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조의선인(皁衣先人)과 망우산(忘愚山)의 도적 떼 (1)
날이 저물자, 막바우가 급격히 기운이 떨어진 표정을 지으며 배고픔을 호소했다.
“먹고 이야기하시죠. 아가, 너도 배고프지?”
“애가 공주님과 잘 노는구먼, 낮에 고개 넘으며 잔뜩 먹고도 그사이에 배가 꺼진 게요?”
막바우의 말엔 꼭 한 마디씩 참견하는 경우였다.
평강 공주 품에 안겨 잘 놀던 독고영은 딱히 배고픈 기색이 아니었으나, 영리하게도 막바우를 위해 자신의 배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작은 머리에 동그란 눈이 반짝이며 막바우 말에 동의하자, 경우도 이 조그만 소녀가 귀여워 웃으면서 평강 공주와 눈을 마주하며 의견을 구했다.
“사람 불러 상을 차리라 하세요. 부족함 없이 많이요.”
평강은 온달과 막바우의 먹성을 아는지라 ‘부족함 없이’를 유독 강조하여 말했다.
곧 탁자 가득 상이 차려졌는데, 밥을 일곱 그릇이나 비운 막바우는 그래도 부족한지 깨작거리는 경우의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그 눈빛에 경우가 수저를 내려놓고는 막바우에게 밥그릇을 밀어주었다.
“자, 실컷 드시오.”
“정말,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겠소. 평생 이렇게 맛난 밥은 처음이요. 정말 고맙소.”
미친 겨울곰에게서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 일엔 고맙단 말 한마디 없던 막바우가 먹다 남긴 밥그릇에 연신 감사를 표하자, 뭔가 허탈한 마음에 경우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래, 다 드시오.”
막바우가 상에 올려진 음식을 모두 비워 갈 무렵, 평강은 사람을 불러 방을 네 개 준비시켰다.
온달은 사람들의 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했다.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깨끗이 비운 막바우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왜 방을 네 개나 준비시키는지 궁금해 하며 평강 공주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우리 부부가, 다른 하나는 독고 남매분들이, 나머지 방 둘은 막바우와 경우님이 각기 사용하시라 준비시킨 것이지요.”
온달이 막바우에게 말을 낮추지 않으니, 평강 공주도 막바우를 결코 하대하지 않았다.
“저 같은 것에게 방을 하나 내주시다니, 마구간이나 처마 밑에서 자도 괜찮은 놈인데… 황송합니다.”
막바우가 기름 묻은 입술을 급히 닦으며 감사를 표하자, 역시나 경우가 한 소리했다.
“마구간이나 처마 밑에서 자면 객잔 주인이 내쫓지, 그걸 두고 본대요?”
막바우는 듣고 보니 경우의 말이 옳아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혼자 방을 하나 사용하는 것은 왠지 너무 호사스럽다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평강은 경우가 남장을 한 여인임을 알기에 막바우와 경우에게 따로 방을 마련해 준 것이다.
온달은 평강 공주가 하는 일에 전혀 이견을 내는 법이 없기에, 이번에도 별생각 없었고, 경우와 독고 남매는 평강의 배려에 무척 고마워했다.
* * *
다음 날, 아침.
온달과 평강이 객잔의 이 층 창가 탁자에 앉아 사람을 불러 차를 내오도록 하고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객잔 밖에서 독고선이 독고영에게 봉술을 지도하는 소리가 들려와, 둘은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독고영이 자기 키만 한 봉을 들고 오빠가 하는 동작을 흉내 내는 모습이 퍽이나 귀엽고 재미나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막바우와 경우의 실랑이 소리가 들려 고개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막바우가 독고선, 독고영 남매의 동작을 어설프게 따라 흉내 내고 있었다.
그런 막바우의 곁에 역시나 경우가 쪼그려 앉아 연신 핀잔을 주고 있었다.
“다리 좀 똑바로 해 봐요. 오른쪽 발이 항상 앞이고, 봉을 쥔 손목에 탄력으로 상대의 머리를 후려친다고 생각하라고요. 아니 오른발이 땅을 디딜 때 봉을 내려치라고요! 그래야 힘이 실리지. 아니, 아니 디딜 때!”
