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9화 (29/328)

029화 온달 홀로 백 명을 대적하다 (1)

“영아!”

평강은 달리던 발을 멈추고 비탈길 아래, 숲의 어둠 속으로 팽무일의 손에 이끌려 사라지는 독고영을 다급히 불렀다.

독고영의 크고 동그란 눈이 겁에 질려 평강 공주를 애절히 바라보다가 어둠에 가리어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모습에 평강은 정신없이 비탈길로 뛰어 내려가며 독고영을 계속 애타게 불렀다.

“영아! 영아! 영이를 두고 가라!”

“안 되시옵니다. 저희가 가겠습니다.”

평강 공주마저 팽무일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운 경우가 달려와 그녀의 소매를 잡고 붙들었다,

이때, 평강과 경우의 눈에 온달의 커다란 등이 보이더니, 팽무일이 독고영을 끌고 사라진 숲의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들어왔다.

온달, 그가 팽무일에게 납치된 독고영을 구하기 위해 뒤를 쫓은 것이다.

팽무일의 발에 채여 멀리 나뒹굴었던 막바우도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고개를 여기저기 둘러보고는 온달이 뛰어든 숲의 어둠 속을 향해 곧장 내달리려 했다.

“막바우! 자네 기다리시게! 같이 가세!”

막바우는 경우의 외침에 멈칫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그녀의 곁에 강이식을 비롯한 일행이 고갯마루를 올라와 팽무일과 독고영이 사라진 숲을 향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밤이 깊었기에 여기서 뿔뿔이 흩어지면 위험하네. 모두 함께 이동하세.”

강이식이 막바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영이의 손을 놓쳐 흉악한 놈에게 끌려가게 했습니다.”

평강 공주가 독고선에게 용서를 구하자, 독고선이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평강에게 부드러이 답하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공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날이 무척 어두우니 숲 안에선 항상 조심하시옵소서.”

스무 살 차이나 나는 어린 동생 독고영은 독고선에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면서 딸 같은 동생이었다.

그런 귀한 동생이 망우산 도적 떼의 두령 팽무일에게 납치당했으니, 애타는 마음은 표현할 길 없었다.

하지만 결코 평강 공주의 잘못도 아니었고 오히려 곁에서 지키지 못한 오라비 탓이라 생각하며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팽무일을 쫓아간 온달님께선 괜찮으실까요?”

양만춘이 강이식과 보폭을 맞추어 걸으며 물었다.

“글쎄, 이 어둠 때문에 걱정이네.”

숲 안으로 들어오니 높이 솟은 나무들 탓에 달빛조차 가려 사위가 더욱 어두워 강이식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팽무일과 대적하시던 모습만으로 생각할 땐, 결코 온달님께선 팽무일 따위에게 쉽사리 당하시지 않으시리라 생각하오나, 놈의 수하들이 아직 산채에 남아 있을 터인데 그것이 걱정입니다.”

경우가 뒤따라오며 평강 공주와 독고선이 듣지 못하게 나지막이 말했다.

막상 숲 안에 들어와 보니, 어디에도 온달과 팽무일이 달려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꽤 멀리 달려간 모양이다.

열심히 땅과 주변 나뭇가지를 살피며 흔적을 찾던 막바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경우를 돌아보았다.

“어느 방향으로 달려갔는지 흔적도 없네. 어쩌면 좋지?”

영리한 경우도 답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고개에 쓰러진 도적 떼 무리 중에서 말할 수 있는 놈을 찾아 놈들의 산채 위치를 캐낸 후, 그곳으로 바로 가십시다.”

동생을 잃은 절박한 심정에서도 독고선이 조급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차분히 의견을 내었다.

“그래, 그것이 좋겠소! 나와 막바우가 고개로 돌아가 말할 수 있는 놈을 찾아 이리로 데리고 올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우가 독고선의 의견을 받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 * *

온달은 평강 공주를 납치하려던 팽무일이 독고영을 대신 납치해 숲으로 뛰어들자, 자신도 곧바로 숲에 뛰어든 후, 줄곧 쉬지 않고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멀리 팽무일의 뒷모습이 보였다.

빽빽이 늘어선 나무 사이로 내린 희미한 달빛을 받아 금강대도가 빛나고 있어, 오직 그 반짝이는 모습만 놓치지 않겠단 생각을 하며 무작정 달릴 뿐이었다.

