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온달 홀로 백 명을 대적하다 (5)
도적 떼의 화공을 염려하던 온달의 생각대로 아니나 다를까?
기 씨 사 형제 중 막내 기훈이 부하들에게 소리쳐 명령을 내렸다.
“당장 기름통을 대령하거라!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
기훈이 일부러 소리쳐 온달도 잘 듣도록 한 통에, 온달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적 서넛이 기훈의 명을 받아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온달은 서둘러 나가지 못함을 후회했다.
취현당을 향하던 삼진의 도적 무리는 기훈이 화공을 준비하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머뭇거렸다.
그때, 가장 뒤에 자리한 도적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성난 기범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너희는 무엇을 머뭇거리느냐! 어서 들어가 놈을 잡아 오너라!”
기범의 손에 들린 양날 전투 도끼에서 살점과 피가 뚝뚝 땅으로 떨어져 흘렀고, 그 아래 머리가 으깨져 박살 난 도적이 쓰러져 땅을 온통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삼진의 도적들은 취현당에 들어가지 않으면 기범의 도끼에 목숨을 잃는다 생각하여 미친 듯이 취현당을 향해 달려 나갔다.
온달도 기범이 자신의 부하를 도끼로 내리쳐 죽이는 이 광경에 경악해 급히 문 앞을 지켰다.
도적들이 칼을 휘두르며 문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이었다.
온달이 휘두른 운철 대검이 어둠 속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선두의 도적 어깨를 후려쳐 땅에 쓰러뜨리고는 발로 걷어차 멀리 날려 버렸다.
취현당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도적들은 이 찰나의 순간 동안, 어둠에서 나온 온달의 운철 대검과 온달의 발동작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저기다!”
목표를 확인한 도적들이 한 방향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온달도 더 이상 어둠에 의존해 안으로 피할 수 없어 운철 대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와 맞섰다.
그가 운철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도적들이 막기 위해 내민 무기들은 온달의 신력과 백이십 근이 넘는 운철 대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박살나거나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온달은 어둠에 의지해 기습할 때에 비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것이 차츰 익숙해졌다.
금세 삼진의 도적 무리를 제압하고 바닥에 쓰러진 자들을 집어 던져 앞을 깨끗이 정리한 후 또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밖을 살폈다.
멀리 기름통을 메고 오는 도적들의 모습이 온달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젠 별수 없구나.’
온달이 어두운 취현당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긴 것과 때를 같이 하여 기 씨 사 형제의 막내 기훈이 큰형 기악에게 꾀를 내어 말했다.
“큰형님, 아무래도 놈이 어두운 취현당 안에서 버티면 우리 애들이 한 번에 진입할 숫자가 뻔하여 들어가자마자 놈에게 번번이 공격받아 피해가 커질 것 같습니다.”
막내 기훈이 눈을 빛내며 말을 걸어오자, 기악이 웃으며 물었다.
기훈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배다른 동생이지만, 형제들은 기훈을 다른 어미에서 태어났다 하여 차별하지 않고 의가 좋았다.
또한 특히 기악은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기훈을 아들처럼 무척 아꼈다.
“그래, 좋은 수가 있느냐?”
“굴속 곰을 끌어내듯이 불로 놈을 끌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불이라… 취현당에 불을 지르겠단 말이냐?”
“그렇지요. 큰형님.”
취현당에 불을 질러 온달을 끌어내자는 기훈의 제안에 기범과 기룡은 크게 동해 소리 높여 말했다.
“역시, 우리 막내가 똑소리 나는군.”
“그렇죠? 기범 형님 말씀대로 기훈이는 우리 형제 중 역시 으뜸입니다.”
기훈의 영악한 제안에 모두가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기악은 십여 장 정도 떨어져 이곳의 대화를 즐기는 팽무일을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곁눈질로 흘깃 살피고는 부드러이 동생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니 되느니라.”
표정은 부드러우나 기악의 답은 단호했다.
