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5화 (25/328)

025화 바보도 안 속을 계책에 속는 바보

주변에 감도는 살기를 느낀 온달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신중히 걸었다.

반면, 온달과 달리 강이식은 거대한 낭아봉을 지팡이 삼아 쿵쿵 땅을 찍으며 고갯길을 올랐다.

그는 걷는 내내, 오랜만에 해후한 평강 공주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평강 역시, 강이식이 나타난 이후 망우산의 도적 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탁 트인 전경에 온달의 입에서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제 막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며, 고갯길 옆으로 이어졌던 양옆 절벽도 사라져 앞뒤 좌우 어느 곳 하나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정면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요동벌이 멀리 지평선까지 쫙 펼쳐져 그동안 산과 절벽으로 꽉 막혔던 답답한 시야가 트여 호연지기마저 느껴졌다.

“어떤가? 요동벌은 처음 보지? 나도 요동벌을 처음 보던 날 며칠을 말 달려도 한없을 저 광활한 평원에 압도당하였지.”

강이식이 온달의 곁에 다가와 하늘과 땅이 맞닿을 정도로 한없이 펼쳐진 요동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넓은 평원은 처음 봅니다. 마치 하늘까지 연결된 것 같습니다. 저 끝의 땅은 붉은 노을에 물들어 하늘인지 평원인지조차 구분되지 않는군요.”

“온달 아우, 이 뒤를 돌아보시게. 어떤가?”

강이식의 말을 따라 온달이 뒤를 돌아보니, 앞과는 달리 끝도 없는 산들이 대해의 파도처럼 숨 막힐 정도로 격하게 굽이치고 있었다.

“이곳의 성 중 오직 요동성만이 평야에 자리 잡고 있다네. 넓고 깊은 해자 덕에 그 어떤 군대도 감히 넘지 못할 성이지.”

“맞습니다.”

“만약 요동성을 두고 고구려를 침범하기 위해 돌아가는 적이 있다면 그들은 자네처럼 끝이 어딘지 모를 저 산맥에 기가 질리게 될 것이네.”

강이식의 말에 온달도 크게 공감하여 답했다,

“정말 어디서 쉴 곳을 찾을지 장담 못 할 광경이군요.”

“만약 그들이 중원의 평지에 익숙하다면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할 것이야. 먼 길을 와 이제 싸워볼까? 생각했더니 험악한 산세에 여전히 고생길만 남아 고향 생각만 나겠지.”

“허허.”

“저 산들 중 요충지마다 산성들이 자리하고 있다네. 양만춘 성주의 안시성도 저기 어디쯤일 테고.”

강이식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고자 평양으로 진격한다면, 적들은 산을 넘고 또 넘어도 더 높은 산을 만나게 될 것이야. 게다가 어느새 뒤에선 요동성의 군대가, 좌우 옆에선 각 산성들의 군대가 치고 들어와 반드시 전멸하고 말 것이네.”

“대단합니다.”

“이 고구려는 하늘이 내린 천연의 성벽을 지닌 나라일세. 다만 남쪽이 문제지만. 하하하.”

강이식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온달은 이 사내가 보이는 거친 외모와 달리 지혜가 깊고 식견이 높다 생각해 존경심마저 들었다.

온달과 강이식, 이 둘이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막바우와 독고선, 양만춘은 야영에 대비해 나뭇가지를 모으고 불을 지폈다.

양옆에 높이 솟아 시야를 가렸던 절벽이 없는 고갯마루라, 도적 떼의 야습은 고개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것만 대비하면 되기에 방어가 고갯마루 아래보다 용이했다.

“앞뒤 이 아랫길만 지키면 그 수가 몇이든 해볼 만하겠어요.”

경우가 활을 챙겨 자리에 내려놓고는 양만춘에게 친근히 말을 건넸다.

둘만이 있는 자리라면 편히 말 놓을 사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양만춘에게 공손히 말을 높인 것이다.

“그래, 경우 네 활이라면 밑에서 올라오는 도적 떼를 능히 저지할 수 있을 거야. 마침 바람도 없고 위치도 좋구나.”

양만춘이 경우의 말을 받아 답하자,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넣던 독고선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여기까지 올라오던 중 절벽 위와 수풀 사이에 꽤 많은 이들이 매복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절벽 위에서 일시에 활을 당겼다면 우리 중 몇은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공격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이곳에 오르길 바란 게 아닐는지요.”

독고선의 날카로운 지적에 경우와 양만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낯빛이 변했다.

“함정인가? 우리를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포위하려는?”

양만춘이 낮게 중얼거리자, 온달과 함께 모닥불 가로 오던 강이식이 웃으며 대범하게 말했다.

“도적 떼 따위가 포위를 한들 모조리 싸잡아 한 번에 때려잡으면 그만이지.”

모두가 모닥불 주위에 자리할 무렵 고개 아래에서 노랫소리와 함께 등에 짐을 진 사내 여섯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고갯길을 불도 없이 올라오는 수상한 사내들을 응시하던 경우가 활에 화살을 먹여 들고 일어나 외쳤다.

“멈춰라!”