‘나도 산길 꽤 타는데 도저히 따라잡기 어렵구나. 저 거북이 같은 모습의 사내가 짧은 다리로 어찌 저리도 잘 달린단 말이냐? 저것이 바로 독고선 그가 말한 중원의 경공술이란 것인가?’

온달이 이런 생각을 함은 무리가 아닌 것이, 팽무일은 뚱뚱한 상체를 짧은 다리로 지탱하면서도 작은 바위를 훌쩍 뛰어넘음은 물론, 앞을 가로막는 나무도 밑동을 밟고 몸을 솟구쳐 오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팽무일은 기둥을 발로 차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나아가는 등 여태껏 온달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묘한 재주를 부리며 나무 사이를 날듯이 달리고 있었다.

팽무일처럼 경공을 펼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온달은 두 다리를 쉬지 않고 놀려 부지런히 뒤를 쫓았다.

타고난 체력에 그동안 무거운 운철 대검을 들고 산과 들에서 수련한 덕에 신체 능력이 더욱 향상된 것이다.

덕분에 거리는 좁히지 못해도 팽무일을 시야에서 놓치지는 않을 수 있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고갯마루와 거리가 멀어졌다.

산에서 자란 온달은 이 밤에 고갯마루의 일행들이 팽무일에게 납치당해 끌려가는 독고영과 그 뒤를 쫓는 자신의 흔적을 찾지 못할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추적에 도움을 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작정 팽무일의 뒤만 쫓아 달리는 이유는 겨우겨우 거리를 유지하느라 흔적을 남길 경황도 없지만,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궁의 효시가 방향을 알려 줄 수 있다. 지금은 저놈을 놓치지 않고 저 거북이 놈의 목적지인 산채까지 따라가는 것에 집중하자.’

독고영을 납치해 쉬지 않고 내달리는 팽무일의 목적지가 망우산 도적 떼가 세운 산채일 것이란 온달의 짐작은 정확했다.

단 한 차례도 멈춰 쉬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바위와 나무를 거침없이 타 넘으면서 독고영을 품에 안고도 팽무일은 결코 흔들림 없이 한 곳을 향해 달리기만 했다.

‘오늘 내가 일진이 사나워 고갯마루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했구나. 일단 산채로 돌아가 저놈들을 다시 칠지, 짐을 꾸려 이곳을 뜰지 결정해야 한다. 고구려 공주 일행을 공격했으니, 이대로 저들을 놔두면 분명 대군이 몰려올 것이다.’

팽무일은 자신의 산채로 달리면서도,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을 했다.

한시가 급해 빨리 결정해야만 했다.

‘지금 내 품에 있는 이 아이가 공주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일지 모르나, 옷을 입은 행색으로 봐선, 결코 신분이 귀하진 않을 것 같다. 한시라도 빨리 산채로 가서 놈들을 다시 칠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을지 결정하자.’

팽무일은 어둠에 가려 온달이 뒤쫓는지도 모른 채,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산양이 바위를 껑충껑충 뛰어오르듯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돌아가지 않고 가볍게 뛰어넘으며 달려 나갔다.

온달이 팽무일을 쫓아 숲을 곧장 가로질러 두 식경쯤 달리자, 작은 고개를 하나 넘고 나온 조금 낮은 두 번째 고개 정상에서 불빛이 빛나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놈들의 산채가 저기구나. 이 산은 높진 않으나 생각보다 상당히 넓다. 망우산 고개에서 이 정도로 떨어져 있으면 관군들도 쉽사리 도적 떼의 산채를 찾긴 어려울 것이야.’

온달은 생각을 이어 나갔다.

‘누구나 고개 주변에 산채가 당연히 있을 거로 생각하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산채가 있으리란 생각은 못 할 것이다. 놈을 만약 놓쳤다면 결코 쉽사리 독고영을 되찾지 못했을 것이야. 참으로 다행이다.’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찼음에도 온달은 지친 다리를 쉬지 않고 놀려 팽무일의 뒤를 쫓았다.

팽무일 역시 산채의 불빛이 보이자 더욱 힘을 내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팽무일은 하북 탁현의 명문세가 팽 씨 일족의 장남으로 서열상 장주가 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전비기인 팽가도법 수련을 게을리하고 도박과 여색을 탐해 부친에게 쫓겨나 중원을 떠도는 신세였다.

