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온달 홀로 백 명을 대적하다 (2)
산채로 들어온 팽무일은 독고영의 손을 잡아끌고 산채 끝에 높이 솟은 절벽과 맞닿은 곳에 자리한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게 [취현당]이란 현판이 멋들어지게 걸려 있었다.
함께 산채를 나선 부하들은 온데간데없고, 어디서 대여섯 살 정도 된 어린 여자애 손을 강제로 질질 끌며 돌아온 두령을 불안한 눈빛으로 살피며 네 명의 사내들이 뒤를 따랐다.
떠날 때와 달리 온몸에 핏자국이 얼룩진 팽무일의 행색으로 보아, 치열한 싸움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으나, 아무도 감히 직접 묻지 못했다.
취현당에 오르기 전, 팽무일의 귀에 날카로운 매의 울음이 들려왔다.
‘매가 이런 깊은 밤에 날 리가 없는데…….’
밤의 적막을 깨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걸음을 멈춘 팽무일이 뒤를 돌아 뒤따라온 사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거라!”
“명을 받습니다.”
팽무일의 명령에 그저 허리 숙여 인사 올리고 돌아서는 사내들의 입에서는 긴장이 풀려 저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뭔 일 생긴 모양이네.”
네 명의 사내 중 긴 수염을 기른 중늙은이가 말하자, 호랑이 수염을 기른 체격이 큰 사내가 받아 답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형님.”
이들의 좌측에는 서른 초반쯤 되어 보이는 키가 크고 깡마른 사내가 따랐는데 그의 민둥머리는 횃불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우측에는 이십 대 중반의 준수한 외모의 사내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기(奇) 씨 사 형제로 은(殷)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넘어온 기자(箕子)를 선계조로 모시며, 백제 온조왕 밑에서 시중을 지낸, 기우성의 후손들이었다.
하지만 증조부 때부터 백제 땅에서 세력을 잃어 요동에 숨어 살다가 이들 사 형제 대에선 산적 노릇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삼한 어디에서도 자신들이 관직에 나갈 길이 없음을 잘 알고, 학문보다 무예 수련에 집중해 어느 정도 경지에는 올랐었다.
그러나 심성이 바르지 못해 갈고 닦은 무예를 기반으로 도적질만 일삼다가 이곳 망우산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지난해 겨울, 팽무일에게 패해 산채 주인의 자리마저 빼앗겼다.
이들은 겉으로는 팽무일에게 충성을 다하는 행동을 보이지만, 속은 언젠가 팽무일을 내쫓고 도적 떼 두목 노릇할 궁리뿐이었다.
긴 수염의 중늙은이는 기악, 호랑이 수염의 사내는 기범, 키가 큰 민머리 사내는 기룡.
그리고 준수한 외모의 사내는 기훈으로 이들은 모두 가전비기인 큰 도끼를 잘 사용했는데, 팽무일이 지닌 금강대도만 아니라면 능히 팽무일을 누를 수 있을 정도의 재주는 지니고 있었다.
“저 거북이가 우리 부하들을 이끌고 나가 어디서 몰살당하고 혼자만 도망쳐 온 듯합니다.”
넷째 기훈이 조심스레 말하자, 셋째 기룡이 씩씩거리며 말을 받았다.
“저놈도 함께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나저나 이 매 울음소리는 기이합니다. 혹시, 저 거북이를 따라 강적이 온 것 아닐까요?”
여전히 길게 울리는 매 울음소리에 불안한 기색이었다.
“팽무일 저자가 아둔해 보여도 눈치가 여간 아니다. 그러니 다들 입조심하거라. 셋째와 막내는 우리 도끼를 가져오고 다들 깨워 데려오너라. 둘째는 나와 함께 일단, 가 보자.”
기악이 산채의 전 주인답게 지시를 내리고 위엄 있게 걸음을 옮겼다.
비록 무엇이든 단숨에 가르는 팽무일의 금강대도에 눌려 산채 주인 자리를 넘겼지만, 여전히 망우산 도적 떼들은 그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취현당 안으로 들어간 팽무일은 안에서 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독고영과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고작 다섯 살 독고영보다 한 뼘 정도밖에 키가 차이 나지 않아, 팽무일은 선 채로 독고영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넌, 누군데 고구려 공주가 너를 지키려 한 것이더냐?”
“저와 오빠는 고약 파는 장사꾼이에요.”
