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산을 가르는 파산귀검(破山鬼劍) (2)
“허, 좋게 이야기했는데 안 되겠구먼.”
늘 투덕거려도 사지를 함께한 동료인 경우가 모욕을 받자, 분을 참지 못한 막바우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막바우의 모습이 울퉁불퉁 근골이 탄탄해 힘이 장사임은 누구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나, 사내들의 표정은 여전히 막바우를 만만히 보는 것 같았다.
사내들의 뒤에 서 있는 독고선은 왼손을 뻗어 독고영을 자신의 뒤에 세우고 사내들과 막바우가 싸움을 벌일 경우, 언제든 달려들어 막바우의 앞을 지키려 준비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독고선의 기에, 살며시 오른손을 허리춤에 찬 박도로 가져가 대었다.
이들은 객잔으로 다가오며 독고선이 독고영에게 봉술을 지도하던 모습을 보았기에, 독고선의 실력이 상당하다 느끼어 독고선만은 경계하고 있었다.
활과 검을 방 안에 두고 나온 경우는 사내들이 박도에 손을 가져가자, 수박 기술의 땅 밟기 자세를 살며시 취했다.
언제든 제일 앞에선 사내에게 달려들어 양손의 손날로 도끼질을 시전할 준비를 한 것이다.
오직 공격 일변도인 양손 손날 도끼질은 수박 기술에서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달려들며 내리치는 수법이기에, 방어가 전무해 다른 사내가 경우의 옆을 공격하면 피하기 어려워, 경우도 이번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객잔 밖에 상황이 험악해지자, 평강 공주는 손님을 받지 않는다 해도 굳이 이곳에 머물러야 할 정도로 저 사내들의 내일 약속이 그리도 중한지 궁금해졌다.
‘장사치는 손해 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특히, 중원의 상단은 더욱 그러한데 저들이 아무런 이득도 남지 않을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고구려 서부총관부 관할임에도 총관부의 뜻마저 거스를 정도로 중요한 만남이 무엇일까?’
사내들과 총관부에서 당부한 손님들이 당장이라도 싸움을 벌일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는 객잔 주인의 모습이 평강의 눈에 들어왔다.
“주인장, 사정이 있는 분들 같으니 받도록 하세요.”
삭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평강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오자, 사내들은 일제히 고개 들어 이 층을 올려다보더니, 그녀의 기품 있는 모습에 자연스레 머리 숙여 예를 올렸다.
“주인장의 이야기대로 귀인이 계셨군요. 저희는 방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여, 결코 귀인께 불편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평강 공주를 올려다보고 갑작스레 공손히 태도를 바꾼 사내들이 더욱 의심스러워진 독고선은 이들의 박도를 유심히 살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북주의 돌격용 박도다!’
넓은 벌에 군대가 마주 보고 대회전을 치르기 위해 서로 진을 벌릴 경우, 최전방에서 방패든 중장보병의 방어진을 뚫기 위해 사용되는 우문선비족의 북주, 돌격부대 박도와 모양이 같음을 알아본 것이다.
‘짧지만 두터워, 북주 특유의 무게를 이용한 돌격용 박도다. 북주는 수 황제 양견이 나라를 빼앗아 수로 국호를 변경해 이젠 사라진 나라인데…….’
독고선은 박도를 보고는 놀라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근래에 수나라의 핍박을 받은 동돌궐과 북주의 잔존 세력이 힘을 합치 선비족의 새로운 북주를 재건하고 있다더니, 그곳과 관련 있는 자들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들은 고구려의 적이다. 결코 안에 들여선 안 된다.’
독고선이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 평강 공주를 향해 의견을 내려 할 때, 평강의 고운 음성이 그의 행동보다 빠르게 들려왔다.
“식사도 하셔야 할 터인데, 어찌 방에만 계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같은 손님이니, 편히 머물도록 하십시오.”
평강 공주가 이렇듯 허락하니, 객잔 주인은 그저 감읍해 연신 그녀에게 인사하였고, 점소이 소년은 사내들을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안내를 했다.
