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운명은 변하는 법이다 (3)
“아무튼, 뭐가 재밌는지 시원하게 설명 좀 해보시오.”
재촉하는 강이식의 소매를 끌어 밖으로 나온 을지문덕이 소리 죽여 말하였다.
“저놈들이 뭔 생각인지 걸사표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을지문덕의 말에 강이식도 그제야 깨달은 바가 있어 그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왜지? 왜 공손향이란 여인에게 이 걸사표를 전달하지 않은 것이지?”
“이 정도의 나라 팔아먹는 일은 이미 오래전에 북주 떨거지들과 우리 고구려 내부 간적 무리 수괴들끼리 서로 얼굴을 맞대고 논의가 끝난 사항일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부의 간적들이 걸사표를 글로 남겨 북주 수괴에게 전달하려 함은, 문서로 남겨 재차 자신들의 지위를 다짐받고자 한 것이겠지요. 이 걸사표를 저놈들 따위가 함부로 결정하여 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아마도 서책을 받아 간 그 공손향이란 여인도 모를 일이겠지요.”
“음…….”
“즉, 나라 팔아먹은 우리 고구려 내부의 간적들은 북주의 수괴 우문도웅의 다짐을 재차 받고자 하였으니, 답신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답신을 기다리고 있다라…….”
“우문도웅 그자가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저놈들은 우문도웅에게 걸사표를 가져간 후 답신을 받아 간적에게 다시 전하려 한 것이고요.”
“그렇다면 놈들을 놓아준다면 우문도웅에게 가서 답신을 받아 다시 간적에게 갈 수도 있겠군.”
“여기서 멀쩡히 나간다면 누가 저놈들을 믿겠습니까? 저놈들조차 살아서 나갈 것이라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긴… 그렇겠지. 저놈들을 이용하여 간적을 색출할 방법은 없는 것이로군.”
을지문덕의 이야기에 낙담한 강이식이 한숨 한 번 길게 내쉬며 말하자, 을지문덕이 눈을 빛내며 차분히 답하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요.”
“그게 무엇이오? 한 번에 다 이야기 좀 하시오.”
“탈옥을 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저들이 탈옥하여 우문도웅을 찾아간다 한들 내부의 간적에게 답신을 전하는 간자가 바뀔 수는 있으나, 오부 귀족들을 출입하는 수상한 이들만 살펴본다면 간적을 색출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탈옥을 시킨다 하여도 우리가 일부러 풀어주었다고 의심할 터인데, 더구나 오부 귀족 모두를 감시하여 드나드는 이를 살필 수도 없지 않소? 분명, 답신을 전달할 간자는 바뀔 터인데…….”
“얼마 전 잡아 온 망우산의 도적 무리 기억하시는지요? 기 씨 사 형제 중 남은 세 명이 요동성 내를 배회하며 기악을 빼낼 궁리 중이더군요.”
“그게 정말이오? 이런……!”
“그들을 이용하면 의심받지 않을 것이오며, 오부 귀족 모두를 감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문도웅과 얼굴을 맞대고 나라를 팔아먹을 간계를 꾸몄을 인간이라면, 귀족 중에서도 그 신분이 상당할 터이니, 몇 사람 남지 않습니다. 서로 격이 맞아야 간계도 꾸미는 법이지요.”
을지문덕의 이 말에 강이식도 떠오르는 이들이 몇 있었다.
“을지 공, 그대는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었군요. 허허. 계속 이야기해 보시구려.”
* * *
아직 삼짇날까진 닷새 정도 남았으나, 온달 일행은 짐을 꾸려 사냥 대회 장소로 이동을 시작했다.
고작 걸어서 하루 거리였기에, 서둘러 말을 몰면 해가 남았을 때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사냥 대회 장소가 가까워지면서 요동성과 신성 부근에서 온 군사들과 사냥 대회 참가를 위해 온 사람들 수가 점점 늘어났다.
또한 곳곳에 임시 거처로 사용하는 천막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 소란이면 근방의 짐승들이 모두 도망칠 것 같구먼.”
군데군데 모여 서로 수박을 겨루고 씨름판을 벌여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바라보며 막바우가 이야기했다.
“좀 더 사냥 대회장과 가까워지면 더 큰 소란이 있을 것입니다. 보세요.”
평강 공주는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작은 개울이 있었는데, 그 개울을 마주 보고 두 무리의 사내들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엔 어린아이 주먹만 한 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와! 투석전이다! 말로만 들었지, 처음 봐요! 와! 경우 자네도 어서 이리 오시게!”