활을 겨눈 경우의 기세에 사내들의 노랫소리가 멈추고 그들의 걸음도 멈추었다.

거리는 열 장 남짓, 이 거리에서 경우의 화살은 결코 실수가 없을 것이다.

사내들은 갑자기 자신들에게 활을 겨눈 경우를 그저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고, 경우가 또다시 침묵을 깼다.

“너흰 누구고 어딜 가는 것이냐?”

그 물음에 사내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우린 소금 장수고, 고개 너머로 소금 팔러 가는 길이오. 그러는 당신은 뉘시오? 아이와 여자도 있는 거로 봐선 산적은 아닌 것 같고. 왜 우리에게 활을 겨누는 게요?”

소금 장수들은 이 산 저 산, 먼 곳과 험한 곳 가리지 않고 다니는 거로 유명했다.

그렇다 해도 도적 떼가 산채를 세운 산을 밤이 다 되어 오르는 것은 여전히 수상했다.

“소금 장수라고? 그래, 소금 장수가 도적이 들끓는 산에 밤이 깊어 어인 일이냐?”

“밤이 깊었으니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오른 것이고. 산을 넘어야 소금을 파니 산을 넘는 거잖소.”

“…….”

“우리에게 활을 겨눈 당신은 뭐요? 남에 대해 묻지만 말고 당신들도 정체를 밝히시오.”

소금 장수의 항의에 경우가 양만춘을 바라보자, 양만춘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 높여 말했다.

“그대들이 소금 장수라면, 우리는 산적이 아니오. 그러니 안심하고 더는 올라오지 말고 거기 그 자리에서 야영하시구려. 이곳은 우리가 먼저 왔고 밤이 깊어가니, 서로의 정체를 확실히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거리를 유지합시다.”

“우리가 소금 장수면, 당신들은 산적이 아니라고? 우리가 소금 장수가 아니면 당신들은 산적이 되어 우리 목숨을 노린단 게요? 허허, 끔찍해라! 그래 서로 거리를 확실히 유지합시다.”

소금 장수들은 투덜거리며 그 자리에 모닥불을 지피고 야영을 준비했다.

양만춘은 소금 장수들을 서운케 하고자 한 말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이 서운해하자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해했다.

그런 그에게 막바우가 괜찮다며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딱 봐도 소금 장수가 아니구먼. 어린애도 안 속을 겁니다. 소금 장수가 이 야심한 밤에 산적 소굴에 왜 기어 올라오겠소.”

막바우는 양만춘이 안시성 성주란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우와는 달리 그에겐 조금 태도가 공손해졌다.

“그래도 저들이 선량한 소금 장수일 수도 있으니, 함부로 대해선 안 될 것 같네.”

마음이 선한 양만춘은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금 장수들이 해를 입을까 염려했다.

“그 말이 맞소. 선량한 사람들일 수 있으니, 너무 박하게 대하지 않는 게 좋겠소.”

온달까지 양만춘의 말을 거들자, 경우와 막바우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난감해했다.

“그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저 소금 장수의 왼손 엄지 끝을 보니 굳은살이 박여 있더군요. 그것은 왼손으로 검집을 쥐고 엄지로 검의 손잡이 부분을 튕겨 검과 검집 사이를 살짝 벌리는 동작을 수련하면서 저절로 박힌 굳은살이지요.”

“…….”

“발검술을 연습하는 소금 장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일 없으니, 저들이 소금 장수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독고선이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는 척하며 소리 죽여 차분히 말했다.

그러나 소리 죽여 일행들에게만 들리도록 노력한 보람 없이, 막바우가 큰 소리로 방정을 떨었다.

“와! 눈썰미가 대단하오! 저들이 발검술을 연마한 자들이란 말이지? 그럼 소금 장수 아니네!”

“아니, 목소리가 왜 그리 커! 막바우 당신 저들과 한패야?”

경우가 급히 막바우의 말을 끊었으나, 이미 소금 장수들도 들은 모양이다.

“뭔 소리를 그리하는 것이오? 누가 소금 장수가 아니래? 우리가 소금 장수가 아니면 그대들은 산적이오?”

소금 장수들이 시끄럽게 따지고 들었고, 이번에도 경우가 일어나 활을 겨누며 엄포를 놓았다.

“누굴 바보로 아느냐? 네놈들이 소금 장수라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바보도 아니고.”

경우의 기세에 소금 장수들이 당황해 대꾸할 말을 못 찾아 버벅거릴 때, 온달이 그녀를 말렸다.

“경우님, 저들이 정말 소금 장수면 얼마나 억울하겠소. 우린 이 밤에 아무 일도 없으면 되는 것이고, 도적 떼가 덤비면 때려잡으면 그만이니, 저들과 시비 붙지는 맙시다.”

온달이 소금 장수를 두둔해 말하자, 경우가 답답해하며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양만춘도 온달의 말을 거들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온달님 말이 옳네. 경우 자네는 너무 의심하지 말게나. 어쨌든 지켜보면 되지 않겠나.”

이 소리에 평강 공주의 품에 안긴 독고영이 조그만 입을 꼬물거리며 말했다.

“온달님과 성주님은 참 착하신 것 같아요. 가짜 소금 장수 편도 들어주시고.”

