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36화 (36/328)

036화 만백성의 영웅이 되시옵소서.

‘거북이 이자가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팽무일의 진정성을 신뢰하지 않는 온달이 뒤를 더욱 경계하는 동안, 기세가 올랐던 도적들은 어리둥절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는 모든 공격을 멈추고 그저 팽무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온달 대협, 나는 본래 중원 하북 탁현의 명문세가 팽가장 사람으로 저들과 같은 도적 무리가 아닙니다. 그저 사정이 있어 잠시 이들과 함께한 것이지, 감히 선대의 명성에 누를 끼칠 짓은 하지 않고 살았으니, 오해는 없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허허, 이자가…….”

기도 안 찬 온달이 헛웃음을 흘리며 팽무일의 공갹에 대비했다.

그러나, 팽무일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태도를 공손히 했다.

“오늘의 만남은 깊은 인연이라 생각하며 부디, 좋은 날 좋은 시에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뒤로 차츰 물러서는 팽무일은 어둠에 몸을 가리며 말하더니, 단숨에 몸을 솟구쳐 뻥 뚫린 천장의 구멍으로 몸을 날려 취현당을 빠져나갔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팽무일의 행동에 몸이 언 도적 떼는 그만 망연자실하였다.

온달도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곧 자세를 바로잡고 도적 떼를 향해 우렁차게 일갈을 날렸다.

“모두 꿇어라!”

온달의 벼락같은 호통에 등골이 서늘해진 도적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그만 몸이 밀려 뒤로 한발 물러섰다.

“네 놈들의 두령이 너희를 버리고 도망친 것을 보지 못했느냐? 아직도 저항할 터이냐!”

온달이 왼손을 뻗어 독고영을 자신의 뒤에 숨긴 후, 도적들을 향해 더욱 세차게 호통을 날렸다.

선두에 서서 취현당 안에 들어와 온달과 대적하던 도적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고, 밖에서 에워쌌던 도적들은 급히 몸을 돌려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제 살길 찾아, 바닥에 쓰러진 동료들의 몸을 밟고 도망치기 바쁜 도적들에게 어김없이 경우의 화살이 날아들었고, 해진이 비검술로 날린 검이 도적 떼의 몸을 꿰뚫었다.

양만춘과 독고선은 검을 휘둘러 아직도 취현당 앞에 남은 도적들을 제압하니, 두령을 잃고 내빼려던 도적들은 모두 땅바닥에 철퍼덕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엎드려 비는데, 노인장도 그만 머리를 조아리지 그러시오?”

아직도 전투 도끼를 양손에 단단히 거머쥐고 선 기악과 기범을 바라보며 강이식이 말하였다.

“그대들이 살길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 이외엔 없을 것 같소. 하하하.”

강이식이 껄껄 웃으며 낭아봉으로 땅을 쿵 내리치고는 이미 패색이 역력한 기악과 기범을 조롱했다.

기악이 주위를 둘러보니, 서 있는 자들 중 자신들의 패거리는 오직 곁에선 기범 뿐이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범에게 말했다.

“범아, 여기는 이제 아닌 것 같구나.”

이 말에 기범이 답하기도 전에 기악이 몸을 날려 강이식에게 돌진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것이냐? 용이와 훈이를 데리고 어서 이곳을 떠나거라!”

기범은 그제야 기악의 뜻을 깨닫고 자신도 달려들다가 몸에 힘을 주어 두 손으로 쥔 전투 도끼를 강이식에게 집어 던졌다.

강이식은 기악이 달려드는 것을 대비하다가 갑자기 날아든 기범의 도끼를 낭아봉으로 쳐내고는 한발 물러서 기악의 다음 공격을 피했다.

이 틈에 기범은 기용과 기훈에게 달려가 양쪽 옆구리에 각기 한 명씩 끼고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취현당에서 튀어나와 절벽을 타고 도망친 팽무일을 놓쳤던 경우는 이번엔 결코 기범을 곱게 보내지 않기 위해 활시위를 단단히 당겨 화살을 날렸다.

목책을 향해 달리던 기범이 화살에 등을 맞아 비명을 질렀으나, 피 한 모금 토하고는 그대로 계속 달려 목책과 목책 사이에 난 작은 문을 발로 차 열고 뛰어나갔다.

“아뿔사! 저기에 작은 문이 있었구나!”

경우가 당황해 화살을 날렸으나, 기범은 목책 뒤로 이미 사라진 후였다.