성질 급한 기범이 대뜸 기악에게 되물었다.
“안 된다고요? 어찌 안 되신다 하십니까?”
“불을 지르면 온달이 불을 피해 나오기야 하겠으나, 만약 금강대도를 안에 두고 나온다면 어쩔 셈이냐?”
“…….”
“지금은 우리가 취현당 문 앞에 서 있고 취현당의 벽이 두꺼워 저 팽무일이 금강대도를 찾으러 들어가지 못하지만, 벽이 불에 타 무너지면 경공술이 뛰어난 팽무일이 득달같이 안에 뛰어들어 금강대도를 찾을 것이다.”
“아…….”
“우리는 불을 피해 뛰어나온 온달을 상대하며 금강대도를 찾아야 하니, 팽무일보다 결코 유리하지 않다. 그렇기에 안 된다. 아마도 팽무일 저자는 우리가 불을 질러 온달을 끌어내기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하자, 기범을 비롯한 기룡과 기훈 등은 기악의 신중함에 탄복했다.
“큰형님, 그러면 저와 기훈이 안에 들어가 온달을 잡아내 오는 것은 어떨는지요?”
형제 중 가장 머리가 아둔한 기룡이 전투 도끼를 들어 올리며 의견을 건넸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악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 역시도 안 되느니라.”
기악이 이 제안도 승낙하지 않자, 기범이 바로 되물었다.
“형님, 어찌해서 안 된단 말이오?”
“기범아, 너는 저 어두운 취현당에 온달 대신 네가 들어가 있다 생각하고 우리 부하들 십여 명이 일시에 너를 잡으러 들어오면 그들을 얼마나 빨리 제압할 수 있느냐? 온달만큼 빨리 제압할 수 있겠느냐?”
기악이 물음에 대한 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건네자, 기범이 당황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글쎄요. 쉽지 않겠는데요. 제 도끼가 무거워 느리니, 처음 한두 놈은 때려잡아도, 뒤에 몇 놈 중 피해 도망치는 놈도 있을 거고… 시간 좀 걸릴 듯…….”
“그렇겠지? 그래, 쉽지 않을 것이야.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걸 온달이 하고 있구나. 놈의 무예가 우리보다 몇 수 위라는 이야기지.”
“네?”
기악의 말에 기범이 놀라며 되물었다.
“그러니 놈이 자리 잡고 있는 저 안에 우리 사 형제는 결코 들어가선 안 되느니라. 놈이 나오게 하여 우리 형제 넷이 상대해야지. 그러나 놈이 나와도 우리는 먼저 놈을 상대해선 안 된다.”
온달을 끌어내도 대적하지 않는단 이야기에 영리한 기훈은 고개를 끄덕여 이해하였음을 표했으나, 기범과 기룡은 여전히 놀라 물었다.
“상대하지 않는다 하셨습니까?”
“그래, 우리는 상대하지 않는다. 우리 부하들이 상대해야지.”
기악의 손짓에 사진의 도적 떼 십여 명이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취현당을 향해 걷는 모습을 보며 기범이 다시 물었다.
“피해가 클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우리가 상하는 것이 아니니, 괜찮다. 우리는 힘을 아껴 저 팽무일을 상대해야 하느니라. 팽무일 저자가 지금 우리와 거리를 둔 것 자체가, 우리가 자신을 해칠 것을 이미 알고 우릴 믿지 않는단 이야기지.”
“그렇군요.”
“우린 오늘 저자가 금강대도를 지녔든 지니지 않았든 어쩔 수 없이 싸울 수밖에 없단다.”
기악의 말에 이어 기훈이 자신의 생각을 더해 기범과 기룡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하였던 것들이 지금은 저 거북이 녀석에게 충성을 더 바치는 형편입니다. 우리가 팽무일 저자와 대적할 때 부하들이 우릴 배신해 팽무일을 도와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 부하들의 수를 갈아서라도 온달을 잡아 끌어내고, 이후에는 팽무일을 우리가 대적함이 옳습니다.”
