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운명은 변하는 법이다 (1)
온동의 불구대천 원수가 공손성 일가란 소리에 놀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멍하니, 이 조그만 아이의 얼굴만 바라보던 가운데.
오직 공손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물정 모르는 막바우만 답답하다는 듯 온동에게 물었다.
“온동아, 네 말에 사내들에게 책을 받아간 그 여인이 공손향이라 하지 않았냐? 공손향이 누군지는 몰라도 공손성이란 사람과 동성 아니냐? 공손성이 수나라 장수면 공손향도 수와 관련이 있지 않겠냐?”
막바우의 물음에 오히려 온동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답을 하였다.
“공손 씨가 어디 한둘인가유? 요동 이 근방에만 해도 공손 씨란 성울 사용하며 행세 꽤나 하는 집이 얼마나 많은데유. 원래 여그가 공손 씨 텃밭이었슈. 참말로 얼마나 많은데유.”
온동의 말대로 후한 말 백마장군 공손찬 이후로 공손 씨들은 중원뿐만 아니라 요동은 물론이요.
중국 북방에 널리 퍼져 아직도 그 세력을 유지하며 과거 공손 씨의 영토였던 요동을 수복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분명, 공손향 그 부인이 말하기를 ‘요동을 되찾으면’이라 했구먼유. 그런 소리는 수의 황제를 섬기는 공손성 같은 신하가 할 소리가 아니여유. 황제 입장에선 역심이잖아유. 그러니 공손성과 공손향은 생각이 다른 공손 씨 일족일 거구먼유.”
독고선은 너무도 총명하게 제 의견을 말하는 온동을 불안한 눈으로 보며, 평강 공주가 이 아이를 온 씨 일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분명 고구려는 물론이요.
장차 중원을 비롯한 북방 초원과 삼한 전역이 큰 화를 입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이 아이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의 화가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공주께서 이 아이에게 관심을 두심은 고구려의 천복이구나.”
독고선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온동의 말을 조용히 듣던 평강이 입을 열고 자신의 생각을 조곤조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온동, 네 말이 타당하구나. 그러나 좀 더 명확한 것이 좋을 테니, 위에 머무는 사내들이 떠나기 전 그들을 붙잡고 심문해 뒤를 캐야 하겠구나.”
“…….”
“또한 공손향이란 여인이 연태조와 함께 있던 여인을 모용설이라 부르고 그녀에게 원한이 있는 듯해 보이니, 공손향 그녀가 어디로 향했을지는 감이 잡히는구나. 그러니 우리도 그곳으로 떠나 그녀에게서 책을 뺏으면 될 것이다.”
“모용설이란 여인을 아십니까?”
경우가 평강 공주의 말에 놀라 물었다.
평강은 빙긋 웃으며 독고선을 가리키고는 경우에게 답했다.
“독고선님도 아실 듯 하온데… 지난 객잔에서 막바우님과 독고선님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 젊은 사내와 연태조의 곁에 있던 여인은 선비족의 장신구와 문양을 수놓은 옷을 입고 있었지요.”
“아…….”
“복색도 물론이고. 아마도 두 남녀는 모용선비족의 후예로, 나이나 생김새가 닮아 남매가 분명할 것입니다. 연태조가 지금은 요동 총관부에 귀빈으로 머물지만, 낙랑 사냥 대회를 참관할 것이니, 아마도 공손향 그녀도 사냥 대회에 올 것이 분명하지요.”
평강의 단정에 모두가 탄복해 고개를 끄덕일 때, 독고선이 정면 계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로잡아 뒤를 캐야 하는데, 벌써 떠나가려고 하네요.”
독고선의 말에 평강과 경우가 일시에 뒤를 돌아보았고, 성미 급한 막바우는 냉큼 뛰어 계단을 내려오는 사내들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시게요? 이제 막 해 떴는데 뭐가 그리 급하슈?”
“당신은 우리가 묵는 걸 반대하더니, 이번엔 떠나가려는 것을 왜 막는 것이오?”
막바우의 물음에 장 첫째가 눈살을 찌푸리며 시큰둥하게 답하고는 막바우를 비켜나가려 했다.