지난해 겨울 장주인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차남인 동생 팽무성이 신임 장주가 되었단 소식을 접한 팽무일은 팽가장의 장주가 되고 싶은 욕심은 가득했으나, 본인의 재주로는 동생 팽무성을 당해낼 수 없음을 알기에 함부로 속내를 드러내진 못했다.

비록 쫓겨난 신세지만, 부친의 상례에 참여하기 위해 팽가장으로 잠시 돌아 온 것이라 팽무성을 속이고 모두가 조문객 접대에 바쁜 틈을 타 장주의 신물인 금강대도를 훔쳐 멀리 이곳까지 숨어든 것이었다.

팽가장에서 축출된 인물이지만, 그래도 어릴 적 잠시 익혔던 팽가도법과 경공 수련의 깊이가 낮진 않아, 두 식경을 쉬지 않고 산길을 달렸음에도 지치지 않고 더욱 빨리 속도를 내 산채를 향해 고개를 뛰어오를 수 있었다.

‘금강대도를 익숙히 다룰 때까지 이곳에 숨어 있으려 했건만, 저놈들이 산통을 깼구나. 이곳을 떠나 팽가장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면 동생 무성이는 고사하고 그 밑에 수하들도 내 실력으로 상대하기 어려울 것인데 큰일이다. 이곳을 떠나도 당장 중원으론 못 갈 터인데 어디로 가야 할까?’

팽가장은 뛰어난 용력을 바탕으로 한 외공 기반의 도법이 유명했다.

팽무일은 고통스런 외공 수련에 질려 무예 수련을 게을리했기에, 팽가도법 오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금강대도를 찾기 위해 그를 찾는 팽가장 고수들을 만나게 되면 금강대도를 뺏기는 것은 물론,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일단 오늘 밤은 이곳에서 버티다가 내일 날이 밝으면 고구려의 북쪽 초원으로 내빼 몸을 숨겨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덧 산채에 도착한 팽무일은 그를 알아본 부하들이 서둘러 문을 열어 주자, 독고영을 품에 안고 산채 안으로 사라졌다.

팽무일의 뒤를 쫓던 온달도 망우산 도적 떼의 산채에서 이십여 장 정도 떨어진 풀숲까지 도착해 안으로 사라지는 팽무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직 어린 독고영을 팽무일이 해칠까 두려워 망설임 없이 산채로 뛰어들 것을 결심했다.

‘시간이 없다! 혹시 팽무일이 나쁜 맘을 먹고 독고영을 해칠 수 있으니, 내가 산채에 뛰어들어 팽무일이 못된 짓을 할 시간적 여유를 없애야 한다.’

결심을 굳힌 온달이 산채를 올려다보며 세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두껍고 긴 나무 기둥을 높이 세워 울타리 삼아 빙 두른 목책 위로 군데군데 횃불이 놓여 있었고, 일렁이는 그 횃불에 무기를 든 사내들 모습이 비쳤다.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는 사내들의 모습은 자신이 뒤따라온 것을 아직 모르는 기색이라 온달은 내심 안심했다.

산채를 두른 목책 중앙에 나무로 만든 큰 문이 있었는데, 꽤 육중해 보여 쉽사리 뚫기 어려울 것 같았다.

온달은 산채를 뒤로하고 서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등에 멘 철궁에 손을 대었다.

‘안에 몇 명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날이 밝으면 더 뚫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놈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쳐들어가자.’

오른손에 쥔 운철 대검을 풀숲에 꽂아 세우고 철궁에 효시를 단단히 먹여 시위를 팽팽히 당긴 후, 자신이 달려온 방향의 검은 밤하늘로 화살을 날렸다.

날카로운 매의 울음이 밤하늘의 적막을 찢으며 길게, 길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 방향이라고 잘 전해주거라!”

이 소리는 분명 밤의 고요 덕분에 자신과 독고영을 찾고 있는 평강 공주 일행에게 전달될 것이라 온달은 생각했다.

온달은 다시 등을 돌려 망우산 도적 떼의 산채를 향해 한 발 두 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온달이 날린 효시 소리는 도적 떼들에게도 잘 전해져 산채를 향해 걸음을 옮길수록 산채 이곳저곳에 불이 하나둘 켜지며 웅성거리는 소리 역시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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