막바우는 눈으로 독고선과 독고영의 동작을 살피고 몸으로 흉내 내며, 귀로는 경우의 잔소리를 듣느라 무척 바빠 보였다.
“보통 일이 아니군요.”
남의 일 같지 않아 온달이 평강에게 말하자, 평강은 막바우와 경우의 아웅다웅이 재밌어 웃기만 했다.
어느새 온달도 독고선의 동작을 살피며 그간 아무렇게나 혼자 운철 대검을 들고 수련한 자신의 동작과 비교하며 자신의 동작에서 많은 허점을 발견해 내고 있었다.
“영아, 발동작은 가볍게 오른발을 앞에 두고, 봉을 내리칠 때 오른발로 땅을 끌어당기듯. 왼발로는 몸을 밀 듯하며, 두 발을 동시에 내디디며, 신속히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봉을 쥔 두 손목에 탄력을 이용해 빠르게 내리치는 것이다.”
일부러 막바우가 잘 듣도록 또박또박 말하니, 덕분에 객잔 이 층 창가에 자리한 온달도 잘 듣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온달이 독고선의 봉술 시범에 푹 빠져 있을 때, 평강은 차를 가져온 객잔 주인에게 길을 물었다.
“낙랑 사냥 대회로 가시는 길이시죠? 어제 여기 계셨던 손님들도 물으셨는데.”
연태조 일행을 말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연태조 일행도 낙랑 사냥 대회로 향하던 길이구나.’
평강이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객잔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빠른 길과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 둘 다 말씀드릴까요?”
‘빠른 길만 알면 되는데 굳이 왜 돌아가는 길도 말하려는 것일까?’
평강 공주가 의아해하며 답했다.
“두 길 모두 말해 보시오.”
“빠른 길은 객잔을 나와 우측 길로 가다 보면 작은 고개가 하나 나오는데, 그 고개를 넘고 나면 눈앞에 산이 하나 나옵니다. 높지는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꽤 넓어 돌아가기 무척 힘들지요.”
“네…….”
“다행스럽게도 산길이 잘 닦여 있어 넘기는 편합니다. 그 산을 넘고 쭉 가면 길도 잃지 않고 걸어서 이틀 내로 도착하실 겁니다.”
듣고 보니, 어려운 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돌아가는 길은 어찌 되나요?”
“돌아가는 길은 객잔을 나와 쭉 직진해 앞에 보이는 마을을 통과한 후, 이틀 정도 가면 요동성이 나오는데,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측 길로 빠져 벌판을 걸어서 이틀 정도 더 가시면 되십니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요.”
듣고 보니, 꽤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설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길을 권하시나요?”
평강이 이런 생각을 하고 묻자, 아니나 다를까 객잔 주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말하기 시작했다.
“돌아가시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돌아가는 길을 권하십니까?”
“실은 그 산에는 중국의 하북 탁현(북경)에서 온 팽가란 자가 지난겨울부터 자리 잡고 앉아 인근 산과 벌판의 도적과 비적들을 규합해 산채를 세워 인근 마을을 약탈하고 있습지요. 그리하여 근방의 사람들은 그 산 근처로는 가지 않습니다.”
“도적들이 산에 산채를 세웠음에도 관에서 두고 봅니까?”
평강 공주가 놀라 재차 묻자, 객잔 주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
“망우산은 요동성과 신성 사이에 있는 산인데, 관할지는 신성으로 신성에서 관군을 보내 도적 떼를 토벌해야 하나 성주가 몇 년째 평양성에 머물러 있고, 수하의 관리들은 몸을 사리기에 토벌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어느새 온달도 평강 공주와 객잔 주인의 대화에 귀 기울이더니 낮게 탄식했다.
“여기도 화전민 마을과 다를 바 없구나.”
이미 화전민 마을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온달이기에,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한 것이다.
“하북 탁현의 팽가라… 그 일대에 세가 무척 강한 일가인데, 어찌 이곳에서 도적 떼를 꾸렸을까?”
