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심야의 약속된 방문객
“당연히 부모님 원수를 갚아야지! 무술 배워 적과 싸우고 원수를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안 그럴 거면 왜 배우나. 안 그래 경우?”
여지없이 막바우가 끼어들었다.
해진은 막바우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 자신도 동의한다는 뜻을 보였다.
“원한을 갚는다? 그래, 그렇구나. 그럴 생각이었구나. 너희 가족을 잡아간 해적들과 노예로 삼은 중국인들을 죽일 생각인 것이냐?”
해진의 표정은 어두웠으나, 음색은 아직 부드럽고 자상했다.
“그렇구먼유. 우리 마을을 습격했던 산동 지역 해적들을 몰살시키고, 우리 가족을 노예로 부린 중국인 집안 일족을 모두 죽여 억울히 세상을 떠난 아부지, 어무니와 누이동생의 원혼을 달랠 것이구먼유. 원수들의 핏줄은 물론, 개 한 마리 남기지 않을 것이구먼유.”
점소이 소년의 눈에 불꽃이 활활 이는 것 같은 기운에 주위를 둘러싼 모든 이의 눈동자가 커졌고, 독고영은 그만 놀라 오빠 독고선의 뒤로 숨었다.
해진은 소년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부모의 원한을 갚는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다. 그러나 아직 일곱 살 정도밖에 안 된 나이로 너무도 당연히 살인을 언급하다니, 이 아이의 성정이 보통 드센 것이 아니다.’
소년의 대답을 되새기며, 해진은 걱정이 커져만 갔다.
‘이토록 재능이 뛰어난 아이가 살육을 위하여 무예를 익힘은 훗날 세상에 화근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이 아이는 백제인이다. 내게 배운 무공으로 우리 고구려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이미 익힌 무공을 어찌할꼬.’
해진의 표정이 점점 무섭게 변하자, 막바우가 또다시 나서며 소년의 편을 들었다.
“이 아이의 거족이 모두 죽었으니 당연히 원수의 가족도 몰살하여 원한을 갚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해진님? 이보게 경우! 내 말이 맞지 않는가?”
경우는 해진의 눈빛에서 살기를 읽고 이젠 틀렸다 생각하여 막바우의 말에 아무런 답도 못 했다.
‘이 아이가 복수를 다짐하는 곳은 잘못되지 않았으나, 언제든 우리 고구려의 적이 될 수 있는 백제인이야. 훗날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치른다면 이 아이는 어느 편에 서게 될까?’
“왜 아무도 말이 없습니까!”
막바우는 계속해서 의견을 구했으나, 경우는 많은 걱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해진 숙부는 분명 이 아이의 근골을 상하게 하실 거야. 목숨은 연명한다 해도 또 다른 원한을 이 아이가 품게 되겠구나. 아, 이를 어쩌면 좋을까?’
평강 공주도 해진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에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의 재주가 이토록 출중한데, 이런 객잔에서 허드렛일만 하며 지내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더구나, 지금은 절정의 무공도 익힐 수 있게 된 상태이니, 이 아이가 바른길로 나아가지 못할 경우 세상의 큰 화가 될 것이고, 이 아이의 장래에도 좋지 않다.’
이렇듯 생각이 이른 평강은 온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속삭였다.
“이 아이에게 성을 내려 주십시오.”
온달은 난데없는 평강의 요청에 답도 못 하고 눈만 크게 뜬 채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이었다.
평강은 어리둥절해 하는 온달의 얼굴을 다정히 올려다보며 그가 알아듣기 쉽도록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과거도 모르고 성정도 모르오나, 이런 재주를 지닌 아이가 객잔 점소이 일만 하여서는 아이의 장래에도 좋지 않고, 세상에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그렇소만…….”
“또한 이런 비상한 아이가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지 알 수도 없는 일이지요. 만약 이 아이가 오늘 익히게 된 무공으로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못 하게 된다면 해진님과 독고선님에게 큰 죄를 짓게 되오니, 아이가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장군님께서 일족으로 거두시어 돌보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평강 공주는 일부러 소년이 무예를 익혀 원한을 갚겠다고 이야기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심성이 선한 온달은 이 조그만 아이의 한이 얼마나 크면 이토록 험한 말을 쉽게 할까?
그렇게 생각하여 안쓰럽게 여기던 중이라, 평강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으나, 그녀의 다음 말에 난색을 표하고 말았다.
“그러하오니, 온달님의 성을 내려 아이가 온(溫) 씨 성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공주, 내가 비록 가진 것 없지만, 이 아이를 일가로 거둬 친척처럼, 동생처럼 혹은 조카처럼 돌볼 수는 있으나, 정작 나도 성이 없는데 어찌 내가 이 아이에게 온(溫) 씨 성을 내려줄 수 있겠소?”
