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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49화 (49/328)

049화 운명은 변하는 법이다 (4)

서부총관부에서 별채들을 단장해 태왕과 태자 및 그들의 행차를 수행한 이들을 따로 모신 곳에 연태조가 모용설과 모용상을 대동해 나타났다.

태왕이 거처로 사용하는 별채 앞을 지키던 호위 무사들은 그가 대대로를 지낸 연태조임을 알면서도 앞을 막아섰고.

연태조는 불쾌한 기색 없이 평소 안면이 있는 호위 무사들의 수장을 찾아 낮지만,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부르셨다. 연태조가 왔다고 아뢰거라.”

호위 무사들의 수장은 바로 태왕의 거처 문 앞에 서 있는 환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환관은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앞에 서 있는 환관에게 다시 이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그 환관이 긴 복도를 지나 태왕의 침소 앞에 서 있는 환관에게 전하자, 그 환관이 공손히 허리를 숙여 침소 안에 있을 또 다른 환관에게 알렸다.

연태조는 뜨거운 차 한 잔이 다 식었을 것 같은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을 안내할 환관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복잡한 안내 절차와 달리, 몸에 지닌 무기 수색은 없었다.

마치 그 어떤 자객에도 태왕의 신변 보호엔 자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모용상은 스스로 몸에 지닌 환도와 단검을 호위 무사에게 맡겼고, 연태조와 모용설은 따로 맡길 것이 없어 환관의 뒤를 따랐다.

이들이 환관의 뒤를 따라 복도를 지나 침소 앞에 서니, 안내한 환관이 공손히 허리 숙여 연태조가 왔음을 알렸다.

잠시 뒤, 안에서 스르륵 문이 열렸는데 맞이하는 환관은 오직 늙은 환관 단공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단공이 조용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반기자, 연태조가 함께 온 모용설, 모용상 남매를 소개했다.

“오랜만이오. 이들은 나를 따라 온 자들인데 함께 알현하기로 되어 있소.”

“알고 있습니다. 드시지요.”

단공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붉은 비단이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드리어진 침상 앞에 둥근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태왕이 호랑이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흰 비단(白羅)으로 만든 가벼운 관(冠)을 쓰고, 편안한 비단 옷 위에 가죽 띠를 둘렀는데, 백라관과 가죽 띠만 금테로 치장했을 뿐 화려하진 않았다.

태왕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엎드려 절하는 연태조 일행을 내려다보며 주름진 손을 들어 일어나라 손짓을 했다.

늙은 환관 단공이 엎드린 연태조의 귀에 “이제 그만 일어나소서.”라 알리자, 그제야 연태조 일행이 몸을 일으켰다.

“오부의 귀족들은 나를 참 싫어해. 그렇지 않나?”

곁에 선 단공보다 더 늙은 태왕이 웃음 섞인 농담을 연태조에게 건넸다.

침소를 지키는 이가 늙은 환관 하나뿐이란 사실에 모용상과 모용설 두 남매가 놀란 것에 비해,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한 연태조는 웃으며 태왕의 농담을 받았다.

“폐하, 그들은 저 또한 좋아하지 않사옵니다. 그들은 신이 고작 오십도 되지 않았음에도 망령들어 일찍 세상을 뜨기만 바라고 있지요. 그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자들입니다.”

“하하하. 그저 그렇고 그런 자들이라… 하하하, 좋은 표현이야. 좋아.”

연태조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린 태왕이 아직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연태조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는 곧 있을 제가회의에서 다시 대대로가 될 자신이 있는가?”

태왕의 이번 물음에 연태조는 속 시원히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

“지난 제가회의 때, 순노부의 대가 대실호연을 제가 밀어 그를 대대로로 만들었으나, 이번 제가회의에선 대실호연이 대대로의 지위에 있으나, 그 힘이 미약해 저를 밀어도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사옵니다.”

“그렇군…….”

“아마도 예상컨대, 태대형 우연순과 내평 목충이 치열하게 다투며 서로 대대로가 되고자 할 것이라, 오부 귀족 중 저를 포함한 절노부가 갈라지는 형국이 될 것 같사옵니다.”

“그럼 절노부의 힘이 약화되겠군.”

연태조의 대답에 뭐가 그리 좋은지 만족한 표정으로 태왕이 말하자, 연태조가 허리를 숙여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하옵니다. 제가 대대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다행스럽게도 절노부의 힘은 약화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래, 잘 되었어. 좋아.”

태왕이 크게 만족한 표정으로 탁자 위의 두루마리를 들어 건네자, 단공이 공손히 받아들어 연태조에게 전했다.