두 무리 사내들의 대치를 본 막바우가 신이 나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그는 여전히 어깨에 온달의 운철 대검을 대신 짊어지고 있었는데, 말 타는 실력이 이전보다 조금 나아져 안장 위에서 연신 몸이 흔들리면서도 잘 나아갔다.
안장과 연결된 등자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경우도 투석전이란 말에 흥분해 말을 몰아 막바우의 뒤를 따랐고, 온동도 평강 공주의 눈치를 보며 투석전이 펼쳐질 곳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온동아, 너도 구경하고 싶으면 경우님 곁에 바짝 붙어 구경하거라.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말고.”
평강이 허락하자, 온동도 우랑이 가져다준 조랑말을 열심히 몰아 경우의 뒤에 붙었다.
“투석전이 무엇이오?”
투석전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온달이 궁금해 묻자, 평강은 웃으며 나지막이 답했다.
“우리도 여기 서서 구경할까요? 보시면서 제 설명을 들으소서.”
개울을 사이에 둔 두 무리의 사내들이 서로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바닥에 쌓인 돌을 집더니, 사납게 상대 무리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었고, 지휘하는 이도 없었으나, 돌을 날리는 기세가 맹렬하고 누구도 피하는 이 없이 거침없었다.
평강은 투석전이 시작되자, 미간을 찡그리며 온달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장군님께선 죽령 지역이 고향이시라 보시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본래 투석전은 가을 무렵 서로 작은 강이나 개울을 낀 두 마을의 사내들이 모여 돌을 던지며 싸우는 전투입니다.”
“허, 이것 참…….”
“먼저, 상대의 돌을 피해 물러나 도망치는 마을이 패하는 단순한 규칙을 지니고 있고, 누구도 죽거나 다친다 하여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리고 쓰러지는 이가 속출하는 살벌한 투석전을 바라보며 평강 공주의 설명을 듣던 온달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죽거나 다쳐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럼 죽거나 다친 이가 나온단 소리 아니요? 원한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 터인데.”
“맞습니다.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나 사람 마음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데 원한이 생기지 않을 수 없지요. 실은 이미 원한이나 분쟁이 있는 두 마을이 칼이나 창으로 싸우기보다 투석전으로 승패를 가려 해결 보는 데서 시작되었다 들었습니다.”
“…….”
“어쩌면 칼과 창보단 덜 치열할 수 있고 따로 빼앗기는 것도 없으니, 그런 부분에선 낫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이 근방 마을 사람들이겠군요.”
개울을 사이에 두고 투석전을 벌이는 두 무리의 사내 중 공교롭게도 온달과 같은 방향의 사내들이 돌에 맞아 쓰러지는 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비명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져 나뒹구는 이들이 늘어났으나, 아무도 물러서는 이가 없었다.
평강은 처절한 비명 소리에 고개 돌려 온달만 바라보며 답했다.
“그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인접한 마을 간의 투석전은 추수가 끝난 가을에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저들은 원한이 깊은 중앙 오부 귀족의 군사거나 노비들 같습니다. 주인들이 서로에 대한 증오를 아랫사람들에게 투석전으로 풀려 한 것 같군요.”
한쪽이 물러나면 승패를 가려 종료된다는 투석전은 양측 어디도 결코 물러설 기미가 없어, 한쪽이 모두 돌팔매질에 쓰러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들의 은원을 아랫사람들의 야만적인 돌팔매질로 푼다니… 정녕 피를 보고 싶다면 본인들이 할 것이지… 허.”
평강의 설명을 듣고 보니, 두 무리의 사내들이 펼치는 무의미한 돌팔매질이 더욱 기가 막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온달이었다.
사내들의 뒤에서 투석전을 신나게 구경하던 막바우가 겨냥이 빗나가 잘못 날아온 돌에 이마를 맞아 피를 줄줄 흘리며 온달 곁으로 말을 몰아 돌아왔다.
좀 더 구경하고 싶었던 경우와 온동은 막바우가 물러나자 별수 없이 말 머리를 돌려야 했다.
“도대체 어느 귀족들의 지시로 펼치는 투석전이라 하던가요?”
온달이 근처에서 구경하고 돌아온 경우에게 사내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지 물어보았다.
마침 경우가 사내들의 고함과 대화를 엿들었던 터라 답할 수 있었다.
“낙랑 사냥 대회를 참관하러 온 오부의 귀족 중, 절노부(絶奴部)의 목(穆) 씨와 우(于) 씨가 아랫사람들을 시켜 투석전을 펼치라 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두 집안의 뭔 원한이라도?”
“그것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중앙 귀족들의 속사정을 경우가 알 리 없고, 그렇다고 투석전을 펼치는 사내들이 그런 사정을 떠들며 돌팔매질을 할 리 없으니, 경우로선 당연한 답변이었다.