온달은 삼한의 대부분 백성들이 그러하듯이 성은 없이 ‘따스한 달’이란 뜻의 온달이란 이름만 지녔고, 평강도 이런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우리 장군님께옵서 온 씨 성의 시조가 되시면 가능한 일이지요. 온달님께옵선 이름을 달(達)이라 하시옵고, 이 아이는 동(同)이라 하면 어떻겠습니까?”
평강의 이 말에 소년의 얼굴에 기쁨과 놀라움이 교차했고, 막바우는 괜히 제 일처럼 기뻐 소리쳤다.
“그거 좋소! 온달님이 공주님을 아내로 맞으셨음에도 우리 무지렁이마냥 성도 없다면 말도 안 되지요. 그건 태왕 폐하의 얼굴을 깎는 일이고말고요.”
“허허, 이것 참…….”
“이놈아! 너도 좋지? 다른 이도 아닌, 태왕의 부마가 되실 분의 성을 얻는 것이니 얼마나 좋냐? 나도 그런 복이 있으면 참 좋겠다.”
막바우의 말에 점소이 소년은 성을 얻음이 기쁜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감히 고구려인도 아닌 백제인 출신에 게다가 노예로 끌려가 낙인까지 지닌 자신이 그런 복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워 아무 말도 못 했다.
멍하니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 온달과 점소이 소년을 총명한 양만춘이 둘러보며 서둘러 축하해 주었다.
“공주님 말씀대로 이 아이의 재주가 놀랍고 아까워 온달님께서 일족으로 거두심은 모두에게 감사한 일입니다. 잘 되었습니다. 아가, 네 이름을 공주님께옵서 동이라 지으셨구나. 온달님과 일족이 되는 순간, 너는 이제 백제인이 아닌, 우리 고구려인으로 이 땅에서 쫓겨 다닐 두려움 없이 살아도 될 것이다.”
“어…….”
“어서 성을 내리신 온달님께 감사의 절을 올리거라! 그리고 온달님의 은혜를 되새겨 한 치도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거라.”
양만춘의 이 말에 점소이 소년은 다시 땅에 넙죽 엎드려 온달에게 큰절을 올렸다.
온달도 소년 덕에 덩달아 성이 생겨 얼떨결에 마주 절하고 말았다.
“온달 나으리, 공주님…….”
“아가, 네 덕에 나도 성이 생겼구나. 고맙다.”
해진과 독고선도 자신들의 무예를 익힌 이 아이를 온달이 일족으로 거두어 보살피게 되니, 조금은 근심을 덜 수 있게 되었다.
‘공주님께서 오늘 내가 이 아이에게 또 다른 원한을 남기지 않게 하셨구나.’
해진이 이런 생각을 하며 굳은 표정을 살며시 풀자,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전전긍긍하던 경우도 내심 안도하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가 오늘 공주님 덕에 사지가 멀쩡할 수 있었음을 알까?’
계속 변화하는 분위기를 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양만춘은 아까부터 객잔 안에서 몰래 밖을 내다보고 있던 객잔 주인을 손짓으로 불러 은 한 덩이를 건넸다.
“그간, 이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하셨소.”
“아이고, 별말씀을…….”
객잔 주인은 함지박만 한 웃음을 만면에 가득 띄고, 양만춘이 건넨 은을 품에 넣으며 연신 굽신거렸다.
평강 공주는 소년에게 객잔 주인의 공도 크니, 이곳을 떠나 낙랑 사냥 대회로 갈 때까지 전처럼 객잔 일을 돕도록 시켰다.
온달 일행이 객잔 밖에서 점소이 소년을 둘러싸고 한바탕 치르던 소란이 정리될 무렵.
우랑이 서부총관부 군사 십여 명을 이끌고 도착해 평강 공주와 온달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찌 오셨습니까?”
온달이 우랑의 인사에 답하며 물었다.
“총관 강이식과 부총관 을지문덕이 공주마마와 온달님께 전해 올리라 한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온달의 말에 답한 우랑은 군사들이 지고 온 것들을 온달의 앞에 내려놓게 하고는 차분히 설명했다.
“삼짇날 사냥 대회 때 입으실 의관과 도움 되실 창, 검 및 활과 화살 등을 가져왔습니다. 부총관께서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 여쭤보라 하명도 하시었습니다.”
성질 급한 막바우가 온달의 앞에 수북이 쌓인 물건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하나같이 으리으리해 보이는군요.”
막바우의 말에 평강은 손짓을 하여 경우를 불러 물건을 살피고, 일행 중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 방으로 옮기라 하였다.
