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서부총관(西部摠管) 강이식과 을지문덕
호랑이 가죽옷을 걸친 험상궂은 사내를 부르는 평강 공주의 맑고 고운 음성이 유독 더욱 밝아 험악했던 분위기에 훈풍을 불러왔다.
“평강 공주님 아니십니까? 하하하, 을지공(乙支公)이 이 길로 꼭 오신다 하더만, 역시나 을지문덕 그의 혜안은 당할 수가 없군요.”
사내의 험상궂은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니 그나마 덜 삭막해 보였다.
“을지문덕 공께서 제가 이 길을 지날 것이라 말씀하셨나요? 그래서 저를 마중 나오셨군요.”
“마중 나왔다기보다 이 망우산에 도적 떼가 설친다 하니, 태왕의 사냥 대회에 흠집을 낼 수 없기에, 싹 쓸어버릴 겸 온 것이지요. 물론 공주께서 이 길을 지나실 것이란 을지공의 이야기에 서둘러 나왔으니 겸사겸사, 좋은 게 좋은 것인 셈이지요. 하하하.”
홀로 망우산의 도적 떼를 토벌하러 나왔다는 말에 온달과 막바우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놀랐다.
경우는 그가 허풍이 심하다 생각했으나, 평강 공주와 친분이 돈독해 보여 차마 빈정거리진 못했다.
평강과 허물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사내가 운철 대검을 어깨에 멘 온달에게 시선이 가더니 대뜸 거친 손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대가 온달인가?”
“그러하옵니다. 온달 인사드리옵니다.”
온달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저 평강 공주가 무척 반가워하는 인물이란 생각에 공손히 예를 표했다.
“그 무지막지한 검과 당당한 체구. 한눈에 딱 알아보겠네. 하하하. 난 강이식(姜以式)이라 하네. 반갑네. 하하하.”
자신을 강이식이라 소개한 사내의 호탕한 웃음이 고개에 울려 퍼졌고, 온달을 포함한 일행 모두는 놀라 말에서 황망히 내려 공손히 허리 숙여 다시 예를 표했다.
서부총관(西部摠管) 강이식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무력으로는 감히 그와 대적할 이가 없다고 중원에까지 위명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요동성 서부총관부(西部摠管府)의 수장으로 요동 일대를 지키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요동성 성주 고무와 더불어 일대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다.
그는 시랑 강철상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이 되기 전부터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검을 휘둘렀는데.
열다섯 살 무렵에는 구십 근이 넘는 낭아봉을 한 손에 거머쥐고 말을 달리며 가볍게 휘둘러 모두를 경악케 했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는 낙랑 사냥 대회를 우승해 바로 관직에 올랐다.
출중한 무예와 담대한 성품 덕에 돌궐, 거란 등에 사신으로 오가며 그들을 기세로 제압해 무장으로서 출세가 빨라 이른 나이에 요동벌을 지키는 서부총관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와는 반대로 낙랑 사냥 대회를 우승하였으며, 학문의 깊이마저 깊고 혜안과 정치적 식견 또한 출중한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전설적 명재상 을파소의 후손이란 이유로 오부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 보직을 받지 못했다.
총명한 을지문덕은 평양성 내에선 오부 귀족의 견제가 심해 장래가 밝지 못하다 판단해 스스로 길을 만들기 위해 요동성 서부총관부 강이식을 찾았다.
강이식은 자신을 찾아 서부총관부까지 온 죽마고우 을지문덕을 반갑게 맞아 부총관에 임명해 현재는 강이식이 총관, 을지문덕이 부총관으로 서부총관부를 관장하고 있었다.
평양 태왕에게 직위를 내려 받은 강이식과 달리 을지문덕의 부총관 지위는 정식 지위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부총관 대신 을지공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들 강이식과 을지문덕 두 벗은 평원 태왕의 장남 태자 원과도 동갑내기 벗으로 함께 어울려 사냥을 다니고 무예를 수련하였기에, 평강 공주와 이 왕자 건무와도 친분이 돈독했다.
