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47화 (47/328)

047화 운명은 변하는 법이다 (2)

객잔 일 층의 소란에 온달과 양만춘, 해진도 놀라 잠에서 깨 각자 무기를 들고 급히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그런데 계단 난간이 부서져 있고, 세 명의 사내가 바닥에 쓰러져 제압된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공주, 이게 어찌된 일이오?”

온달이 뒤늦게 내려와 어리둥절해 하는 양만춘과 해진을 대신해 평강 공주에게 물었다.

“여기 앉으시지요.”

평강은 그나마 멀쩡한 탁자를 찾아 의자를 꺼내 앉고는 온달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온동에게 다시 차를 준비시켰다.

온달이 평강 곁에 앉자, 막바우와 경우가 사내들을 포박해 그 앞에 꿇어앉히고, 독고선이 사내들의 짐 상자를 가져와 안을 열어 보았다.

온동의 말대로 그 안에는 종이와 책, 두루마리 등이 가득했다.

“이자들은 우문선비 일족의 간자들로 생각되옵니다. 우리 고구려 침략을 위해 정탐하던 중으로 온동이 이자들의 정체를 파악해 급히 제게 알려, 떠나려는 것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평강이 온달에게 간략히 설명하고는 온동이 차를 내오자, 보다 상세히 이야기했다.

온달은 평강의 설명을 다 듣고,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린 사내들을 내려다보며 엄히 물었다.

“너희는 누구의 명을 받고 우리 고구려를 염탐한 것이더냐? 그리고 백의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간자는 사실대로 이실직고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기에, 사내들은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자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객잔에서 이자들에게 고신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하오니, 오후에 우랑이 다시 객잔을 찾으면 그에게 넘겨 총관부에서 고신을 진행토록 시키고, 우린 바로 사냥 대회장으로 향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양만춘이 현실적인 안을 제시하자, 온달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평강은 막바우와 경우에게 이들을 이 층 끝방에 감금시키라 말했다.

그리고는 사내들을 이 층에 감금하고 막바우와 경우가 내려오자, 본격적으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 * *

서부총관부의 강이식은 부총관 을지문덕이 조용히 보낸 군사의 뒤를 따라 총관부 지하 감옥으로 내려왔다.

“어서 오시오. 총관.”

먼저 내려와 있던 을지문덕이 웃으며 강이식을 맞이했다.

크고 긴 봉황의 눈과 날카로운 매부리코, 항상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얇고 붉은 입술, 하얀 피부에 모든 이를 내려다볼 훤칠한 키, 번쩍이는 금장 갑옷 등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돋보였다.

고구려의 전설적 명재상 을파소의 현신이라 불리는 을지문덕의 모습이 일렁이는 횃불을 받아 후광마저 뿜어내는 것 같았다.

갑옷 위에 호랑이 가죽을 대충 걸친 강이식은 을지문덕의 웃음에 그저 웃음으로 답하며 물었다.

“그 갑옷, 진짜 금이오? 그런데 태왕 폐하께서 어제 막 도착하시어, 그대가 알뜰살뜰 행차 수행인들을 살펴야 하는데 여기서 뭐하는 게요?”

“아, 살펴야지요. 이자들만 총관께 인사시키고 열심히 돌아다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태왕 폐하를 따라온 오부의 귀족들은 이 못난 사내가 시중드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더군요. 하하하.”

“그자들이야, 부총관이 작은 공이라도 쌓는 것을 꺼려하니… 멍청이들은 신경 쓰지 말고 우린 우리 일을 합시다. 그런데 이자들은 누구요?”

중앙 오부의 귀족은 무력의 강이식보다, 지략과 정치력을 갖춘 을지문덕을 극히 두려워하여 그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심하게 견제를 하고 있었다.

오부의 귀족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고구려의 백성들은 전설적 명재상 을파소를 대하듯 을지문덕을 대했고.

을파소가 체계적으로 조직화한 조의선인들에게도 을지문덕의 신망이 높아, 을지문덕이 조금의 공이라도 세울 시 그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자신들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강이식이 쇠사슬에 묶여 벽에 매달린 사내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우랑에게 상자를 가져오라 명하고는 여전히 세상 모든 이치를 다 아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평강 공주께서 보내신 선물이옵니다.”

“선물? 공주께서? 뜸 들이지 말고 속 시원히 이야기 좀 해보시구려.”

성미 급한 강이식이 참지 못해 설명을 재촉하는데도 을지문덕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서두르지 않았다.