강이식은 기범이 도망친 것을 곁눈질로 보며 낭아봉으로 기악의 전투 도끼를 가볍게 막아 내고는 왼손을 뻗어 기억의 목을 쥐었다.

“동귀어진을 하려던 것이오? 아니면 그저 시간을 벌어주려던 것이오?”

비록 도적 떼의 괴수지만 팽무일과 달리 자신의 몸을 희생해 동생들의 도주를 도운 기악을 낭아봉으로 요절내기 안쓰러워 목숨만은 살려준 것이다.

강이식의 괴력에 목이 잡힌 기악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혼절해 손에 든 도끼를 땅에 떨구었다.

“도망친 놈들은 추후에 잡도록 하고, 어서 이놈들을 정리해 온달 아우와 영이의 신변부터 확보하세.”

강이식이 소리쳐 기범의 뒤를 쫓아 뛰는 양만춘에게 말했다.

그러자 해진과 독고선이 바닥에 엎드린 도적 떼를 헤치고 취현당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양만춘도 몸을 돌려 도적 떼들에게 검을 겨누며 감히 일어나 대적할 생각을 품지 못하게 했다.

잠시 뒤, 온달이 독고영을 왼팔로 품에 안고 취현당을 나왔고, 그 뒤를 독고선과 해진이 따랐다.

평강 공주는 온달의 모습이 보이자, 정신없이 달려와 그를 부둥켜안았고 경우와 막바우도 달려와 온달을 둘러쌌다.

“그나저나, 이 많은 도적 떼를 어찌 끌고 내려가야 할꼬?”

강이식도 온달과 독고영이 무사함에 환히 웃다가 주위에 널브러진 도적 떼의 수를 헤아리며 난감해하였다.

“뭐가 이리도 많냐?”

처치 곤란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주위에 널린 도적 떼를 둘러보며 난감해하는 강이식을 대신하여 양만춘이 나섰다.

“다리가 멀쩡한 놈들은 쓰러진 놈들을 업거라!”

양만춘이 두 다리로 설 수 있는 도적들을 생선마냥 줄줄이 포박지은 후, 바닥에 쓰러진 도적들을 짊어지라 명을 내렸다.

백이십 명이 넘는 도적 떼들을 줄지어 세워 산을 내려가는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 둥실 떠오른 태양을 받으며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길은 올라올 때보다 한결 수월했다.

산채를 뒤져 자신의 말을 되찾은 강이식이 늙은 말 누렁이의 등에 올라탄 온달의 곁으로 말을 몰아 딱 붙더니, 웃으며 온달을 태운 누렁이를 칭찬했다.

“늙었으나, 참 좋은 말일세. 우리 온달 아우 같은 거구를 태우고도 이리도 내리막길을 잘도 내려가는군. 자네의 운철 대검과 철궁뿐만 아니라 이 늙은 말도 보기 드문 좋은 말일세.”

온달은 누렁이가 칭찬을 받은 것이 자신이 칭찬받은 것 마냥 좋아 환히 웃으며 답했다.

“모두가 공주 덕이지요.”

“하하하, 이 모자란 친구 보게. 자넨 뭐든 다 공주 덕이라 하니, 아마도 고구려의 풍년이 들어도 공주 덕이라 할 것 같군. 하하하.”

강이식의 호탕한 웃음이 그저 좋아 온달도 따라 웃으며 말을 몰아 나갔다.

포박한 도적 떼를 일렬로 줄지어 산을 내려가니,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놀라 기겁해 도망치다가 망우산의 도적 떼를 잡아 내려온 것임을 알고 모두가 기뻐 환호성을 지르며 줄지어 뒤를 따랐다.

길을 가면 갈수록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 무척 요란했다.

그리하여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고구려 군사 복장을 한 사내 삼십여 명이 말을 몰고 달려와 이들을 맞았다.

선두에 선 장수가 말에서 뛰어 내리자, 뒤를 따라 군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강이식 앞에 서고는 허리를 숙였다.

“우랑, 네가 여긴 웬일이더냐?”

우랑이라 불린 장수는 서부총관부 소속 장수로 부총관 을지문덕의 부장이었다.

강이식은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의 우랑을 자신의 부장들 못지않게 신뢰하고 있었다.

“필요할 터이니 마중 나가라! 부총관께서 명하셨습니다.”

“필요할 거라? 그래, 부총관이 그러시더냐? 그 사람 참 신통하단 말이야. 헌데, 어찌하여 산에 올라 우리를 돕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 것이더냐?”