신이 난 막바우는 경우와 함께 각자의 방으로 짐을 날랐다.
“내 것도 있네! 하하하.”
새로 생긴 의복과 멋들어진 창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평강 공주는 우랑의 노고를 치하하며 한 가지 더 부탁하였다.
“일곱 살 사내아이가 갖출 의복과 작은 말 한 필, 그리고 수련용 목검도 부탁드리겠소.”
“우랑, 공주마마의 명을 받사옵니다.”
평강 공주의 명에 우랑은 바로 답하고는 군사들을 이끌고 총관부로 돌아갔고 온달 일행도 객잔 이 층으로 모두 올라갔다.
평강은 계단을 오르며 소년을 불러 몇 가지 당부를 하였다.
“온동아, 네 귀가 밝아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가능하다면 이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허락 없이 듣지 않도록 노력하거라.”
“알겠구먼유…….”
“그리고 끝방 사내들이 오늘 만나기로 한 이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만약 오거든 내일 내게 인상착의를 전해주기 바란다.”
소년은 평강의 당부에 크게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이구먼유.”
평강은 소년의 대답이 진실되고 든든히 느껴져 머리를 쓰다듬고는 계단을 올랐다.
날이 저물어 이젠 ‘온동’이란 성과 이름을 지니게 된 점소이 소년은 오늘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꿈처럼 느끼며 아직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부지, 어무니. 나, 성이 생겼구먼유. 스승도 생기고 수양아부지도 생겼고, 천하에서 제일 유명한 온달님과 일족도 되었슈. 이제 지가 무예를 익혀 원한만 갚으면 지는 더 바랄 것이 없구먼유. 기다리셔유.’
온동의 두근거리는 가슴이 겨우 진정될 무렵, 밤의 고요 속에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깊어 온달 일행은 모두 자신들의 방에서 잠이 들었고, 객잔 주인 역시, 일찍 잠자리에 든 상태라 온동이 홀로 객잔 밖으로 나와 말을 타고 오는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맞았다.
가운데 백마를 사이에 두고 검은 말 두 필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백마엔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양쪽 허리에 가늘고 긴 검 두 자루를 각각 차고 있었고.
검은 말 두 필엔 붉은 옷을 입은 사내 둘이 긴 머리를 풀어 헤친 후 역시 붉은 머리띠를 이마에 둘러 묶었는데, 이들은 허리춤에 긴 환도를 차고 있었다.
온동은 백마 위의 여인이 무척 아름다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하였다.
“우리 객잔은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구먼유. 죄송혀유.”
“호호호, 너무 박정한 것 아니냐? 그래, 고작 문전 박대하고자, 마중 나온 것이더냐?”
백마 위 여인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둥근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지며 웃음 짓자, 온동은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기분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죄송허구먼유. 밤이 깊어 가는데 송구헙니다.”
문전 박대하는 것이 미안해 작은 머리를 숙여 공손히 용서를 구하는 온동의 머리 위로 여인의 고운 음성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괜찮다. 우린 여기 머물려고 온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무척 싹싹하고 예의가 바르구나. 오늘 이 객잔에서 만나기로 한 이들이 있어 온 것이니, 그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으면 나오라 전해주면 좋겠구나. 부탁한다.”
온동은 여인이 만나기로 약속된 이가 있다는 소리에 이 층 끝방에 머물고 있는 장사치 세 명을 떠올려 물었다.
“혹시, 등에 짐을 진 상인 세 분과 뵙기로 하셨나유?”
“호호호, 등에 짐을 졌는지는 모르겠으나, 혹시 오늘 이곳에서 약속된 이가 있다면 공손향이 왔다 전해 보거라. 만약 나와 약속된 이가 맞으면 내려오지 않겠느냐?”
여인의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해 온동은 끝방의 거친 사내 셋과 약속된 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고운 입에서 나온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객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아가씨, 장 씨 삼 형제가 상인 행세를 하고 있나 봅니다.”
“아무래도 상인 행세를 해야 고구려 땅을 돌아다니기 수월하지 않겠소?”
온동은 평강 공주의 당부대로 허락 없이 남의 대화를 엿듣지 않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뒤에서 저절로 들려오는 것을 어쩌지 못해 세 남녀의 대화를 듣지 않기 위해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공주님께서 허락 없이 남의 이야기 엿듣지 말라 하셨는데, 자꾸만 귀에 들리네. 빨리 올라가야겠구먼. 그래도 저 부인의 얼굴은 잘 기억해 두었으니, 내일 공주님께 말씀드려야지.’
백의 여인은 고작 이십 대 중반쯤 되었으나, 이제 일곱 살인 온동에겐 그저 나이 든 부인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