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조의선인(皁衣先人)과 망우산(忘愚山)의 도적 떼 (2)
해진이 평강 공주가 올린 예에 당황해, 재차 허리 숙여 인사를 받았다.
평강의 허리가 펴지자, 해진이 마른 입술을 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공손히 말했다.
“엿듣고자 한 것은 아니옵고, 그저 귀가 뚫려 있어 듣게 된 것이오니, 부디 너그러이 생각해 주시옵소서.”
아마도 공주와 온달이 객잔 주인과 나눈 대화를 허락 없이 듣게 된 것만으로도 죄를 지었다 여기는 모양이다.
“아니옵니다. 들으셔도 상관없는 크게 중요치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평강이 손을 내저으며 답하자, 퀭하니 들어간 해진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어찌 아무 일도 아니겠습니까? 우리 백성을 괴롭히는 중원의 도적 떼 괴수가 근처 산에 자리잡고 있단 이야기인데. 향후 나라를 이끄셔야 할 온달님과 공주께옵서 이 이야기를 듣고도 나서지 않을 리 없고…….”
“…….”
“그렇다면 작은 도적이라 해도 적을 상대함에 엄히 보안을 유지하며 계획을 수립해야 할 터인데, 그것을 제가 허락 없이 엿듣게 되었으니, 의도하진 않았으나 큰 죄를 지은 것이지요.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서소.”
해진의 이야기는 부드럽고 공손했으나, 망우산의 도적 떼를 이대로 두고 돌아서 낙랑 사냥 대회로 결코 갈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과연 조의선인의 한 무리를 이끄는 큰 스승 신크마리답구나. 우리가 망우산의 도적 떼를 토벌할 것이라 단정하여, 낙랑 사냥 대회로 가는 길이 급하고 일신의 안전을 위해 돌아가려는 생각 자체를 아예 차단시켜 버렸구나. 우리 온달 장군님은 어떤 답을 하실까?’
평강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아 해진에게 대답 대신 화답하였다.
곁에선 온달은 양만춘과 함께 온 사내를 찬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작은 키에 깡마른 모습으로 몸 어디에도 힘이라곤 보이지 않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상만은 참으로 드높으니, 이 또한 내가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온달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생각을 이어 갔다.
‘조의선인이 뭐 하는 직책인지 모르겠으나, 행색은 불가의 승려 같으나 칼을 메고 있으니, 승려는 아닌 것도 같고 차후 공주에게 물어봐야겠구나.’
온달의 생각은 이미 해진의 말을 따라 도적 떼 토벌로 정해졌다.
평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방긋 웃으며, 온달을 대신해 해진에게 말을 전했다.
“우리 온달님께선 이미 해진님의 뜻에 동의하셨습니다. 저는 속이 좁은 아녀자이기에, 싸움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라 돌아갔으면 했으나, 역시 백성의 어려움을 듣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요. 따르겠습니다.”
평강 공주의 정중한 표현에 해진이 앙상한 손을 모아 공손히 읍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들이 서로 옳네 하며 온갖 정중한 표현으로 자신의 뜻을 이야기할 때, 막바우가 앞장서 큰 소리로 떠들며 계단을 올라왔다.
“아침도 거르고 봉술 구경했더니 허기지네. 뭐 하쇼? 빨리들 올라오지 않고.”
막바우의 뒤로 독고선이 따랐고 경우가 독고영을 안고 올라왔다.
서로 초면인 인물이 양쪽에 있어 평강 공주가 가운데 서서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모두가 인사를 마치고 망우산의 도적 떼 이야기를 평강이 꺼내자, 다혈질의 막바우가 흥분해 서둘렀다.
“아니, 여기는 우리 고구려 땅인데, 팽 씨 성을 쓰는 중국 도적 떼가 설치게 할 수 없습니다. 도적질을 당해도 같은 고구려인이어야지. 어여, 밥 시켜 먹고 혼내주러 떠나시죠.”
막바우와 달리 경우가 이견을 내며 은연중에 해진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사냥 대회가 곧 시작되는데, 온달님이 사냥 대회 참여도 전에 지치고 몸 상하면 어쩌려고. 이 무책임한 사람 같으니.”
해진은 경우의 아비, 대식과 친분이 깊은 사이로 경우는 해진을 어려서부터 숙부처럼 잘 따랐기에, 둘 사이에 거리낌이 없었다.
대뜸, 경우가 따지고 들자 해진도, 온달도, 막바우도 모두 할 말을 잃어 그저 빈 탁자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혈기와 의협만 있고 계획과 생각은 없는 거예요? 낙랑 대회 다녀오다가 도적 떼를 해치워도 되잖아요.”
