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고구려에 감도는 전운
객잔 이 층에 오른 온동은 곧장 복도 끝방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아직 잠들기 전인지 사내들의 인기척이 들리며 굵은 목소리가 응답하였다.
“누구냐?”
‘대뜸 반말이여? 여그에 자기들이 최고 어른인가? 공주님도 계시고 온달님, 해진님, 독고선 님도 계신데 말이여. 아, 양만춘님도 계시지. 아무튼 장사꾼 아저씨들이 거치시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며, 사내들에게 좋은 감정이 없던 온동은 속으로 한참 구시렁거리고는 퉁명스레 답했다.
“약속 있다 하셨쥬? 누가 찾아왔구먼유.”
누가 찾아왔단 소리에 급히 문을 연 사내가 한 손에 박도를 쥐고 온동에게 물었다.
“누가 찾아와? 어떻게 생긴 사람이더냐?”
온동은 사내의 물음에 잠시 뜸들이더니, 손짓으로 허공에 얼굴을 그리며 말했다.
“눈이 요렇게, 코가 요렇게, 턱이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먼우.”
온동이 대충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린 사람 형상을 알아볼 리 없는 사내였다.
“뭐야? 이놈아! 요렇게 이렇게가 대체 어떻게 생긴 얼굴이더냐?”
온동은 사내가 야단치는 것도 일부러 모른 척하며 능청을 떨었다.
“아저씨가 제게 찾아온 사람 얼굴을 물으셨고, 지는 그렇게밖에 답을 못혀는디 어쩌유? 다시 설명혀유? 자세히? 그려 봐유?”
온동의 능청에 어린애를 상대로 말다툼하기도 어려운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형님, 제가 나가서 확인할까요?”
사내의 물음에 방 안에서 조금 나이든 목소리가 울려왔다.
온동이 처음 듣는 목소리로 사내들 중 한 번도 온동과 말을 섞지 않은 사내가 분명했다.
“아이야, 혹시 우릴 찾아온 사람이 몇이더냐?”
“셋이구먼유.”
온동은 사내 둘과 여인 하나라 상세히 말하지 않고 방 안의 목소리 반응을 봤다.
“셋이라…….”
잠시 생각하는 듯 시간을 두고 방 안의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그래, 셋이라… 누구라 이름은 말하지 않더냐?”
“공손향이라 했구먼유.”
방 안의 사내 물음에 온동이 여인의 이름을 말하자, 방문 앞의 사내와 방 안의 사내들이 동시에 놀라 소리 질렀다.
“뭣이라! 공녀님이 직접 오시다니…….”
방 안의 사내들이 박도를 쥐고 급히 뛰어나왔고 방문 앞의 사내도 그 뒤를 따랐다.
온동은 사내들이 급히 나오느라 닫지 않은 문 사이로 살며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내들이 지고 온 상자가 열려 있었는데, 상자 안에는 책과 두루마리, 종이들만 들어 있었다.
‘장사꾼 행색이던데 종이와 책만 잔뜩 들어 있네.’
온동이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할 때, 방문 앞에 서 있었던 사내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다시 뛰어와 온동의 목덜미를 잡고 호통을 쳤다.
“이놈! 뭘 엿보는 게냐?”
“문을 열고 가셔서 닫아 드려야 하나 생각 중이었구먼유. 왜유? 열어 놔유?”
온동이 천연덕스럽게 답하자, 사내는 방문을 닫고는 온동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넌,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여기 계단 밑에 서 있거라!”
온동이 방 안으로 들어갈까 염려되어 데리고 내려온 것이다.
온동을 계단 아래에 내려놓자마자 사내는 객잔 밖으로 뛰어나가 여인의 앞에 서서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계단 아래에 선 온동이 객잔 밖을 내다보니, 사내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데도 백의 여인과 붉은 옷의 사내들은 거만하게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사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 첫째, 오랜만일세. 물건을 받으러 왔는데 준비는 되었는가?”
백의 여인이 고운 목소리로 위엄 있게 허리 숙인 사내들 중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에게 물었다.
장 첫째는 여인의 물음에 소매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내 머리 위로 양손을 받쳐 여인에게 올렸다.
