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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42화 (42/328)

042화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재능(才能)

귀 밝기가 초인적인 점소이 소년은 너무도 집중한 탓에 평강 공주의 부름을 듣지도 못했다.

소년은 해진이 펼쳤던 파산귀검 공격 여덟 초식을 정확히 따라하고는 숨을 헐떡이며 서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는 몸에 제대로 익히기라도 할 작정인지 다시 파산귀검의 초식을 펼치는데 이번엔 순서를 바꿔 펼쳤다.

“저, 저 아이…….”

소리없이 객잔 안으로 들어가던 평강 공주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한 곳을 주시하자, 경우도 의아해 평강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경우의 외침에 해진의 시범에 시선을 고정했던 온달도 점소이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고, 해진도 파산귀검 시범을 중단하게 되었다.

‘위력이 크게 실리지 않았으나, 정확히 내가 시범 보인 파산귀검 여덟 초식을 완벽히 시전하고 있구나. 심지어 눈으로 봐선 결코 알 수 없는 호흡과 보법마저 익혀 흐트러짐 없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아이가 어찌…….’

소년이 한 치의 다름도 없이 매끄럽게 자신이 시범 보인 파산귀검 동작을 수행하는 모습에 해진도 놀라 소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아가, 네가 어찌 파산귀검을 펼칠 수 있는 것이냐? 그리고 우리 조의선인의 호흡과 보법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결코 위압적이거나 고압적이지 않았으나, 해진의 목소리는 위엄이 실려 동작을 멈춘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한 채, 넙죽 땅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죽을죄를 지었구먼유. 지가 배우고 싶은 욕심에 훔쳐보고 따라 했어유. 용서해 주셔유.”

“뭐라? 보고 따라한 것이라? 그것이 가능해 한 말이더냐? 내가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참말이구먼유. 여서 보고 따라한 것 맞구먼유. 믿어주셔유.”

해진이 엄히 다시 묻자, 소년은 여전히 땅에 머리를 조아린 체 하소연을 하였는데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소년의 말이 사실이라 믿기도 어려웠다.

“그래, 네 말이 백 번 맞다고 치자. 그럼 시범도 설명도 하지 않은 호흡과 보법은 어찌 알고 중심과 힘을 이동시켜 나뭇가지에 실은 것이더냐?”

해진이 소년의 머리 앞까지 다가 서, 소년의 작은 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 층에서 온달님이 외우시던 소리를 들었구먼유. 제 귀가 밝아 그것을 듣고 외운 게 전부여유.”

“뭣이라? 듣고 외웠다? 허허.”

소년의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도 안 차 해진이 혀를 끌끌 찼다.

온달 역시, 자신이 소리 죽여 외우던 소리를 듣고 소년이 익혔단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아이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믿기도 어렵군요.”

평강 공주의 옆에 서며 온달이 말했다.

그리고 평강이 잠시 생각하더니, 온달에게 답했다.

“귀가 밝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외우고 몸에 익혔다니…….”

평강 공주 본인도 온달이 외우던 소리를 듣고 모두 암기할 수 있었음에도 소년이 자신처럼 완벽히 외웠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아가! 네가 글을 아느냐?”

이번엔 평강이 소년에게 부드러이 물었다.

무릇 타인의 무공을 훔쳐 배우는 것은 도둑질과 마찬가지로 금기시 되는 행위였다.

물론 한눈에 보고 저절로 익혔다면 죄를 묻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는 가능한 사람이 전무하여, 무공비급을 훔쳐 수련하거나, 오랜 세월 무공 수련을 몰래 훔쳐보며 익혀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허락 없이 타인의 무예를 익히는 행위는 의도가 불순하여 큰 죄로 다스렸다.

심지어 스승의 무예조차 허락받지 않고 익힘 역시 죄로 다스렸다.

비록 소년이 어리다 하여도 중원에 노예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겼으며 이런 행위가 죄임을 알기에, 사시나무 떨듯 웅크린 몸을 부르르 떨며 평강 공주의 물음에 답했다.

“글을 아는구먼유.”

“글은 어디서 배웠느냐?”

평강은 소년을 꾸짖고자 묻는 것이 아니었으나, 소년의 사정을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다.

“노예로 끌려갔을 때, 어깨 너머로 익혔구먼유. 잘못혔어유.”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이냐? 글을 훔쳐 배운 것? 아니면 무예를 익힌 것? 혹은 네가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 이 중 무엇이 잘못된 것이더냐?”