아이의 말에 이번엔 온달과 양만춘이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네 말대로 두 분이 참 선하시구나.”

평강 공주가 독고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달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강이식도 낭아봉을 곁에 잘 내려놓고 평강 공주 품에 안긴 독고영이 귀여워 웃으며 말했다.

“착하고 선하면 복 받고 좋지. 악하고 간사한 인물보다 천 배는 훌륭해. 아무렴!”

고갯마루 위와 아래에서 시끌벅적한 중에 소금 장수들이 지핀 모닥불 너머 고갯길 아래에서 사내 하나가 경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긴 봉 끝에 줄을 매어 양쪽에 항아리를 각각 하나씩 매단 채, 어깨에 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아니, 저자는 또 뭐지?”

경우와 막바우가 벌떡 일어나 바라보니, 사내가 어느새 소금 장수들의 모닥불까지 도착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디 가시는 게요?”

“고개 너머 객잔에 술 팔러 가지요.”

“그 봉 양쪽에 매달린 것이 술 항아리요?”

“그렇소만.”

“아, 그거 잘 되었소. 마침 적적했는데, 술 한 통 파시오.”

“그럽시다.”

소금 장수들과 술장수의 대화가 너무도 술술 풀려 의심하지 않을래야 안 할 수 없는 경우와 막바우였다.

“저들이 오늘 처음 산속에서 만난 사이 같은가?”

막바우가 경우에게 묻자, 경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합이 잘 맞네. 많이 연습했나 봐.”

이번에도 막바우의 목소리가 컸는지, 소금 정수들의 모닥불까지 전해졌다.

막바우의 말에 소금 장수들이 벌떡 일어나 항의하려 할 때, 술장수가 더 크게 소리쳐 먼저 항의를 했다.

“아니, 누가 산적이란 게요? 야심한 밤이라도 급히 술 팔 일 있으면 고개 넘어가는 것이지. 뭘 그리 의심합니까?”

막바우와 경우가 아직 술장수에게 산적이라 의심하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술장수가 먼저 자신은 산적이 아니라 항의부터 하였다.

“우린 당신에게 아직 산적이라 말하지 않았는데… 왜 성질부리는 게요?”

경우가 이점을 콕 짚어 말하자, 술장수가 허둥대며 답했다.

“제 얼굴이 험해, 하도 의심받고 살아서 괜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네요. 죄송합니다. 사과의 의미로 술 한 통 드릴깝쇼?”

“이보시오! 고개 너머 객잔에 술 팔러 간다며? 여기서 그 술 다 팔면 어쩔 셈이오? 우린 됐으니, 남은 술이나 가지고 고개 넘어가시구려.”

보다 못한 해진까지 나서서 술장수에게 한마디 했다.

해진의 이야기에 술장수의 안색이 파래져 더욱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모습에 강이식이 시큰둥하게 중얼거렸고, 이 소리에 독고영이 큭큭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고개 너머로 술 팔러 가는 길이 아닌가 보네. 요즘 술에 몽환약을 타는 도적 떼가 있다더니, 그놈들인가? 참 뻔한 수법이다. 그 술 누가 마신다고, 우리 독고영이도 안 속겠네. 그렇지, 아가?”

“전, 어려서 술 못 마셔요.”

이 소리까지 들었는지, 소금 장수들이 술장수를 거들며, 떠들어 댔다.

“술에 뭔 약을 타! 우리가 마시고 멀쩡한 거 안 보이나?”

“그러게, 댁들한텐 이 술 안 팔아!”

어처구니없게도 술장수가 아닌, 소금 장수들이 술을 안 팔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평강 공주와 독고영은 그만 웃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참 잘한다! 술장수랑 소금 장수가 이젠 역할이 바뀐 겐가? 야밤에 처음 본 이가 술 마시라고 권하면 넌 꼭 먹지 말거라!”

강이식도 웃으며 독고영에게 말했고, 막바우와 경우도 각기 한마디씩 했다.

“안 먹어! 댁들이나 많이 퍼 드쇼. 암만 봐도 처음 본 사이들 같진 않아. 경우 자네가 볼 때 어떤가?”

“그걸 말이라 하오? 그리고 저들은 술값도 아직 안 치르고 술부터 퍼마시고 있다오.”

경우의 지적에 소금 장수들이 술장수에게 급히 술값을 묻고 값을 치렀다.

이번엔 독고선이 막바우 곁에 서서 남은 술 항아리를 가리키며 지적했다.

“술 항아리가 둘이니 하나만 약을 탔을 수 있지 않겠소? 남은 항아리 술 한 바가지 퍼 드시면 믿어 드리지요.”

독고선의 지적에 술장수와 소금 장수들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술장수와 소금 장수가 너무 허둥대자 안쓰러운지, 온달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아래를 향해 묵직하게 말했다.

“다들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는 것 아니오? 이보시오! 술장수, 그 남은 항아리 이리 가져오시구려.”

“어쩌시게요?”

온달의 묵직한 부름에 술장수가 얼어 되물었다.

“어쩌긴, 내가 술 한 바가지 마셔 보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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