을파소의 후손 을지문덕이 을 씨가 아닌 을지 성을 사용하는 것은, 을과 을지가 다른 성이 아니라, 을(乙) 뒤에 붙은 지(支) 자가 타인을 높여 부를 때 붙어 사용되는 글자로 을파소의 가문 을 씨를 높여 부를 때 을지라 하였다.
영리한 을지문덕은 이를 기쁘게 받을 선조의 후광이라 생각해 꺼려하지 않고 을파소를 잊지 않는 고구려 백성들에게 자신을 더욱 알리기 위해 을 씨 대신 을지를 아예 성으로 사용했다.
‘위대한 을파소의 후예 을지문덕.’
백성들은 이렇게 그를 불렀고, 오부 귀족들의 견제에서 벗어나 그가 훨훨 웅비하기를 바랐다.
평원 태왕도 자신의 뒤를 이어 태자 원이 태왕이 될 때, 강이식과 을지문덕 이 둘이 오부 귀족들을 견제하며 고구려와 태왕을 지킬 기둥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한없는 신뢰를 주고 있었다.
현재 고구려에서 가장 유명한 이가 온달과 평강 공주였으나, 그것은 백성들의 바람이었지, 아직 이 둘은 뚜렷한 실력을 보인 바가 없었다.
하지만 강이식은 이미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맹장으로 모두의 마음속에 각인된 인물이었기에, 오늘 그와 마주한 이들이 놀라 황망히 인사를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이식은 한 명 한 명 손을 맞잡고 따스하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이곳에 있음에 놀라고, 조의선인의 큰 스승 신크마리 해진 또한 함께함에 더욱 놀랐다.
해진은 조의선인 무리 중 가장 많은 수가 모인 집단의 큰 스승이면서 해모수의 후손 해 씨로 왕 성을 사용하면서도 평민들과 어울려 지내며 외적의 침입은 물론 온갖 재난 구호에도 앞장선 인물이었기에, 모두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안시성 성주가 젊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젊구려. 요동과 안시성은 지척임에도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참으로 잘 되었소.”
자신보다 연장자인 해진에게는 깊이 허리 숙여 정성스레 예를 표했다.
“삼가 강이식, 위대한 신크마리 해진님을 뵙습니다.”
대부분의 고구려 무장들은 어릴 적 잠시라도 조의선인에 가담하기에 강이식이 해진을 공손히 대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막바우와 독고선, 경우와도 격의 없이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며, 심지어 독고영과도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강이식의 소탈한 모습에 오히려 당당함이 느껴지는 온달이었다.
‘참으로 큰 인물이구나. 나도 이런 인물이 될 수 있을까?’
호탕하며 소탈한 강이식의 성품에 호감을 느낀 온달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온달의 시선에 강이식이 웃으며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물었다.
“온달 그대는 올해 나이가 어찌 되시는가?”
“서른다섯입니다. 장군.”
“아! 그럼 나보다 네 살 아래구먼. 내가 올해 서른아홉이니, 내가 형일세. 하하하. 아우님이라 불러도 되겠지? 하하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어느새 온달에게 자신이 형이라 하며 즐거워하는 강이식이었다.
온달 일행 중 강이식과 연배가 비슷한 이는 온달 한 명뿐이라, 강이식의 호형호제는 다행히 온달에게만 한정되었다.
“이 시커먼 대검이 운철로 만든 검이로군. 대단해 참으로 대단해. 내가 한번 들어봐도 되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온달이 어깨에 멘 운철 대검을 내려 강이식에게 공손히 건넸다.
강이식은 온달이 건넨 운철 대검을 한 손으로 쥐어 번쩍 들어 올리더니, 높이 치켜들어 찬란한 햇살을 받게 했다.
백이십 근이 넘는 운철 대검을 너무도 쉽게 들어 올린 강이식의 괴력에 모두가 놀라 경탄하자, 강이식은 쑥스러운 기색조차 없이 오히려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내가 열다섯부터 무쇠로 만든 낭아봉을 한 손에 쥐고 휘둘렀지. 검과 칼은 너무 가벼워 아직도 낭아봉만 사용한다네.”