“동냥 글공부와 무예를 따라한 것이 죄이구먼유. 제 말은 모두 참말이여유.”

평강 공주의 물음에 대답하는 소년의 태도에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라 믿는 것도 어려워 난감해진 해진이 그만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허허, 이 아이가 지금 취하는 태도가 진실되어 보여 믿고 싶으나, 이 아이가 하는 모든 말이 가능한 일이 아니라 믿을 수도 없고 난처하군요.”

뒤에서 보다 못한 막바우가 답답함을 참지 못해 소리쳐 말했다.

“뭐가 난처한가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믿으시면 되지. 이 아이가 몰래 훔쳐 배울 생각이면 숨어서 수련하지 보란 듯이 여기서 이 지랄 하다 딱 걸리겠습니까? 안 그래, 경우?”

막바우의 무례한 언사에 경우가 대답 대신 손으로 막바우의 입을 틀어막고는 해진에게 막바우를 대신해 사과하였다.

“해진 숙부, 막바우 이자가 산속 화전민 마을에서만 살아 예의를 배우지 못한 것이지, 심성은 착해요. 제 생각도 이 아이가 딱히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해진은 남장을 하고 있는 친구의 딸, 경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도 그렇게는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기엔 석연치 않은 것이 있구나. 이 아이도 너처럼 뭔 사정이 있는 것일까?”

경우가 남장을 하여 여인네임을 속이고 있음을 은연중에 꾸짖는 말이었다.

“경우 자네도 뭔 사정 있는가? 자네도 혹시 귀가 밝은가?”

눈치 없는 막바우가 경우의 손을 입에서 떼어 내며 물었다.

경우는 그런 막바우를 흘깃 쏘아보고는 해진을 향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어느새 독고영이 소년의 곁에 쪼그려 앉아 떨고 있는 여린 어깨를 조그만 손으로 감쌌다.

“오빠, 너무 두려워하지 마. 다들 좋은 분들이셔.”

독고영의 보드랍고 따스한 손길에 소년의 어깨 떨림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아가야, 네가 한 번 듣고 외우고, 한 번 보고 몸으로 따라할 수 있다 하니, 그럼 내 봉술도 따라하면 모두가 믿을 것이다. 해 보겠느냐?”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독고선이 차분한 어조로 소년에게 묻자, 소년이 고개 들어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소년의 눈에 빛이 돌아 자신감이 가득했다.

“할 수 있구먼유. 할게유.”

독고창법은 독고 씨 일족에게만 전해지는 가전무술로 아직 독고영도 모두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독고선은 소년의 말을 믿고 싶으나, 확신이 서지 않는 해진을 위해 소년을 대신 검증하러 나선 것이다.

벌떡 일어선 소년은 독고선이 시범도 보이기 전에 맨손으로 마치 창을 쥔 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독고선이 독고영에게 시범 보였던 독고창법을 그대로 흉내 내기 시작했다.

독고선은 그 모습에 기가 질려 헛웃음을 흘렸고, 해진도 황망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공주님 이외에도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또 있었군요. 허허허.”

해진의 이 말에 평강 공주는 이제 소년에 대한 의심을 해진이 푼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양만춘도 살며시 해진의 표정을 살피더니, 앞으로 나와 소년을 일으켜 세우며 몸에 묻은 흙을 털어 주고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군요. 하하하. 이 아이와 같은 수재는 학문도 무예도 쉽게 익히고, 저 같은 둔재는 노력에 노력을 해도 이루는 것이 없고. 하하하. 아이야, 너 참 대단한 재주를 지녔구나. 하하하.”

양만춘의 이 자조 섞인 유쾌한 웃음에 해진도 웃었고, 온달도 남의 일 같지 않아 크게 따라 웃었다.

“그렇군요. 참으로 비상한 재주를 지녔군요. 하하하.”

누그러진 분위기에 소년의 창백했던 안색도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

평강은 소년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주며 자상히 말했다.

“애썼다. 그러나 아가, 아무리 한 번 보고 들어 익혔다 해도 허락을 얻지 않고 따라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죄송허구먼유.”

“그래, 해진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으니 어서 감사의 절을 올리고 독고선님께도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거라! 두 분께서 너를 제자로 맞으시진 않았으나, 네게 기회를 주셨으니, 너는 이제부터 두 분을 스승으로 섬기고 따르거라.”