어린 독고영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박또박 잘도 대답했다.
“고약 장수? 고작 고약이나 파는 너 같은 아이를 고구려 공주가 그토록 애달프게 지킬 이유가 없지 않느냐? 네 오빠는 아까 고갯마루에서 누구더냐?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너를 혼낼 것이다.”
팽무일은 평강 공주가 독고영을 지키려던 모습을 기억하며, 이런 하찮은 아이를 그녀가 그토록 지키려 한 것에 다른 이유가 있다 생각해 다시 엄히 물었다.
사실 그의 생각과 달리 평강이 어린 독고영을 지키려 함은 그저 어린아이기에 지키려 한 것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독고영도 다른 이유를 묻는 팽무일에게 달리 답할 것이 없었고 그저 오빠가 누군지만 말할 수 있었다.
“봉을 든 사람이 오빠예요.”
“봉을 든?”
팽무일은 자신을 향해 봉을 들고 덤빈 독고선을 떠올리며 그의 날랜 경공술과 무예가 고작 고약 장수 따위가 펼칠 재간이 아니라 생각했다.
“네 오빠의 무예가 여간 아니던데. 너희 남매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영이고 오빠는 선이에요. 우리 성은 독고예요.”
“무엇이라? 독고?”
독고영이 성을 말하자, 팽무일은 즉시 떠오르는 이가 있어 놀라 재차 물었다.
“네, 우리 성은 독고예요.”
“독고 씨라… 독고…….”
팽무일은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공주가 이 아이를 지키려 한 것이 독고 씨라 그러한 것일까? 분명 그럴 것이야! 독고 씨이기에 지키려 한 것이야!’
평생 남에게 좋은 일을 해 본 적 없는 팽무일인지라, 타인도 자신과 같아 이유 없이 선행을 행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그의 생각은 점점 엉뚱한 곳으로 흘러만 갔다.
‘지금 세상은 독고 씨 천하다. 비록 양 씨가 황제라 해도 결코 독고 씨보다 그 세가 높다 할 수 없다. 반드시 이 아이는 황제의 장인 독고신(獨孤信)과 관계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공주의 행동은 설명되지 않는다.’
팽무일의 머릿속은 온통 황제의 장인 독고신.
이 세 글자로 가득했고, 차츰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독고신은 북주 황제의 장인이며, 수나라 첫 황제의 장인이고 훗날 당나라 첫 황제의 외조부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전무후무한 세 제국 초대 황제들의 장인이며 외조부인 독고신이야말로 국장으로 불려도 손색없을 인물이었다.
독고신은 선비족의 한 갈래인 우문선비(宇文鮮卑) 씨족의 우문태를 도와 서위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여섯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두었다.
그중 맏딸 독고반야는 북주의 첫 번째 황제인 우문육(명제)의 황후인 주명경후이며, 일곱 번째 딸은 수나라 황제 양견(楊堅, 문제)의 문헌황후였다.
또한 넷째 딸은 훗날 당 고조 이연(李淵)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여, 당 고조 이연의 어머니이며, 당 태종 이세민의 할머니인 원정황후가 된다.
세상에 둘도 없을 이 불세출의 인물 독고신은 불행히도 우문 씨들의 견제를 못 견뎌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한 지 오래였으나.
그가 떠난 세상을 그의 일곱 번째 딸 독고 황후가 수나라 황제 양견과 함께 공동 통치하고 있었다.
독고 황후는 공동 통치란 말 그대로 세상을 아래에 둔 수나라 황제 양견조차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여인으로 양견이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칼을 들고 달려들어 황제가 몸을 피하기 일쑤였다.
이는 곧 독고 황후의 세가 황제 양견 못지않음을 뜻해 수나라의 모든 신료들도 그녀를 황제 양견보다 더 두려워하며 따랐다.
양견은 서위의 열두 대 장군 중 한 사람인 수국공(隋國公) 양충(楊忠)의 아들로, 양충은 독고신 휘하의 장수였다.
어려서부터 양견을 지켜보던 독고신은 양견의 장래가 밝다 생각해 자신의 일곱째 딸 독고가라를 시집보냈다.
이후 독고가라는 양견의 정치적 동반자며 지지기반이 되어 양견이 우문선비의 북주를 취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양견이 북주의 황제를 양위 받은 후 수로 국호를 변경 후 중국을 통일했으나, 수나라의 지배층은 이전처럼 한족이 아닌 여전히 선비족들이었다.