오부 귀족 중, 고구려 왕 성인 고 씨의 계루부를 제외한 가장 큰 세력 소노부(消奴部)의 해 씨인 해진은 뭔가 아는 눈치였으나, 그저 입을 꽉 다물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한쪽 세력이 모두 돌팔매질로 쓰러져 야만스런 투석전이 끝났다.
그러자 노비로 보이는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들이 달려와 쓰러진 이들을 업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때, 평강이 무겁게 입을 열며 절노부의 목 씨와 우 씨가 다투는 이유를 설명했다.
“오부 귀족 중 가장 큰 세력은 계루부이오나, 사실 소노부와 절노부도 만만치 않은 세력이지요. 소노부는 우리 고구려 초기 왕 성을 지녔고, 절노부는 왕후가 나온 세력들이니, 사실상 가장 큰 세력은 절노부라 할 수 있습니다.”
“왕종보다 외척의 세가 더 강하단 말씀인가요?”
“태왕이 되지 못한 왕종보다 외척의 힘이 현실적으로 큰 것이 당연하겠지요. 선대의 태왕들께서 수많은 왕후를 두셨기에 절노부엔 아주 많은 성과 가문들이 있습니다.”
“아, 그렇겠군요. 과연 절노부엔 다양한 성 씨들이 존재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부의 각 부를 이끄는 집안을 대가라 하는데, 현재 절노부의 대가를 놓고 늙은 태대사자 우연순의 집안과 젊지만 내평직을 맡고 있는 목충의 집안이 오랫동안 서로 으르렁거리는 형편입니다.”
“허, 그것 참.”
“아마도 오늘도 오랜 은원 때문에 투석전이 벌어진 듯합니다. 사실 현재 절노부의 대가는 연태조 그분의 집안이 맡고 있음에도 무시하고 서로 다투는 것이지요.”
고구려 귀족 사정을 온달이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태대사자의 관등보다 내평의 관등이 한참 떨어지는 것은 알기에 의아해하며 평강에게 되물었다.
“태대사자와 내평이 비교가 되는 관등인가요?”
온달의 당연한 의문에 평강은 방긋 웃으며 자세히 이들 세력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태대사자인 우연순에 비해 내평인 목충은 감히 절노부의 대가를 노릴 처지가 아니오며, 올해 일흔의 우연순에 비해 고작 스물대여섯인 목충의 연륜 또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상황이지요.”
“…….”
“그러나 목충의 아비 목원의는 대대로 다음가는 관등인 태대형까지 지낸 인물로 목충이 맡은 내평은 관등이 태대사자에 비해 떨어지나 귀족들과 관료들을 감찰하는 자리이기에, 그 위세가 작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아, 신진 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다툼이 아닌, 부친의 뒤를 이으려는 자와 더 크기 전에 막으려는 자와의 다툼이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부질없는 것이 절노부의 대가는 현재 연태조의 집안이 맡고 있기에, 이 두 집안이 아무리 서로 다툰다 하여 쉽게 차지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대대로를 지낸 연태조 그분이 절노부의 대가이시군요. 허허, 서로 상대를 잘못 잡고 다투는 격입니다. 그려.”
“그렇긴 하온데… 현재 순노부(順奴部)의 대가인 대실(大室) 가문의 대실호연이 대대로를 맡고 있사온데, 곧 그의 임기가 다해 오부의 귀족이 모여 진행하는 제가회의에서 다시 대대로를 선출해야 하기에, 아마도 이를 노리고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 같사옵니다.”
온달의 곁에서 평강의 설명을 엿듣던 막바우가 머리를 흔들며 껴들었다.
“와! 뭐가 그리 복잡한가요? 지금 공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사람 이름들이 맞나요? 아 어렵다. 어려워.”
평강 공주와 온달은 눈치 없는 막바우를 면박주지 않고 웃으며 대했고, 경우가 대신 지청구를 했다.
“쓸데없이 두 분 말씀에 참견하지 말아요. 그러다가 정말 치도곤 맞습니다.”
경우에게 혼난 막바우가 풀이 죽어 입을 꾹 다물자, 평강이 마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이번 제가회의 때 연태조 그분도 다시 대대로 자리를 원하실 터라, 우 씨와 목 씨에게 대대로 자리가 돌아갈지 저도 무척 궁금한 상황입니다.”
제가회의에서는 오부 귀족들이 각종 현황도 논의하지만, 그들을 대표할 고구려의 재상인 대대로를 선출했고, 대대로는 삼 년의 임기를 지니며 연임할 수 없었다.
온달 일행과 망우산 앞 객잔에서 만난 연태조도 이 회의에 참석해 다시 대대로가 되고자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