“부총관께서 전장에 영웅은 한 명이면 족하다 하시며 공을 나누려 하지 마라 당부하셨습니다.”

“공을 나누지 마라? 하하하, 그래, 옳은 말이야. 아무튼 잘 왔네.”

사로잡은 도적 떼의 수가 많아 손이 필요하던 중에 잘 되었다 생각한 강이식이 껄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우랑도 웃는 낯으로 강이식 곁에 다가서더니 다른 이가 듣지 못하도록 나지막이 말하였다.

“대대로 연태조 합하께서 총관부에 오시어 공주마마를 영접하라 명하셨습니다. 이에 부총관은 곧 태왕 폐하의 행차가 당도할 예정이 오니, 총관께옵서 총관부로 돌아와 영접 준비를 하시라 당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그리고 제게 따로 명하시길 삼짇날(삼월 삼일)이 되려면 아직 시일이 있으니, 공주마마 일행은 총관부로 모시지 말고 불편하시더라도 거처를 따로 마련하신 후 잠시 머무시다가 때에 맞춰 오셨으면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랑의 이야기에 강이식이 대뜸 소리쳐 꾸짖었다.

“연태조 그자가 대대로에서 물러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대대로라 부르는가? 그리고 공주님을 함께 모시고 가야지 따로 거처를 마련해 기다리라니 그것이 될 소린가?”

기껏 소리 죽여 이야기했건만, 강이식이 고래고래 소리치니 우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평강 공주가 온달과 함께 말을 몰아 나오며 강이식을 진정시켰다.

“부총관 을지문덕 공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 총관과 함께 총관부로 저희가 들어갈 경우, 오부의 귀족은 물론이요. 태왕 폐하를 뵈어야 하는데, 아직은 시기상조이오니 삼짇날 낙랑 사냥 대회에서 뵙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음…….”

“그리고 연태조 그분께옵선 또다시 대대로의 자리에 오를 분이 오니 너무 야단치지 마시옵소서.”

평강의 부드러운 말에 진정이 된 강이식이 생각해 보니, 아직 온달을 태왕이 부마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라 만남이 서로 불편할 것이 당연하였다.

“아하! 그 교활한 연태조, 그 사람이 서로 불편하게 만들어 웃음거리가 되도록 총관부로 모시라 한 것이구먼. 참 성격 특이한 인물일세. 특이해!”

강이식이 이제야 납득한 표정이 되자 우랑이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앞 객잔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객잔 주인에게도 제가 따로 당부했기에, 사냥 대회에 불편함 없이 오실 수 있으실 것이 옵니다.”

평강과 온달 일행은 모두 우랑이 이야기한 대로 객잔에서 머물며 낙랑 사냥 대회에 가기로 정했다.

또한 강이식은 우랑과 함께 도적 떼를 압송해 총관부로 향했다.

“온달 아우! 삼짇날 보세! 고구려의 행세 꽤나 하는 귀족들이 모두 올 터이니 멋지게 준비하고 오시게!”

강이식은 길을 떠나며 몇 번이나 온달과 헤어짐이 아쉬워 소리쳤고, 온달은 그런 그가 고마워 그저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도적 떼를 압송하는 행렬 선두에 선 강이식은 군사들에게 지시해 일제히 소리쳐 행군하라 명했다.

“온달이 망우산의 도적 떼 백 명을 홀로 대적해 소탕했다!”

그때, 이 소리를 들은 온달이 쑥스러워 홀로 중얼거렸다.

“내가 한 일이 아니고 모두가 서로 도와 한 일인데…….”

그러나 강이식이 손을 휘저어 그의 말을 끊고는 계속 외치게 하며 행군을 시켰다.

“요동성에 먼저 도착한 오부의 귀족들이 놀라 오줌을 지릴 정도로 외치거라!’

멀어져 가는 강이식의 행렬을 멍하니 바라보는 온달에게 양만춘이 다가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영웅은 한 명이어야 빛이 나는 법이지요. 온달님은 영웅이 되셔야 하옵니다. 보십시오! 다들 좋아하지 않습니까?”

양만춘이 멀리 행렬의 뒤를 따르며 신이 나 군사들과 함께 외치는 백성들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하자, 해진도 곁에 다가와 거들었다.

“부디, 귀족들의 영웅이 되시기보다, 만백성의 영웅으로 태왕의 힘이 되시옵소서. 지금 고구려에선 오직 온달님만이 그런 인물이 되실 수 있사옵니다.”

온달은 자신을 향한 모두의 기대가 너무도 커, 자신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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