“허허, 대단합니다.”
“하하, 그런데 아우님의 이 운철 대검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광을 구할 수 없어 난 그저 멋없는 쇠몽둥이만 계속 휘둘러야 할 것 같네. 참으로 부럽고 아우님에겐 참으로 복된 일이네.”
강이식이 운철 대검을 침까지 튀기며 칭찬하자, 순박하고 욕심 없는 온달이 선물로 주겠다는 소리를 할까 봐 평강 공주가 서둘러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곧 날이 저물 것 같습니다. 이곳보단 야영하기 수월한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평강 공주의 말에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여 답한 후, 온달에게 운철 대검을 건네며 말했다.
“내가 어젯밤에 여기서 불도 안 피우고 풍찬노숙을 했는데, 도적 떼는 나타나지 않더군. 그래서 이놈들이 내가 온 줄 모르나 싶었는데, 잠시 한눈판 사이에 내가 타고 온 말을 훔쳐 갔지 뭔가. 나를 쭉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지.”
“말은 왜 가져간 것일까요?”
강이식의 말에 온달이 되묻자 막바우가 답답해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도둑이니 훔쳐 가죠. 온달님도 참.”
“그래! 이 친구 이야기가 옳네. 그런데 아우님은 나를 장군님이라 부르지 말고, 형님이라 부르시게나. 그래야 내가 태왕의 부마를 아우로 둔 형이 되지 않겠나. 하하하.”
거침없는 강이식의 태도에도 온달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아 쑥스러워하며 조심스레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 번에 형님이란 호칭이 온달의 입에서 나오지 않자, 강이식이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차근차근 격 없이 부르시게. 그건 그렇고 말을 가져간 것은 일종의 경고랄까? 아무튼 그런 것 같네.”
“네?”
“아마도 녀석들이 지금도 우릴 엿보고 있을 게 분명하네. 공주님의 말씀대로 날이 저물기 전, 야영할 곳을 찾는 것이 좋겠어.”
강이식의 말을 산세를 잘 아는 막바우가 받아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양옆으로 절벽이라 숨어서 지켜볼 곳이 많으니, 고갯마루가 여기보단 좋을 것입니다.”
일행이 점점 불어나, 고구려 최강의 무력 강이식마저 함께한 지금은 도적 떼 출몰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야습은 경계해야 피해를 막을 수 있기에 막바우의 의견을 받아들여 서둘러 이동을 시작했다.
고갯마루로 향하는 내내 경우는 양옆 절벽과 고갯길을 따라 난 긴 풀숲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또한 그 시선들 속엔 지독한 살기도 섞여 있음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양만춘과 독고선도 말에서 내려 뒤를 경계하며 일행의 뒤를 따랐는데, 산이 깊어도 새 소리조차 없고 흔한 노루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주위에 꽤 많은 수의 사람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뭇짐승들은 사람이 몽둥이를 든 것과 활을 든 것, 창을 든 것 모두 구별하지요. 지금 새소리가 고갯길은 물론이요. 절벽 위에서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마도 활을 든 사람 수가 꽤 된다는 뜻일 겁니다.”
일행의 앞을 걷던 막바우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둔 채, 온달에게 말했다.
온달이 고개 들어 절벽과 하늘을 살펴보니, 드넓은 하늘에도 요동에 들어서며 늘 보던 흔한 검독수리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놈들은 야습을 노리겠지요.”
경우가 온달에게 조용히 말하자, 평강의 곁에서 담소를 나누며 걷던 강이식이 크게 웃으며 이야기에 참여했다.
“찾아가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구먼. 안 그래도 산채가 어딘지 몰라 헤맬까 봐 기다리기만 했는데 다행이야.”
일부러 들으라는 듯 절벽 위까지 전해질 정도로 그의 목소리가 컸다.
지켜보는 도적 떼를 자극하여 실수를 유발하고자 함이 분명했다.
경우는 점점 살기가 늘어나면서도 쥐 죽은 듯 조용한 주변 풍경에 강이식과 달리 조금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