장 첫째의 움직임을 따라 막바우도 움직이며 막아서고는 다시 물었다.
“내가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소? 답은 하셔야지.”
“당신 물음에 답할 필요가 어디 있소? 장사치가 물건 팔러 떠나지 어딜 가겠소. 비키시오!”
등에 진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장 첫째가 답하자, 이번엔 경우가 웃으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장사하러 가시는 중이시군요. 잘 되었습니다. 무엇을 파시는지 모르겠으나, 그 상자 안의 물건을 모두 사들일 터이니, 잠시 더 머무시지요.”
난데없이 경우마저 나서 물건을 모두 사겠다고 하자, 장 첫째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평강 공주의 곁에 서 있는 온동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저 꼬마가 지난밤 일을 말한 것일까? 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했으니, 자세한 내용은 아직 모를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고구려 공주 일행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 괜히 일을 크게 벌일 수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던 장 첫째의 눈이 살기로 충혈되며 결심이 선 듯 뒤에 선 사내들에게 중원의 언어로 말하였다.
“공손향님의 얼굴을 저 꼬마가 보았다. 셋째는 저 꼬마를 잡아 목을 따고, 둘째는 이 앞에 걸리적거리는 두 년놈을 제거하거라! 난 저자를 상대하겠다. 단, 고구려의 공주는 건들지 말거라. 일을 더 크게 벌여선 안 된다.”
정보 수집이 업인 사내들은 이미 경우가 남장을 한 여인임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하북 사투리가 강한 장 첫째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들은 독고선과 온동은 살며시 탁자 위의 찻잔을 손에 들고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평강은 온동이 예의 없이 경우의 찻잔을 집어 든 것에 상황이 거칠게 변하고 있음을 깨닫고, 손을 벌려 독고영을 불러 품에 안았다.
“뭐요? 왜 갑자기 중국말 하는 것이요? 알아듣게 말하지 않고 뭔 꿍꿍이요?”
막바우도 사내들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끼고는 계단 난간에 손을 올렸다.
경우는 자신들은 무기가 없는 빈손이고, 눈앞의 사내들은 박도를 차고 있음에 긴 한숨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상투를 튼 천을 풀어 양손에 길게 쥐고 막바우의 뒤에 섰다.
그녀의 고운 머릿결이 흩어져 내리며 허리까지 드리우자, 영락없는 고운 여인의 자태였다.
막바우에게 막혀 계단 위에서 아직 내려오지 못한 장 첫째가 경우를 흘깃 내려다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입을 실룩이며 웃고는 등에 진 상자를 내려놨다.
뒤에 선 동생들도 모두 그를 따라 상자를 내려놓고 일전을 준비했다.
“처라!”
장 첫째의 일갈과 함께 사내들은 일제히 허리춤에서 박도를 뽑아 들었는데, 발검술이 대단히 빨라 그 무예가 상당함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박도를 뽑아듬과 동시에 장 셋째가 계단 위에서 몸을 날렸고, 장 둘째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막바우를 향해 박도를 휘둘렀다.
장 첫째도 박도를 쥐고 다리를 가볍게 튕겨 몸을 솟구치더니, 곧바로 난간을 뛰어넘으려 했다.
“어딜 이 사람들이!”
막바우는 자신을 향해 박도를 휘두르는 장 둘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 난간에 올렸던 손에 힘을 주었다.
막바우는 이윽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계단 난간을 통째로 뽑아 올려, 뛰어오르려던 장 첫째와 장 셋째의 다리를 걸었다.
장 첫째는 자신을 덮쳐 오는 난간에 놀라 공중에서 몸을 한 번 더 솟구쳐 겨우 피했으나, 장 셋째는 막바우가 뽑아 올린 난간에 다리가 걸려 고꾸라지더니, 뛰어내리던 힘과 더해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장 둘째는 막바우의 괴력에 놀랐으나, 달려드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박도를 휘둘러 막바우의 이마를 위에서 내리찍어 왔다.
“어이쿠! 나 죽네.”