책을 받아 쥔 여인은 함부로 책을 펼치지 못하도록 촛농을 떨구고 도장을 찍은 종이 띠가 책을 둘러 처져 있자, 미간을 찌푸리며 노한 음성으로 장 첫째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라도 할까 봐 이런 것을 붙인 것이냐? 나를 능멸하는 너의 마음이 무척이나 괘씸하구나.”
여인의 꾸중에 장 첫째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답했다.
“제가 감히 공녀님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라… 입만 번지르르하지 실상 너는 그러하지 않았느냐?”
말꼬리를 잡아 책망하는 여인의 노기 띤 음성에 사내들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변명하기 바빴다.
사내들의 허둥대는 태도에 여인은 큰 인심 쓰는 듯 좋은 말로 달래며 사내들에게 부드러이 말했다.
“좋다! 내 너의 말을 믿어 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내가 너를 믿으려면 너도 뭔가 내게 믿음을 줘야 하지 않겠느냐?”
장 첫째로 불린 사내는 자신의 동생들을 곁눈질로 살피고는 여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송구하오나 이곳에선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려우니, 이 층 저희의 방으로 오르시지요.”
사내의 말에 여인은 승리자의 표정으로 말에서 내려 사내의 뒤를 따랐다.
온동은 여인이 자신의 곁을 지날 때, 그윽한 꽃향기를 맡으며 여인을 바라보았고, 여인은 고운 섬섬옥수를 들어 온동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고는 계단 위로 올랐다.
객잔 밖 사내들의 시선이 따가워, 위로 따라 오르지 못한 온동은 천진난만한 철부지 아이마냥 계단에 앉아 턱을 괴고는 객잔 밖 사내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온동의 이런 태도와 달리, 열린 귀는 온통 여인과 사내의 발걸음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층 끝방의 문이 열렸다 닫히고, 사내와 여인의 대화가 온동의 귀로 들어왔다.
‘공주님께서 엿들으면 안 된다 하셨는데… 저기 저 아저씨가 여기 가만있으라 하여 별수 없이 듣게 생겼구나.’
아이답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총명한 온동은 사내들의 시선을 의식해 일부러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머리를 무릎에 묻고 자는 척하며 이 층에서 들려오는 사내와 여인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 내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있느냐?”
여인의 물음에 사내가 공손히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만족하실 것입니다.”
“그럼 해 보거라!”
“우리가 수집해 정리한 저 책의 내용에 고구려는 전체 칠십여만 호에 삼백만이 넘는 백성을 지녔다 기재되어 있습니다. 칠십여만 호는 모두 과호로서 실제는 더 될 것이옵니다.”
“뭣이라? 삼백만? 그렇다면 긴장 관계를 오래 유지한 후 전쟁을 일으키면 적어도 삼십만의 군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더냐? 시일을 두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야겠구나.”
“그러하옵니다. 저 책이 주군께 전해진다면 조만간 총명하신 주군께서 이 상황을 파악하시고 돌궐과 함께 군을 이끌어 고구려와 전면전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 책엔 또 무엇이 담겨 있느냐?”
“고구려 오 부 일백칠십육 성(城)의 군사 현황과 산천, 하천의 지형이 담겨 있습지요. 공녀님의 말씀대로 곧 전쟁이 벌어질 터이니, 대비하시옵소서.”
“지금 벌써 봄인데, 돌궐 놈들은 가을에는 약탈하며 겨울엔 전쟁을 하지 않으니, 내년 봄이 되려나?”
대화를 엿듣던 온동은 깜짝 놀라 그만 몸을 일으킬 뻔하여, 재빨리 졸다가 몸을 뒤척인 척하며 생각했다.
‘이거 큰일이구나!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전쟁이 벌어진다니, 어쩌면 좋지? 공주님께 지금 알려드릴 수도 없고 말이여.’
온동이 혼자 전전긍긍하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오냐, 내가 요동성을 되찾게 된다면 너의 노고를 반드시 치하하마. 너는 이후 정보를 더욱 수집해 내게도 따로 보고 하가라.”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객잔에 고구려의 공주가 머물고 있사옵니다. 어찌하오리까?”