이렇듯 북주와 수, 당은 모두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면서도 한족 문화에 많이 동화되어 이전 선비족들이 세운 나라들과 달리 국호에 ‘연’이 들어가지 않았다.
수의 황제 양견과 독고 황후에게 내몰린 북주의 후예 우문 씨들은 북으로 피했고.
수의 황제 양견이 임명한 대돌궐 정벌 총사령관 공손성에게 패해 동과 서로 내몰린 돌궐과 세력을 합쳐 또다시 새로운 북주 건설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북주는 아직 힘이 미약해 감히 수나라와 대적할 수 없기에, 요동의 고구려를 침략해 삼한 땅에 선비족 왕국 건설을 꾀하는 중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쫓겨나 중원을 떠돌았던 팽무일은 이런 국제 정세를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독고 성을 사용하는 남매가 분명 독고신 일족과 관련 있다고 짧은 지식을 바탕으로 성급히 단정 지었다.
‘이들 남매는 우문선비가 돌궐과 힘을 합쳐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북주를 견제하고자 고구려 왕실과 수나라 황실, 즉 독고 황후와 연결된 고리가 분명하다! 고구려 공주 따위를 납치한 것보다 성과가 크구나! 이 아이를 잘만 이용하면 내게 큰 기회가 주어질 것이야!’
이렇듯 팽무일이 혼자만의 상상을 펼치며 흐믓해 하는 동안, 온달은 망우산 도적 떼의 산채를 향해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넌 누구냐? 거기 서거라!”
목책 위에 선 사내가 횃불을 들고 온달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횃불을 든 사내와 달리 온달은 횃불 대신 운철 대검을 들었기에 어둠이 그를 덮어 목책 위 도적들은 온달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온달은 횃불이 점점 늘어나는 목책을 둘러보더니, 낮게 혼자 중얼거렸다.
“목책은 높고 문은 단단해 들어가기가 쉽진 않겠구나.”
이 말과 함께 잠시 서서 망설이다가 풀숲 위에 운철 대검을 꽂고는 바로 곁에 놓인 바위를 끌어안았다.
온달의 가슴까지 올라오는 바위는 둘레 역시 두터워 온달이 양팔을 벌려도 반밖에 끌어안지 못했다.
“저거 뭐 하는 거지?”
온달에게 질문을 건넸던 사내가 어둠 속에서 온달이 바위를 끌어안는 모습에 의아해하며 옆 사내에게 물었다.
이들 두 사내를 비롯한 목책 위 모든 도적 떼들은 어두워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어렴풋이 바위를 끌어안는 온달의 행동을 지켜보며 궁금해 했다.
“영차!”
온달의 입에서 큰 기합 소리가 나더니, 우드둑 소리가 나며 커다란 바위가 풀숲에서 들썩거렸다.
온달은 바위를 끌어안은 두 팔에 더욱 힘주어 단단히 붙잡고 풀숲을 디딘 두 다리로 땅을 밀듯 일어서 바위를 힘껏 뽑아 올렸다.
“뭐야? 저놈이 바위를 왜 뽑아?”
땅에서 뽑힌 바위에 경악한 도적 떼들이 웅성거렸다.
온달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기합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바위가 온달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저거, 혹시?”
그제야 온달의 의도를 어렴풋이 깨달은 도적 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모두 피해! 저놈이 바위를 던진다!”
“말도, 안 돼.”
“괴물이다! 피해라!”
도적 떼들의 아우성 소리 위로 마침내 온달이 집어 올려 내던진 거대한 바위가 날아들었다.
귀청을 찢는 콰광 소리가 목책이 바위에 깔려 박살나고 있음을 알렸다.
박살 난 목책 사이로 나무 조각과 흙먼지, 횃불이 날아가 불꽃이 휘날리는 그 속을 뚫고 거대한 운철 대검을 어깨에 들어 올려 멘 온달이 들어오고 있었다.
“막아라!”
“기악 두령님께 알리고 저놈을 막아라!”
경비 서던 도적 떼들 중 겨우 정신 차린 이들이 소리 지르며 온달을 향해 달려들었다.
온달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도적 떼의 수가 십여 명이 넘음에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운철 대검을 두 손으로 단단히 쥐고 도적 떼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