“음, 그 시간 동안 백성들이 고달프지 않겠느냐?”
해진이 슬쩍 경우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뭐, 그런 부분이 걸린다면 어쩔 수 없죠. 해진 숙부가 혼자 가셔서 도적 떼를 소탕하신 후, 낙랑 사냥 대회로 오세요. 우린 온달님과 평강 공주님을 모시고 먼저 갈 테니. 아! 여기 이 막바우란 자도 데려가세요.”
경우가 딱 잘라 말하자, 해진의 말을 거들려던 온달이 말도 못 꺼내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온달이 뭔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린 모습에 평강 공주는 그의 속을 헤아려 부드럽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경우님의 이야기가 무척 타당합니다. 그러나 도적 떼가 근처에 있음을 듣고도 모른척하기 어려우니, 우리는 돌아가지 말고 망우산으로 방향을 정하되, 도적 떼가 우리 앞에 나오면 대적하고 나오지 않으면 낙랑 사냥 대회를 끝낸 뒤, 중앙의 군대를 이끌고 놈들을 토벌하도록 하시지요.”
지역 성주에게 맡기기 어려움에 중앙군의 힘을 이용하자는 평강 공주의 제안은 그녀가 공주이기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그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공주님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양만춘이 크게 기뻐하며 동의하자, 해진과 막바우도 동의하였고 경우도 이 의견엔 감히 이견을 내지 못했다.
‘역시, 말재주가 없는 내가 되도 않는 이야기 꺼내는 것보다 공주가 이야기하길 기다린 것이 옳았다. 공주는 참으로 현명하다.’
온달이 이런 생각을 하며 싱글벙글 웃자, 경우는 그런 온달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객잔 주인을 불렀다.
‘온달님은 어떤 부분이 좋으셔서 저리도 싱글벙글이신 건가? 뭐 아무튼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니, 주인을 불러 도적 떼 산채 규모와 그 수에 대해 설명이나 들어야겠구나.’
경우의 부름에 달려온 객잔 주인은 망우산 도적 떼에 대해 경우가 묻는 대로 답하였으나, 딱히 아는 바가 없어 대답이 무척 짧았다.
“산채의 규모는 제가 가 보지 못해 알 수 없지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수가 이백이 넘는다 하니, 산채 규모도 그 정도 아닐는지요.”
소문은 소문일 뿐, 정확한 수가 아니었기에 직접 확인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든든히 배를 채운 온달 일행은 짐을 꾸려 망우산으로 향했다.
독고선도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뒤를 따랐다.
평강 공주와 경우가 어린 독고영이 염려스러워 망우산을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 했다.
그러나 독고선도 고집스러웠다.
“위험하면 동생과 몸을 피하여 심려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내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것인가?’
그의 말에 경우는 이런 생각을 하며 독고영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도 화전민 마을의 소녀가 떠오른 모양이다.
객잔 주인의 설명대로 고개를 넘고 보니 정면에 망우산이 들어왔다.
산 아래에는 보통이면 있어야 할 객잔은커녕,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어 산을 넘다가 고개 어딘가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온달은 죽령 산골에서 자라 이 정도의 산세는 며칠이고 무리 없으나, 공주가 불편할까 걱정되어 괜히 망우산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 아닌가? 내심 후회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날이 저물기 전에 고개 안에서 하룻밤을 보낼 장소를 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강 공주가 이번에도 머뭇거리는 온달의 속내를 용케 헤아려 씩씩한 목소리로 근심을 덜어주었다.
“연태조란 자도 길을 물었다고 들었는데, 우리처럼 도적 떼를 소탕하러 방향을 정했을까요?”
온달이 평강 공주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고개를 오르며 물었다.
“대대로는 다수로 소수를 한 번에 눌러 실수 없이 이기는 것을 좋아하기에, 성품상 여기로 방향을 정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평강 공주가 애써 좋은 말로 연태조를 평하였으나, 온달이 듣기에 연태조는 결코 선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막바우가 온달의 운철 대검을 대신 메고 신바람 일으키며 앞서 걸었다.
그 뒤를 경우가 독고영을 앞에 태우고 말을 몰아 따랐으며, 온달과 평강 공주가 담소를 나누며 느긋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양만춘과 독고선이 함께 말을 타고 이야기를 나누며 맨 뒤에서 가운데에 해진이 탄 말을 두고 따라왔다.