독고선은 객잔 안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을 바라보다가 막바우에게 살며시 눈짓을 보냈다.
계단을 올라온 사내들은 창가에 앉은 평강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 후, 소년의 뒤를 따라 복도 끝방으로 들어갔다.
사내들을 안내한 소년이 평강 앞에 서서 제법 의젓하게 말하였다.
“뭔 일 있으면 꼭 저를 부르셔유. 크게 안 부르셔도 다 들을 수 있으니, 염려 마시고 부르셔유.”
평강은 이 조그만 아이가 자신을 염려하는 것이 너무도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래, 그러마. 네가 있어 든든하구나.”
평강 공주의 칭찬에 입이 귀에 걸린 소년이 신이나 아래로 내려가자, 성질 급한 막바우가 우당탕 뛰어 올라왔고, 그 뒤를 경우와 독고선, 독고영이 따라 올라왔다.
“어찌 올라오셨습니까?”
평강이 의아해 묻자 막바우가 나서며 답했다.
“수상한 자들이 위에 있는데, 저희가 밖에 있을 수 있나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이 층엔 우리 온달 장군님도 계시고 여러분들도 근처에 계시지 않습니까?”
평강 공주가 이렇듯 태연히 답하자, 독고선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찌하여 머물게 허락하셨습니까?”
“저들이 내일 만나기로 한 이가 궁금하여 허락했지요. 독고선님께선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도리어 평강이 되묻자, 독고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제가 공주님 곁을 지킬게요!”
오빠 뒤에 서 있던 독고영이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호기롭게 조그만 손을 꽉 쥐고 말하였다.
평강은 독고영이 귀엽고 기특해 웃으며 독고영의 작은 머리를 꼬옥 안아 주었다.
“영아, 나는 방에 들어가 온달님 곁에서 조금 쉴 터이니, 너는 걱정 말고 오라버니께 마저 지도를 받거라.”
모두가 불편하지 않도록 평강은 온달이 홀로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온달과 평강 공주의 방은 복도 가장 앞에 있어 사내들이 머무는 방과 꽤 떨어져 있었고, 특별히 이 방만 세신(洗身)을 할 수 있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평강이 방으로 들어가자, 경우가 머뭇거리는 막바우를 끌고 내려갔고, 독고선도 독고영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도 곤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일 것이다.
평강은 밖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침상에 누운 온달을 다정히 바라보다가 욕조가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고 아직 식지 않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따스한 온기가 전신을 기분 좋게 감싸자 그 포근함에 저절로 눈이 감기는 평강 공주였다.
온수에 피로를 녹이며 찾아온 잠에 몸을 맡기던 그녀의 귀에 복도를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어왔다.
무척이나 조심해 소리를 죽인 발걸음에 일행 중 누군가가 그녀를 염려해 문 앞을 지킨다 생각한 평강은 더욱 안심해 편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질 무렵, 방 밖을 서성이던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더니, 좌측 복도 끝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복도 끝방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 일행이 아니다.’
순간, 평강은 감긴 눈을 억지로 뜨고 화들짝 놀라 벌거벗은 몸 상태로 욕조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고운 나신을 타고 조금 식은 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녀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 사내들이 왜 우리 방 앞을 서성인 것일까? 내가 잠결에 잘못 들은 것 같진 않은데, 기이한 일이다.’
불안한 마음에 급히 깨끗한 천으로 몸을 두른 후 목욕탕을 나온 평강은 방문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숨을 죽여 귀를 기울이니, 방문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복도 끝으로 이동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었고 ‘삐걱’이는 문소리까지 들었건만, 아직도 방문 밖에 인기척이 남아 있었다.
‘복도 끝방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내가 하나 더 있구나.’
소리를 내어 온달을 깨우면 문밖의 사내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올 것 같은 두려움이 일어 평강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급히 목욕탕을 나오느라 옷을 갖춰 입지 못하고 천으로 대충 몸을 감싸고 있음이 무척 신경에 거슬렸고, 자신의 숨소리가 문밖으로 전해질까 그마저도 걱정스러웠다.
