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산을 가르는 파산귀검(破山鬼劍) (4)
접시와 그릇이 비워지자 객잔 주인이 차를 내왔고, 해진이 조용히 소리 낮춰 무예를 전하기 시작했다.
객잔에 다른 이들이 있음을 고려해 소리를 낮춘 것이다.
조의선인들은 먼저 말로 이치를 전한 후, 시범을 보여 구전된 이치를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방식을 수 대에 걸쳐 해왔다.
그렇기에 해진도 이런 방식으로 온달에게 비검술과 백두검법의 이치를 전하려 했다.
“일단 편히 차를 드시면서 제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해진의 말에 온달이 오히려 긴장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자, 해진이 빙그레 웃었다.
독고선은 방해하지 않고자 독고영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고.
경우도 눈치 없이 앉아 있는 막바우를 끌고 나갔다.
양만춘도 혼자 멀뚱멀뚱 앉아 있기 무안해 오랜 벗 경우의 뒤를 따랐다.
“이보시오! 나도 앉아서 들으면 안 되오?”
막바우가 끌려 나가면서도 떼를 쓰니, 경우의 얼굴이 험악해지며 야단쳤다.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그렇게 살다간 객사합니다.”
이 소리에 막바우의 입이 다물어지고 양만춘도 뒤를 따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간 객사하는 것이구나. 하하하.’
평강 공주는 모두가 내려간 뒤에도 온달의 곁에 붙어 앉아 온달보다 더 눈을 빛내며 해진의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헛되이 흘리지 않고 듣기 시작했다.
“제가 말로 설명을 드린 후, 밖에 나가 시범을 보이고 온달님이 따라 하시면 되십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제 이야기를 귀담아들으시면 향후 홀로 수련하시어 몸에 익혀 온달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들어 보소서.”
간단하다 말하나, 들은 걸 몸으로 옮기기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아, 몸에 익힌 무예가 체계적이지 못한 온달에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고조선 때부터 내려온 이 수련법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해진이라 온달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였다.
해진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온달은 몸을 당겨 앉으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 조의선인들이 익히는 무예는 공격과 방어의 구별이 없으며, 중심이 고정되지 않고 이동합니다. 그렇기에 빠르게 움직일 때도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아 병장기와 타격점에 힘을 실을 수 있지요.”
“네.”
“비검술을 시전할 때는 항상 복압을 유지하고 허리에 힘주어 오른발을 앞발 삼아 크게 내디디며. 이때 허리는 뒤로 젖혔다가 이동하는 다리에 중심을 잡아 앞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아…….”
“또한 단전에 모아둔 복압을 이용해 어깨 위로 들어 올린 팔을 타고 힘이 전해지면 손목에 탄력을 이용해 검을 뿌리듯 날립니다. 복압을 유지하기 위해선…….”
해진이 모든 동작과 호흡 하나하나 섬세히 설명하고, 또 다시 세부적인 손의 움직임까지 설명했다.
그리고는 몸을 움직일 때의 보폭과 발끝의 방향마저 단숨에 이야기하였다.
온달은 아무리 집중해 들어도 술술 귀에 들어온 이야기가 머릿속을 솔솔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해진은 온달의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제가 온달님과 지금 대련한다면 저는 결코 온달님을 이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무예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에도 말이지요.”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나 이기기 어렵다 하였지, 불가하다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 손에 들린 장검을 날리는 비검술 때문이지요. 그러나 비검술은 손에 검 한 자루만 있다면 검을 날린 후 그다음 수가 없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해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온달에게 사뭇 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표정은 엄했으나, 말투는 고압적이지 않았다.
“자, 그럼 온달님. 제가 들려드린 비검술의 검을 쥐는 법, 허리에 힘을 주고 복압을 유지하는 호흡 그리고 어깨와 손목에 힘을 전하는 방식을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해진의 물음에 온달은 이마에 식은땀을 한가득 담은 채 입도 떼지 못했다.
“듣기는 잘 들으셨는데 남으신 것이 없으신가 봅니다. 그럼 다리에 힘을 실어 발을 내디디며 중심을 이동하는 방법을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이번 물음에도 온달은 입이 여전히 굳어 땀만 흘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들을 땐 술술 귀에 잘 들어오지만, 실상 남는 것이 없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괜찮습니다. 다시 말씀드릴 터이니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수련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해진이 엄한 표정을 풀고 다시 인자하게 웃으며 말하자, 온달이 더욱 송구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해진님, 제가 해진님께서 전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우리 장군님께서 해진님 없이 수련하시는데 조금의 도움은 되리라 생각하옵니다.”
온달의 곁에서 가만히 눈을 빛내며 듣던 평강 공주가 고운 입을 열어 지금껏 해진이 들려준 모든 이야기를 그대로 똑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되뇌어 말했다.
단 한마디도 다름없이 평강이 암기하여 말하자 온달은 물론이요, 해진도 놀랍고 신통해 감탄하고 말았다.
“공주께옵서 이런 재주가 계셨군요. 허허허, 한 번 듣고 한마디도 틀리지 않고 외운다니, 천하에 둘도 없을 재주이시옵니다.”
“해진님께옵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외운 것을 글로 남기고, 또한 우리 장군님과 해진님께서 수련하는 모습도 그림으로 담아 기록하여 남기고 싶사온데 허락하실 수 있으신지요.”