“그렇지.”
“아랫것들이라 해도 어차피 한 번 배신한 것들은 또다시 배신하기 마련이니, 아쉬울 것 없지요. 또한 온달이 제아무리 신력이 뛰어나다 해도 우리 부하들 백여 명을 상대하다 보면 분명 지치고 몸이 상할 터이니, 계속 밀어붙이면 놈도 밀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큰형님의 혜안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은 기훈이 기특한 기악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이들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사진의 도적 무리 십여 명의 발걸음은 점점 취현당과 가까워져만 갔다.
앞서 진입했던 동료들이 삽시간에 제압되어 취현당 밖으로 퉁겨 날아온 것을 본 뒤였기에, 이들의 표정은 두려움에 어두웠고 행동은 무척 굼떴다.
취현당 밖을 내다보던 온달의 시야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도적 무리 십여 명과 그 뒤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도적 떼가 들어왔다.
‘이 안에서 버티기만 한다면 놈들은 반드시 불을 질러 우릴 끌어낼 것이야. 그때는 영이를 돌보기 어려워진다.’
생각을 정리한 온달은 뒤를 돌아 낮은 목소리로 독고영에게 조곤조곤 말하였다.
“영아, 나는 밖에 나가 놈들을 막아야겠구나. 너는 절대로 이 안에서 나오지 말거라. 곧 공주님께서 오실 것이야. 알겠지?”
온달의 부드러운 물음에 독고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온달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놈들이 안으로 들어오거든 그 칼을 내어주거라. 그러면 너를 굳이 해치지 않을 것이야. 지키려 하지 말거라. 네 목숨보다 귀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단다.”
독고영이 두 손으로 꽉 쥔 금강대도를 가리키며 온달이 말하였다.
온달의 말에 독고영은 “온달 님의 목숨은요?”란 물음을 삼키며 눈물 가득 담은 눈으로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온달은 독고영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는 몸을 돌려 문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등에 멘 철궁을 들어 효시를 먹여 힘껏 당겼다.
온달의 철궁에서 효시가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매의 울음과 함께 도적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거센 바람과 함께 매의 울음이 어둠 속에서부터 덮쳐 오자, 취현당과 대여섯 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이대로 들어가야 하나 생각하며 머뭇거리던 도적 무리의 어두웠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피할 겨를도 없이 중앙에 선 도적이 온달이 쏜 화살이 가슴에 박힘과 동시에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뒤로 곧게 날아갔다.
기범이 갑작스레 날아오는 부하의 몸뚱이에 전투 도끼를 가로로 휘둘러 멀리 쳐내 버리고는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가 취현당 안에서 나오는 온달을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와 취현당 문 앞에 선 온달은 도적 떼 우측 한쪽에 놓인 기름통에 잠시 시선을 두더니, 자신을 향해 일제히 달려드는 도적 떼들과 운철 대검을 맞대고 겨루기 시작했다.
온달이 제 발로 취현당 밖으로 나와 운철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기악은 손을 높이 들어 뒤에 선 부하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놈이 밖으로 나왔다. 어둠에 숨을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달려들어 온달의 목을 베거라!”
기악의 명령에 도적 떼 백여 명이 기세가 올라 고함을 지르며 일시에 온달을 향해 달려들었다.
온달은 그들이 내는 고함 소리에 귀가 먹먹해짐을 느끼면서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앞을 막아선 사진의 도적 무리부터 하나하나 제압해 나갔다.
“오냐, 오거라! 한 놈 한 놈 달려들지 않고 떼를 지어 오니, 오히려 좋다! 한 번에 다 쓸어버려 주마. 오거라!”
온달의 우렁찬 외침이 차가운 밤공기를 달아오르게 하며 거대한 파도가 되어 도적 무리를 덮쳤다.
온달의 기개에 달려들던 도적 떼들의 발이 순간 멈칫했으나, 이내 곧 자신들의 숫자를 믿고 더욱 사납게 온달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덤비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