대책 없이 앞에 섰던 막바우의 입에서 처음으로 약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 막바우의 뒤에 서 있던 경우가 몸을 날려 막바우의 등과 어깨를 차례대로 밟고는 박도를 쥔 장 둘째의 오른손 손목을 양손에 쥔 긴 천으로 감싸고 그대로 옆으로 끌고 가 왼손과 함께 묶었다.
그녀가 펼친 것은 포박술의 일종으로 고구려 관에서 일하지 않으면 결코 배울 수 없는 기술이었다.
허공에서 장 둘째의 양손을 결박한 경우는 다시 막바우의 머리를 밟아 자세를 가다듬고 몸을 날려 그대로 장 둘째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막바우는 경우가 뒤에서 몸을 날려 자신의 등과 어깨 심지어 머리까지 밟아 대는 통에 그녀와 장 둘째의 대결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온동은 난간에 걸려 바닥에 쓰러졌던 장 셋째가 머리를 들자 손에 쥔 찻잔을 비검술의 보폭을 밟으며 던졌다.
아직 어려 손아귀와 어깨에 힘이 부족하고 비검술 수련 역시 부족한 온동이었다.
그러나 발끝에서 허리를 타고 넘어온 힘이 찻잔까지 실려 무방비 상태의 장 셋째에게 날아가 그대로 그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고작 일곱 살 아이에 의해 장 셋째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정신없는 통에도 막바우가 뒤집어져 쓰러진 장 셋째를 내려다보니 이마가 터져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저걸 내가 아까 맞은 거잖아. 그나마 내 머리가 단단해 살았구나.”
동생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한 것을 본 장 첫째는 분이 치밀어 올라, 고구려의 공주는 손대지 말라 동생들에게 명한 자신의 말을 스스로 어기고 평강을 사로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평강 공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독고선은 장 첫째가 달려드는 모습에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몸을 솟구쳐 공중에 붕 뜨더니, 손에 쥔 찻잔을 날렸다.
온동처럼 해진의 비검술을 몰래 훔쳐 배우지 못하였으나, 그의 힘이 실린 찻잔은 무서운 기세로 장 첫째를 향해 날아갔다.
온동의 재주에 장 셋째가 처참히 당한 것을 지켜봤던 장 첫째는 독고선의 이 찻잔 날림에 지레 겁먹고 달려오던 기세에서 몸을 돌려 옆으로 피했다.
장 첫째가 몸을 옆으로 돌려 찻잔을 피하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독고선이 탁자를 한 번 더 밟고 몸을 날리며 양손을 머리 위에 들고 아래로 내리쳤다.
“늦었다!”
독고선의 외침에 간신히 찻잔을 피한 후 중심을 잡던 장 첫째의 눈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빈손이었으나, 장 첫째의 눈에는 독고선이 양손에 봉을 쥐고 허공에서 내리쳐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정신이 아득해 급히 박도를 들어 막았다.
독고선은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어 장 첫째의 박도를 발로 차 방향을 틀어 버리고는 양손을 그대로 내리쳐 장 첫째의 이마를 가격했다.
“커억.”
이 한 번의 가격으로 무릎까지 힘이 풀린 장 첫째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경우는 계단 위에 쓰러진 장 둘째의 가슴팍을 밟고는, 손을 묶은 천을 풀어 다시 자신의 긴 머리를 추슬러 상투를 틀었다.
“온동아, 가서 이 자들을 결박할 끈을 찾아오너라!”
평강은 난장판이 된 주변을 살피더니, 이번에 공이 큰 온동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명했다.
“넵! 공주님, 기다리셔유. 후딱 소 묶는 동아줄 챙겨 올게유.”
평강 공주의 따사로운 손길로 칭찬받은 온동이 신이 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평강의 품에 안긴 독고영은 그 뒷모습을 보면서 평강 공주에게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온동 오빠가 저 아저씨를 한 방에 무찔렀어요! 온동 오빠 정말 대단해요! 공주님.”
“그렇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너무도 대단하구나. 지나칠 정도로… 부디, 훌륭하게 커야 할 터인데…….”
독고영의 말에 답하는 평강 공주 마음 한 편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