암기한 것을 잊기 전에 글로 남기고, 수련하는 것마저 그림과 글로 남겨 온달이 홀로 수련할 수 있게 하고자 생각해 허락을 구한 것이다.
해진은 평강 공주의 총명함에 그저 탄복해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온달을 향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온달님에겐 제가 없어도 공주님께서 훌륭한 스승이 되어 주실 수 있으니, 저는 아무런 걱정 없이 제가 아는 것과 온달님이 필요하실 것을 모두 전할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께옵선 암기하신 것을 기록하신 후 제게 보여주시면 빠진 부분과 다른 부분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진의 말에 평강 공주는 점소이 소년을 불러 붓과 종이를 준비시킨 후 암기한 것을 글로 남겼다.
또한 해진은 이를 읽어본 후 한 곳도 틀리거나 누락된 것이 없음에 또다시 감탄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진중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조의선인들의 규율에 무공을 글이나 그림으로 기록을 남겨선 안 된단 규정은 없으나, 오랜 세월 간 관습처럼 입으로만 무예의 심법이 전해져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렇게 글로 읽으니, 불필요한 부분과 필요함에도 없는 동작이 눈에 들어와 참으로 좋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제가 공주님께서 기록한 이 심법을 읽어본 후 온달님과 밖에서 수련하며 보충한다면 이 심법 자체가 더욱 발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해진의 말에 온달과 평강은 크게 기뻐하며 먹물도 마르지 않은 심법을 해진에게 건넸다.
해진은 공손히 심법을 두 손으로 소중히 받은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본인의 무예를 기록한 글이라, 해진님께선 이미 몸으로 익히셨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소중히 받으시는군요.”
해진이 방으로 들어간 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온달이 근심을 덜은 표정으로 평강에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자신이 아둔해 해진이 전하는 이야기를 머리에 새겨 기억 못 한 것을 총명한 평강 공주가 해결해 주어 표정이 밝아진 모양이다.
“해진님께서 이미 아는 내용을 소중히 받아 가신 것은 분명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조의선인들의 무예를 말이 아닌 글로 보니, 그동안 느껴오면서도 찾지 못했던 단점과 보완점이 떠오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강 공주는 무예를 배운 적 없음에도 학문의 도가 모두 일치하듯 학습하고 발전시키는 법을 알기에, 해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평강이 예상했던 것처럼 해진은 자신의 방에 앉아 심법을 살피고 또 살피며 그동안 의구심을 품었던 부분을 고치고 추가하고 빼내며 밤을 지새웠다.
‘그동안 스승께서 내게 전하신 귀결만 기억하고 따르며 거듭해 수련하기에 바빴지, 되돌아 전해 내려오던 귀결에 오류가 있었음을 간파하지 못했구나.’
해진은 자책하듯이 생각했다.
‘아마도 처음엔 완벽했겠으나, 대를 이어 오직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다가 전하고 받는 사람들의 실수로 내용이 바뀌고 사라진 것들이 있었으리라. 내 여태 이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나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본디,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구전은 오류가 존재하며 사라지고 더해지기 마련이었다.
고조선 때부터 전해온 조의선인의 비기가 바로 이런 경우였으니, 해진은 되돌아 점검할 기회를 마련해 준 온달과 평강 공주가 그저 고맙기 그지없었다.
평강 공주가 기록한 심법을 한참 들여다보던 해진은 점소이 소년을 불러 종이와 붓을 준비시켰다.
그 후, 그 옛날 스승이 전한 귀결을 하나하나 떠올려, 자신이 수십여 년 동안 금과옥조처럼 따르고 수련해 온 것들을 종이에 꼼꼼히 기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평강이 기록한 심법과 비교하며 천천히 읽고 또 읽더니 심연 깊은 곳에 가둬 두어 무의식 속 앙금처럼 남아 있던 의문을 드디어 끌어올렸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해진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온달과 평강 공주는 감히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른 이들도 해진의 방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윽고 해가 머리 위에 높게 올랐을 무렵이었다.
평강과 함께 객잔 이 층 창가 탁자에 나란히 앉아 차를 들던 온달의 뒤로 해진이 두루마리를 한 아름 품에 안고 나타났다.
하룻밤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초췌해진 해진의 몰골에 순간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평강이었다.
그런 그녀의 등에 손을 둘러 감싸며 온달이 해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해진은 그 인사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온달과 평강 공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해진님,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결코 조금도 안녕해 보이지 않는 해진에게 온달이 다시 건넨 인사는 전혀 무의미했다.
해진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온달이 건넨 인사에 답 대신 가슴에 품은 두루마리 중 하나를 꺼내 온달의 앞으로 조용히 밀었다.
온달은 두루마리를 집어 들며 해진의 깊이 들어간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평강은 온달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쥐여 펼쳐 보고는 온달을 따라 해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온달과 평강 공주는 그의 퀭한 눈에 형형한 기운이 엿보여 그나마 안심하였다.
해진은 온달과 평강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더니, 메마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담아 말했다.
“두 분께 제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난데없는 해진의 말에 어리둥절한 온달이 평강을 바라보며 의견을 구했으나, 이번엔 총명한 평강도 답을 내기 어려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