바로 강이식이 읽고 대노한 그 두루마리였다.

두루마리를 펼쳐 든 연태조를 내려다보며 평원 태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고구려의 선대 태왕께옵서 연노부의 힘을 빼앗기 전까지 태왕은 본래 연노부에서 선택하였기에, 연노부는 지금도 종묘를 따로 가지고 영성사직마저 모셨으니, 연노부의 대가(大加)는 고추가(古雛加)라 불릴 만도 하지.”

연노부는 절노부의 옛 이름으로 오부의 귀족들은 감히 입 밖에 내기조차 두려워하는 실정이었다.

“고국천왕께옵서 돌아가시고 동생인 고연우가 산상태왕으로 즉위하자 산상태왕의 형 고발기가 불복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연노부는 고발기를 지원하였다지.”

“…….”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고발기가 패하고 죽자, 연노부의 하호 삼만여 명이 우리 고구려 땅에서 이탈하여 요동 공손강의 휘하에 들어갔고 말이야.”

평원 태왕의 음색은 낮고 부드러웠으나, 이를 듣는 연태조와 모용설, 모용상 남매의 등에선 한기가 일어 살며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대 연 씨 일족의 성을 따 연노부라 칭했던 절노부가 요즘은 연 대가(大加)의 뜻대로 잘 되지 않는가? 아, 대가가 아니라 고추가(古雛加)라 부르며, 나도 그대 가문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가?”

평원 태왕의 물음에 두루마리를 읽던 연태조가 급히 머리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답하였다.

“천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송구하옵고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폐하, 우리 연 씨 일족은 고구려와 태왕 폐하, 계루부의 왕종을 섬기며 감히 도를 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하며 조신하고 있사옵니다.”

두려워 답하는 연태조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평원 태왕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대 일족이 경계하고 또 경계한들 누가 알아주겠는가? 지금 그대와 함께 내 앞에 엎드린 이들은 후연의 왕종인 모용선비 일족이며, 이 두루마리는 공손향이란 여인을 통해 북주의 잔존 세력 우문선비들에게 전해졌지 않는가.”

“폐, 페하…….”

“이를 다른 오부의 귀족들이 알게 된다면 누구나 그대를 반란 세력의 수괴로 지목하지 않겠나? 내 말이 어떠한가? 지금 서부총관이 간자를 체포해 심문 중이나, 별 소득이 없어 아마도 오부의 귀족들은 자네를 역도의 수괴로 지목하겠지.”

평원 태왕이 공손향을 언급하자 모용설, 모용상 두 남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고, 태왕의 곁에 선 늙은 환관 단공의 눈빛이 순간 매섭게 빛났다.

모용상은 자신을 쏘아보는 단공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성급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빌어먹을 공손향 그년과 엮어 죽일 모양이다. 이대로 억울히 누명을 쓰고 당할 수는 없다. 지금 태왕은 고작 늙은 환관 하나만 대동한 상태이다. 누님과 내가 살고자 한다면 태왕을 제압해야만 한다.’

철없는 동생의 생각을 읽은 모용설이 가만히 손을 뻗어 모용상의 어깨를 쥐었다.

모용설은 철부지 동생 모용상의 무예를 지도하는 단 사부의 이복형 단공이 한때 검기를 일으켜 상대의 목을 베는 중원 제일 검으로 불렸음을 잘 알고 만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용상은 단공이 늙고 무기를 지니지 않았음에 여전히 망령된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바닥을 짚은 모용상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갈 무렵, 탁자 위에 놓인 촛불 주위를 맴돌던 작은 나방 하나가 감히 태왕의 얼굴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늙은 환관 단공이 오른손을 가만히 들어 여윈 검지손가락으로 나방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푸른빛이 일더니, 그대로 쭉 뻗어 나방의 날개를 태우고 사라졌다.

“그대의 일양지는 해가 갈수록 정확하고 위력이 배가 되는구나.”

평원 태왕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칭찬하자, 단공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하였다.

“송구하옵니다.”

단공은 무기를 지니지 않은 적수공권 상태에서도 검기를 펼치듯 자유롭게 기를 발산해 거리를 둔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제야 모용상은 자신의 생각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망연자실해 고개를 들지도 못하였다.

“송구하오나 폐하. 소녀가 감히 아뢰나이다.”

상황이 죽을 길만 보이자, 모용설이 청아한 음색으로 평원 태왕에게 청하였다.

“말하거라.”