온달과 평강은 단둘이 죽령을 떠나 올 때에 비해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더해진 지금이 적적하지 않고 든든해 좋았다.
사실, 온달과 평강 공주 둘만이 낙랑을 향했다면 도적 떼가 터를 잡은 망우산으로 지금처럼 방향을 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양만춘과 경우는 물론, 막무가내인 막바우와 해진도 마찬가지로 누구도 혼자서 혹은 둘이서는 도적 떼와 대적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 분명했다.
날이 선 벼랑 사이로 난 고갯길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아 오르기 수월하여 해가 지기 전에 고갯마루에 도착해 야영을 준비할 수 있어 보였다.
그때, 앞서가던 막바우가 운철 대검을 땅에 내려놓고는, 몸을 살며시 돌려 손을 좌우로 흔들며 조용히 하란 손짓을 했다.
온달이 막바우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올려 주시해 보니 고갯마루로 향하는 길 한 쪽에 평평한 바위가 놓여 있었는데, 호랑이 가죽을 걸친 사내가 커다란 낭아봉을 바위 옆에 세워 두고는 바위를 침상 삼아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딱! 봐도 산적이구먼.”
막바우가 중얼거리며 경우를 바라보자, 경우가 코웃음을 치며 활에 화살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누워 잠든 줄 알았던 사내가 여전히 누운 채 큰 소리를 질러 경우를 당황케 했다.
“그 활 지금 쏘면 죽는다.”
누워서 잠든 줄 알았던 사내가 고개도 들지 않고 자신이 활을 겨눈 것을 알아챘을 뿐더러, 도리어 활을 쏘면 죽는다는 소리까지 하니, 경우는 얼굴이 붉어져 끝내 소리 지르고 말았다.
“이런 시건방진! 그래 누가 죽는단 말이냐? 자신 있으면 어디 해보시지.”
그녀의 엄포에 바위에 누웠던 사내가 몸을 일으켜 앉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경우와 눈을 마주하며 담담히 말했다.
“누구긴, 네가 내게 활을 쏘면 내가 네 화살에 맞아 죽는단 소리지. 당연할 걸 묻나?”
자신이 죽는단 소리를 너무도 태연히 말하자, 더욱 화가 치민 경우가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고 막바우가 그녀를 말렸다.
“일단 참으시오. 누구인지부터 알아봅시다.”
“딱! 봐도 산적인데 뭘 알아본다는 게요?”
경우와 막바우가 실랑이를 하는 동안, 온달이 평강 공주의 앞으로 말을 몰아 나가 그녀의 앞을 지키며 사내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이곳에서 뭐 하고 있던 것이오?”
“이 산에 도적 떼가 있다는 것 알고 올라 온 것인가?”
온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사내가 온달에게 질문을 건넸다.
“당신이 도적이란 말이오?”
사내의 물음에 온달이 다시 묻자, 사내는 온달을 잠시 바라보더니 커다란 낭아봉을 들고 일어서며 답했다.
“아니, 난 그저 도적 떼가 있음을 알고도 올라온 것이냐고 물었을 뿐인데. 내가 왜 도적이라 생각하는 것이지?”
온달이 사내를 꼼꼼히 살펴보니, 서른 중반에서 마흔쯤 돼 보였고 어깨가 딱 벌어지고 얼굴이 험상궂었지만, 눈매는 꽤 선해 보였다.
막바우가 온달에게 운철 대검을 건네고는 손에 몽둥이를 쥐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가며 사내에게 물었다.
“정말 산적 아니오?”
“아니지.”
“그럼 왜 여기서 자고 있던 것이오? 그리고 곁에 그 쇠몽둥이는 뭐고?”
“산적 나오는 산에 있다고, 그 사람이 꼭 산적이란 법이 어디 있나? 그대도 산적 나오는 산에 있으니 산적인가? 이것은 마치 호랑이 출몰하는 산에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호랑이 아니냐고 묻는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른가?”
“아니, 그거랑 이거랑 어찌 같소? 호랑이와 어찌…….”
“뭐가 다른가? 어디 설명해 보시게.”
사내는 마치 막바우와 대화를 즐기는 것만 같았다.
막바우가 대답을 제대로 못 하자, 이번엔 온달에게 물었다.
“그대는 산적 떼가 산채를 세웠다는 이 산에 뭐하러 온 것인가? 산적이 되고 싶은 겐가?”
사내의 억지스런 물음에 말문이 막힌 온달이 머뭇거리자, 평강 공주가 말을 앞으로 몰아 나오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강 장군을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다들 잘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