“뭣이라? 평강이 있다고? 섣불리 문제를 일으켜 고구려가 대비하도록 해선 안 되니, 그냥 두거라. 평강은 고구려와의 전쟁과 비교 시 작은 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이냐?”
“모용설과 모용상이 고구려의 대대로를 지낸 연태조란 인물과 함께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 어디서 보았느냐? 모용설 그년이 지금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하거라!”
침착하기만 하던 백의 여인의 목소리가 격하게 올라가 사내는 물론 엿듣던 온동마저 놀랐다.
‘모용설이란 사람이 고구려 침략이나, 평강 공주님보다 더 중한가? 그런데 저 흰옷 입은 부인은 도대체 어디 사람이여? 중원인이지만, 수나라는 아닐 것 같은데, 도대체 어느 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려 하는 것이여?”
총명한 온동이 백의 여인을 수나라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이유는 수의 황제 양견이 대돌궐 총사령관마저 임명하여 돌궐을 동과 서로 분열시키고 그 힘을 약화시켰기에 수나라와 돌궐의 사이가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주군이라 부르는 이가 돌궐과 함께 군을 이끌고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인다 하였으니, 총명한 온동은 당연히 수나라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여인과 사내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해 엿듣던 온동의 어깨를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온동은 엿듣던 자신의 행동이 들켰을까 불안해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이 층에서 온동과 말씨름하던 사내였다.
“아함, 깜빡 졸았네. 왜유? 이제 저 들어가 자도 돼유?”
“여기서 졸지 말고, 저 문밖에 나가 졸거라!”
행여나 온동이 여인과 사내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할까 염려된 사내가 온동을 객잔 밖으로 내몬 것이다.
“한창 자는 중인데 왜 나가라고 혀유? 아깐 나으리가 여기 있으라 했으면서. 에휴.”
온동이 투덜대며 객잔 밖에 나가 쪼그려 앉자, 사내는 계단에 몸을 기대고 지켜 섰다.
온동이 머리를 무릎에 묻고 잠을 청하는 척하며 살며시 말 위에 앉은 붉은 옷의 사내 둘을 살폈다.
두 사내는 처음 도착했을 때와 다름없이 조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꼿꼿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허리도 안 아픈 겨?’
다시 이 층에 신경을 집중해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여인과 사내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온동이 좀 더 정신을 집중하려던 순간, 부드러운 손길이 온동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깨웠다.
“여기서 자기에 아직 춥다. 네가 우리 때문에 고생이구나. 이제 들어가 쉬거라.”
온동이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 내려왔는지 백의 여인이 온동을 다정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깜빡 졸았구먼유. 다 끝났슈? 이제 문 걸어 잠그고 저 들어가 자도 돼유?”
“그래, 너도 이제 그만 쉬거라.”
온동의 능청스런 물음에 여인이 눈웃음 지으며 말하고는 가볍게 몸을 날려 말 위에 사뿐히 앉았다.
맵시 있는 동작에 온동이 손뼉 치며 감탄하자, 여인은 기분 좋아 웃으며 말을 돌려 나갔다.
‘나도 해진님과 독고선님께 무예를 배워 열심히 익히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여. 그나저나 뒤를 쫓아가고 싶어도 이 아저씨들이 눈을 부라리고 나를 바라보니, 뾰족한 수가 없구나.’
이렇듯 온동이 겉과 속이 다르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보이는 모습 그대로만 믿고 여인이 떠나자 사내들도 이 층으로 올라갔다.
사내들이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온동은 열심히 작은 머릿속을 굴렸다.
‘흰옷 입은 부인은 놓쳤지만, 저 아저씨들마저 놓칠 순 없지. 일단 저 아저씨들이 방으로 들어갔으니, 오늘 밤은 자고 내일 떠날 게 분명혀. 아침에 공주님께 차를 가져가 드리면서 슬쩍 이야기해 저 아저씨들을 잡도록 해야겠구먼.’
홀로 남은 온동은 날이 밝으면 평강 공주에게 엿들은 이야기를 전할 생각을 하며 객잔 문을 걸어 잠그고 숙소로 들어가려다가 혹시, 사내들이 새벽에 몰래 떠날까 염려스러워 발걸음을 다시 돌려 계단에 쪼그려 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