“소녀와 소녀의 동생 모용상은 폐하께옵서 말씀하신 대로 모용선비 일족이오며, 고구려와는 오랜 세월 그 관계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또한 공손향이란 여인을 소녀와 소녀의 동생은 익히 잘 알고 있사오며, 북주의 잔존 세력인 우문선비 일족의 수장 우문도웅 역시 잘 알고 있나이다.”

“그래? 자복하는 것인가? 계속 말하거라.”

모용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평원 태왕이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본래 저희 남매는 중원을 떠나 떠돌다 공손향의 장원에 몸을 의탁해 친자매처럼 지내었는데, 당시 공손향은 우문선비 일족의 수장 우문도웅의 아우 우문도지와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러하더냐? 그래서?”

“그러하온데, 우문도지란 인물은 형인 우문도웅과 달리 여색을 탐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내로 공손향과 정혼 중이면서도 저를 겁탈하려 들었고, 이에 제 철부지 동생 모용상이 누이를 구하고자 그를 죽였나이다.”

“…….”

“이후 우리 남매는 중원은 물론이요. 북방 초원까지 세상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이 떠돌다가 선친과 친분이 있던 연태조 대가를 뵈옵고 몸을 의탁하게 되었나이다.”

연태조가 북주와 돌궐, 거란에 사신으로 오가며 중원 한족을 포함해 선비족은 물론이요.

북방 이민족 수장들과도 교류가 빈번함을 익히 알던 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서글프고 고달펐겠구나. 계속하거라.”

“황공하옵니다. 고구려와 모용선비 일족은 연나라부터 후연에 이르기까지 은원이 깊었으나, 소녀와 소녀의 동생은 같은 선비족이면서도 우리 모용일족을 내친 탁발 씨, 공손 씨, 독고 씨, 우문 씨 등과 더는 교류가 없으며, 특히나 공손향과 우문도웅과는 원한이 깊사옵니다.”

모용설이 말을 이어 갔다.

“또한 북주의 우문선비에게 나라를 빼앗은 수의 양 씨와도 같은 선비족임을 내세워 몸을 의탁할 처지도 못 되옵니다.”

모용설이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연태조는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린 채 누명을 벗고 살아날 방안을 바삐 모색하였다.

“네가 말하고자 함이 무엇이더냐?”

모용설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미 파악했음에도 평원 태왕이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물었다.

“감히 아뢰나이다. 폐하, 소녀와 소녀의 동생은 북주의 잔존 세력은 물론이요. 공손향과 더는 친분을 유지할 처지가 아니옵기에, 여기 계신 연 대가가 그들과 내통해 폐하께 반기를 품었을 리 없나이다. 부디 혜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하냐? 듣고 보니, 네 말이 옳다. 하지만 내가 믿어준다 하여도 연태조와 너희가 역심을 품고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부의 귀족들이 쉽게 믿어줄 리 없지 않느냐?”

태왕은 뭔가 따로 생각이 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연태조와 너희가 아니라면 내통한 이가 따로 있을 것인데, 그들이 살고자 연태조와 너희에게 죄를 묻지 않겠느냐? 안 그런가? 연태조.”

이제 살길은 누명을 벗기 위해 적과 내통한 이를 밝혀내는 것뿐이라 생각한 연태조가 결심한 듯 두 눈에 불을 켜고 고개 들어 간청하였다.

“폐하! 소신 재주가 보잘것없으나, 폐하께옵서 신을 믿어주신다면 적과 내통한 이를 반드시 모두 잡아내어 폐하께 수급을 바치겠나이다.”

“그대가 앞장서겠다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외부의 적을 맞아 싸우기 전, 내부의 적을 모두 뽑아내어 폐하의 근심을 제거하겠사옵나이다.”

“허허…….”

“서부총관에게 명하시어 이 두루마리를 공손향에게 전한 자들을 사로잡아 문초 중이란 것을 소문내어 주신다면 역도를 밝히는 것은 소신이 하겠나이다.”

간자를 추포하였다는 사실을 소문내는 것은 한편으로는 외부의 적 북주와 돌궐이 알게 될 경우, 고구려가 미리 전쟁 준비에 들어갈 것을 알리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아무리 내부의 적을 잡아들이기 위함이라 하여도 실로 위험한 제안이었기에, 정작 이 제안을 올린 연태조조차 태왕이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가만히 처분을 기다렸다.

“좋다. 그리하지.”

하지만 태왕의 입에서 너무도 선선히 허락이 떨어지자, 살기 위해 급급했던 연태조의 머릿속이 비로소 차분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미 태왕은 내가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었구나. 을지문덕이다. 그가 이미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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