“아직, 총관께서 순찰을 하실 때까지 두 식경 쯤 남은 것 같으니, 우랑이 상자를 옮겨 오면 우선 그것들부터 보시지요.”

“허허, 하여튼 부총관의 꿍꿍이는 알 수 없어. 속 모를 사람이야. 허허. 속 시원히 한 번에 이야기하면 좋을 것을…….”

강이식은 더는 을지문덕을 재촉하지 않고 벽에 매달린 사내들 앞에 서서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잠시 뒤, 우랑이 수하들과 함께 상자 세 개를 가져와 내려놓고 공손히 허리 숙여 물러났다.

그러니 강이식이 궁금해하며 손을 뻗어 검은 천으로 묶은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 들고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펼쳤다.

“뭔데 먼저 읽어 보라 하는 것이요? 어디 보자.”

두루마리를 펼친 강이식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지더니 손짓을 하여 우랑에게 주위 군사들을 물리라고 시켰다.

곧 지하 감옥은 벽에 매달린 사내 셋과 을지문덕, 우랑만 남았다.

그제야 강이식은 두루마리 속 글귀를 소리 내어 엄히 읽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녹아 있었다.

[고구려왕은 중앙 귀족들을 견제해 왕권 강화에 힘쓰느라, 점점 귀족들과 대립하는 형국이 되어 그 힘을 잃고 있다.

허나, 늙은 왕의 뒤를 이을 태자 원의 기개가 높아 신진 세력 중 따르는 이가 많고, 아직 어리지만 이 왕자 건무의 무용이 뛰어나 왕실의 위엄이 굳건하다.

또한 서부총관 강이식의 무력은 만인을 대적하며, 부총관 을지문덕 역시 백성들의 신망이 높다.]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읽던 강이식이 벽에 매달린 이들을 잠시 노려보고는 계속 읽어 나갔다.

[한편, 궁을 떠나 평민과 결혼한 공주와 그녀의 낭군 온달을 따르는 백성들이 점점 늘어, 만약 온달이 작은 공이라도 세워 부마로 인정받게 될 시, 중앙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려던 태왕의 노력이 백성들의 지지를 더욱 받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강이식은 의자에서 일어나 벽에 매달린 사내들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여 읽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힘에 벽에 매달린 사내들의 이마에선 굵은 땀이 흘렀다.

[하여, 태자 원과 이 왕자 건무, 서부총관 강이식, 부총관 을지문덕을 먼저 암살하여 고구려의 군을 이끌 이를 사전에 제거한 후, 군대가 고구려로 진격함이 순서일 것이다.

또한 총력전에 대비해 평강 공주와 온달 역시 제거해 고구려 백성들이 고구려 왕실에 애정을 갖지 못하도록 함도 하나의 계책이다.]

여기까지 읽은 강이식은 을지문덕에게 시선을 옮기며 분을 누른 채 농을 걸었다.

“황송하게도 나와 그대도 고구려에 중요 인물로 평하였구려. 태자 전하와 더불어 말이요. 허허.”

“아마도 오부 귀족 중 우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가 작성한 듯 보입니다. 요동 성주 고무, 대장군 고강, 대대로 대실호연, 태대형 목원의, 태대사자 우연순, 절노부의 대가 연태조. 이들보다 높게 쳐 준 것이니, 심히 고마운 노릇입니다.”

“그러게, 그들의 이름이 없군. 재밌는 일이야. 하하하.”

웃음과 달리 강이식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두루마리로 옮겨 읽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차분하여 감정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릇 나라란, 다스릴 영토와 백성을 필요로 하는 법.

그대들이 돌궐 가한과 혼사를 통하여 힘을 키웠다 하나, 수나라는 강하여 함부로 공격하기 난망하고, 요동성은 본래 선비족이 세운 것이다.]

강이식은 계속해서 걸사표를 읽어 나갔다.

[그대들이 돌궐과 협력하여 군을 이끌고 온다면 압록강 이북을 그대들의 영토로 삼아 국호를 이전과 다름없이 북주로 하여 수의 양견에게 찬탈당한 황실을 재건할 수 있게 도울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잊지 않고 내가 고구려를 취할 수 있게 돕는 것을 지키기 바란다.]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모두 읽은 강이식은 다시 두루마리를 둘둘 말고는 사내들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의 눈은 분노로 불꽃이 활활 일어 벽에 매달린 사내들은 감히 고개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였다.

“구질구질한 걸사표로군. 누구냐? 전쟁을 구걸하는 이 걸사표를 누가 작성했고, 누가 받는 것이더냐?”

