사를 받지 않고 물었다.
“내평께는 이 지독한 행위가 놀이입니까?”
“당치 않습니다. 놀이라니요. 전장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벌하던 중이었습니다.”
“전장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젊은 사내는 태대형 목원의의 아들 내평 목충으로 개울가에서 태대사자 우연순의 노예들과 투석전에서 패하고 돌아온 자신의 노예들을 개의 먹이로 던져 주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