그녀의 이 말은 곧, 소년이 무예를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길 해진과 독고선에게 청하는 한편, 소년의 재주를 아끼어 해진과 독고선 두 사람도 이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일 것을 은연중 권하는 말이었다.

영특한 소년이 평강 공주의 말을 따라 두 사람에게 넙죽 절하며 예를 올렸다.

그러자, 독고선은 그저 웃었고 해진도 웃으며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허, 이런, 이런. 그래 알았다. 허락받지 않고 익혔으나, 이미 익힌 것을 어쩌겠냐. 누가 네게 묻거든 조의선인 해진이가 네게 가르쳤다 말하거라.”

해진의 허락에 이어 독고선도 소년에게 자상히 말하였다.

“아이야! 우리 독고창법이 비록 세상에 내세울 것은 못 되나, 오직 독고 씨만 배우도록 되어 있단다. 그러니, 누가 묻거든 네 수양아버지가 독고선이라 하거라. 내 나이 이제 스물다섯이지만, 수양아들 하나 둘 순 있겠지. 하하하.”

독고선의 이 말에 소년은 감격해 눈시울이 붉어져 연신 허리를 숙였고, 경우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막바우를 놀렸다.

“막바우, 그대도 독고선님의 봉술을 훔쳐 배우고 있으니, 배운 걸 사용하려면 독고선님을 아버지라 불러야 할 거요.”

“뭐? 내가 한 살 더 많지 않나?”

“그럼 봉술 배워서 사용하지 않을 셈이요?”

“그건 또 안 되지. 아이고! 이거 어쩐다?”

막바우는 경우가 놀리는지도 모르고 심각해져 괜히 독고선의 눈치만 보았다.

“막바우 형은 원래 훔쳐 배우기로 한 거 아니셨소? 그럼 훔쳐 배워 사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누가 묻거든 당당히 훔쳐 배웠다 하시면 되지요. 내가 막바우 형에게 따져 묻지 않을 것인데 뭐가 문제겠소. 하하하.”

독고선은 자신의 눈치만 보는 막바우를 향해 호탕하게 말하였다.

“아, 맞다! 원래 대놓고 훔쳐 배우기로 한 것이지. 하하하. 나야 뭐 체면 같은 게 없으니. 하던 대로 하면 되겠네. 하하하. 독고 형, 고맙소. 정말 고맙소. 열심히 훔치겠소이다. 하하하.”

독고선의 말에 안심한 막바우는 그제야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를 때 평강은 혹시 모를 장래의 일에 살며시 불안함을 느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때 해진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점소이 소년에게 물었다.

“아가, 너는 평소 무예에 관심이 많았나 보구나.”

“그렇구먼유. 참말로 많았어유.”

소년의 대답에 막바우도 끼어들어 해진에게 소년을 거드는 소리를 했다.

“해진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내아이들은 원래 어려서부터 나뭇가지 꺾어 장난감 칼도 만들고 창도 만들어 놀지 않습니까? 당연한 것을…….”

해진은 막바우의 주책없이 나섬을 나무라지 않고, 그에게 그저 웃음으로 답하고는 소년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아가, 너는 무예를 익혀 무엇이 하고 싶으냐?”

이 물음에 눈치 빠른 평강 공주과 경우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신크마리께서 백제인인 이 아이가 무예를 익혀 조의선인의 명예에 혹시 모를 해가 될까 염려하시는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해진님은 이 아이의 과거도 모르고 장래도 책임지고 지키실 수 없으니…….’

평강이 이런 생각을 할 때, 자애로울 땐 한 없이 인자하지만, 완고할 땐 단호한 해진의 성격을 잘 아는 경우는 평강 공주에 비해 등골이 서늘해지며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해진 숙부께서 이 아이의 답 하나 어긋남에 무공을 펼치지 못하도록 근골을 끊으실 수도 있다.’

경우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조의선인들의 규율이 엄하고 명예를 소중히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예 익힘을 허락하지 않을 시, 이미 익힌 무예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근육이나 힘줄 혹은 뼈를 상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평강 공주는 경우만큼은 아니지만, 혹여 해진이 이 아이에게 무예 익힘을 허락지 않을까 염려하며 아이의 대답에 귀 기울였다.

“아부지, 어무니의 원한을 갚고 제 누이동생의 원한도 갚을 것이구먼유.”

소년의 대답은 결의에 찼고, 해진의 자애롭던 표정은 어두워졌다.

어리고 나이 든 두 사내의 표정 변화에 평강 공주와 경우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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