살짝 고개 돌려 침상을 바라보니, 온달은 아직도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고, 운철 대검과 철궁은 침상에서 꽤 떨어진 벽에 세워져 있었다.
사내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짧지만 두툼한 박도마저 떠올리자, 평강은 전신의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박도를 빼어 든 사내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면 자신은 급히 몸을 피한다 해도 곤히 자고 있는 온달은 사내의 박도에 목이 베어질 것 같았다.
‘자신들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일부러 내어 안심시킨 후, 한 명이 우리 방 앞에 남은 것이 틀림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평강은 두려움이 더욱 커지고 다리가 덜덜 떨려와 애써 무릎에 힘주고 소리를 죽였다.
‘무엇 때문에 우리 방문 앞을 서성이는 것일까? 역시 이들을 객잔 안에 들이는 것이 실수였을까?’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녀의 귀에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뭐 혀유? 남의 방 앞에 왜 서 있는 거냐구유?”
구수한 남녘 사투리, 점소이 소년이었다.
“누가 남의 방 앞에 서 있었다는 것이냐? 방이 좁아 답답해 바람 쐬러 잠시 나온 것뿐이다. 어린놈이 무례하구나! 고얀 놈.”
점소이 소년의 다그침에 방문 앞을 서성이던 사내가 정색해 도리어 소리쳐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점소이 소년도 만만치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허셔유. 방이 좁아 답답하다믄서 왜 더 좁은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는 거여유? 그걸 누가 믿것슈?”
“이놈아! 서성이긴 누가 서성이었느냐? 생사람 잡겠네. 나는 저기 창이 보이는 탁자에 앉아 있다가 들어가던 길이었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말거라.”
평강 공주도 사내가 문밖을 서성이고 있었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사내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했다.
“지가 다 들었구먼유. 서성이는 소리를 말이유. 아까 전에 뭐라 하셨슈? 방 안에서 절대 안 나온다 하셨지유? 그런데 왜 나오신 거유?”
“시끄럽다. 이놈아! 들어가면 될 것 아니냐.”
점소이 소년이 몰아붙이는 소리에 사내는 끝내 복도 끝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에서 이 소리를 모두 듣고 있던 평강은 그제야 안심해 긴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갔구먼유. 이제 안심하셔유.”
점소이 소년은 평강 공주가 문 앞에 서서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을 용케도 알고 벽을 사이에 두고 나지막이 말해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그런데 넌 내가 여기 서 있는 것을 어찌 안 것이냐?”
“지가 무척 귀가 밝아유. 다 듣고 있었구먼유. 저 아저씨들이 서성이는 소리도, 공주님이 내쉬는 숨소리도. 이젠 안심하셔유. 제가 떨어져 있어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셔유.”
평강은 점소이 소년의 놀라운 청각 능력에 내심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정말 신통한 능력이구나. 그래 너를 믿고 편히 쉴 터이니, 너도 일 보거라. 그리고 지금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너와 나만 아는 비밀로 하자구나.”
“왜유?”
“물증이 없으니 섣불리 경계함은 옳지 않아 그렇다.”
사내들이 왜 방 앞을 서성였는지도 궁금하고, 내일 만나기로 약속된 사람도 궁금해, 평강 공주는 점소이 소년에게 당부한 것이다.
“알것슈. 쉬셔유.”
점소이 소년은 더 묻지 않고 자리를 떴다.
평강이 귀를 기울여 보니, 지금은 문밖에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저들은 중원 상단의 속한 사람들 같으나, 뭔가 석연치 않다. 왜 우리 방 앞을 서성였던 것일까?’
잠시 방문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던 평강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는 침상에 누워 곤히 자는 온달을 내려다보았다.
온달의 상처에 의원이 건넨 약을 더 바르고자 상처에 감은 천을 걷어 내고는 다시 치료를 시작했다.
‘내가 신경이 예민해졌을지도 모르지. 어찌 되었든 나는 우리 장군님과 함께 있으니, 뭐가 두려울 것이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