굵은 강이식의 목소리가 쇠몽둥이처럼 사내들의 정신을 후려쳤고, 겁에 질린 사내 중 장 첫째가 덜덜 떨며 겨우 입을 열어 답했다.

“저희가 작성한 것이옵니다. 전쟁을 구걸하는 걸사표 부분은 재미 삼아 기재한 것이오며, 그밖에 고구려 사정은 그저 돈을 받고 염탐하여 작성한 것이온데, 의뢰한 이는 저희도 모르옵니다.”

“이 걸사표를 너희가 재미 삼아 작성했고, 받는 이는 누군지 모른다라… 그래, 남의 일을 의뢰받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재미 삼아 걸사표도 작성할 수 있고 말이야. 세상일이란 것이 원래 진지하지는 않으니 말이야. 좋아!”

누그러진 강이식의 음색에 장 첫째의 떨리던 손발도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강이식은 장 첫째의 눈을 잠시 돌아보더니, 뒤돌아 우랑에게 엄히 명했다.

“우랑!”

“네! 총관, 하명하십시오.”

우랑이 앞으로 나와 명을 기다리자,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은 강이식이 명을 내렸다.

“너는 가서 종이와 붓을 준비해 오거라! 과연 이놈들 필적이 맞는지 내가 단단히 필적 조사를 할 것이다.”

“네! 명받겠습니다.”

“감히 어떤 놈들이 대고구려의 태자를 시해하려 하는지 밝혀, 그놈의 가죽을 모두 벗겨 개의 먹이로 던져줄 것이다.”

그의 추상같은 명령에 우랑이 몸을 돌려 뛰어나갔고, 장 첫째를 비롯한 벽에 매달린 사내들은 그만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이 소란 중에도 을지문덕은 강이식과 사내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강이식은 미소 짓는 을지문덕에게 시선을 옮겨 뭐가 그리 좋아 웃는지 물었다.

“부총관, 당신께선 뭐가 그리 좋아 이 형국에 웃으시는 게요?”

“이렇게 좋은 일에 울 수야 없지 않습니까?”

“뭐요? 이 상황에 어찌 그런 가벼운 농담을 하는 것이요?”

“하하하, 총관. 외부의 적을 맞아 싸우기 전에, 내부의 적을 송두리 채 뽑아 낼 절호의 기회를 맞았는데, 이보다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을지문덕은 강이식의 불타오르는 눈길을 외면하고 장 첫째 앞에 서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총관께서도 이놈들이 저 두루마리에 적힌 걸사표를 썼다 생각하지 않으시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고구려 내부, 중앙 귀족 중 북주의 잔존 세력인 우문선비 일족과 내통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찾아내어 가죽을 벗기시옵소서. 총관.”

“아무렴, 그래야겠지. 그런데 북주 잔존 세력과 내통한 역도들을 찾아내 가죽을 벗기든 모가지를 꺾든, 저기 저놈들이 입을 여는 것이 먼저일 텐데.”

강이식이 손을 들어 쇠사슬에 매달린 사내들을 가리키자, 을지문덕이 빙긋 웃으며 그의 손을 막아섰다.

“저것들이 간적들의 수괴를 보기나 했겠습니까? 심부름하는 수하나 보았겠지요. 입을 연들 얻을 것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되오며, 차라리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이 고구려 땅에서 불온한 세력들을 일망타진하는데 도움되리라 판단하옵니다.”

“불온한 세력? 일망타진이라 하였소?”

자신을 향해 되묻는 강이식에게 을지문덕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마쳤다.

“역도들이 어디 적과 내통한 것들뿐이겠습니까? 태왕 폐하의 뜻을 거스르고 사리사욕만 챙기는 귀족들 또한 이 고구려를 좀 먹는 해악들이지요.”

“…….”

“외부의 적을 맞아 싸우기 전, 내부의 구악부터 제거함이 순서겠지요. 바로 저것들이 단초가 될 것이옵니다.”

을지문덕의 자신만만한 눈빛에 이미 계책이 서 있음을 읽은 강이식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구악이라… 동명성왕 이래 오백 년, 이제 드디어 고구려의 구악을 제거할 날이 온 것인가?”

“그런데 총관. 재밌지 않으십니까?”

을지문덕이 뭔가 더 할 이야기가 있는 듯 운을 띄우자, 역시나 강이식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또 이런다… 제발 을지 공은 한 번에 다 이야기하는 습관부터 가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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