평강 공주가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릴 때,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명문세가의 후손이 도적 떼의 괴수라니… 쯧쯧. 그나저나 중원 인물들까지 두루 헤아리시는 공주님의 식견은 참으로 대단하시옵니다.”
온달과 평강 공주가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어느새 양만춘이 왔는지 단정히 양손을 모으고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 검은 도복을 입고 중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호리호리한 사내가 등에 검을 메고 양만춘을 따라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 있었다.
양만춘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그의 키는 짐작건대 평강 공주보다도 작을 것 같았다.
“성주, 어서 오시오!”
온달이 일어나 환한 얼굴로 양만춘을 맞았다.
양만춘도 만면에 미소를 가득 담아 온달의 인사에 재차 답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조의선배이신가요?”
평강도 양만춘의 인사에 답하며, 그의 뒤에 선 불가의 승려 같은 모습의 흑의 사내를 가리켜 물었다.
“네, 공주님. 뒤에 계신 분은 조의선배 신크마리 해진님이십니다.”
양만춘의 소개에 해진이 앞으로 나와 다시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해진, 공주님과 온달님께 인사 올립니다.”
조의선배란 조의선인들 중 학문이나 무예 혹은 수렵을 겨루는 대회에서 우승한 자의 호칭이었다.
조의선인은 중원인들이 조복처럼 흑의를 입고 승려처럼 머리를 박박 민 고구려의 무예 집단을 일컫는 말에서 비롯되어, 이제는 조의선인 스스로들도 정식 명칭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오부의 귀족이 확고히 자리잡은 귀족 중심의 국가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이들 귀족들이 모두 차지해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오직 조의선인 중 선배의 지위에 오른 이는 신분의 귀천 없이 학문과 무예로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고구려는 조의선인들에게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고구려에는 고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 신앙이 있었고, 조의선인들은 이 신앙을 믿고 따르며 수박과 ‘비검술’이라는 극강의 전통 무예를 익혔다.
비검술은 검이나 칼을 날려 상대의 숨통을 일격에 끊는 신묘한 재주였고, 이들이 가르친 수박을 고구려 군에서 실전 무술로 사용하고 있었다.
조의선인들이 사용하는 수박의 심법에서 또 하나의 전통 무술인 차력이 비롯되어 사용되니, 조의선인들은 고구려 무예의 근간이었다.
이들 조선인들은 충, 인, 의, 지, 예와 더불어 고조선 시대의 번영과 부활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선배 중에서 선행과 학문, 무예가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겼다.
조의선인의 계급 체계는 선인 위에 선배가 있고, 이들 선배들은 조백을 허리에 둘렀으며,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또한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를 큰 스승 ‘신크마리’로 부르며 이들에게 고구려 태왕은 두대형 혹은 태대형의 지위를 수여했다.
큰 스승 신크마리의 아래인 스승은 ‘마리’라 불렸고 이들도 태왕에게 대형이란 지위를 수여 받았으며, 그 아래 선배는 소형이란 지위를 태왕에게 수여받았다.
이들 조의선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로 나아갔다.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개선하는 사람과 동일시 대했으며, 패하여 물러난 이는 침을 뱉고 업신여겼기에, 모든 조의선인들은 전장에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용감하였다.
조의선인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것은 고구려의 전설적인 재상 을파소(乙巴素)였는데, 그 자신도 가난한 농부 출신으로 조의선인 중 한 명이었다.
현재 서부총관 강이식도 조의선인 출신이었으며, 명재상 을파소의 후손인 을지문덕도 조의선인 출신이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 또한 조의선인 출신이었다.
훗날 다섯 자루의 검을 등에 메고, 비검술을 사용하여 중원을 주유천하 하는 연개소문 역시 어려서 잠시 조의선인에 몸담게 된다.
고구려의 많은 장수들은 신분이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어려서 잠시라도 조의선인에 몸을 담아 무예를 익히고 정신을 수련하였다.
만약 온달이 이번 사냥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조의선인 중 선배의 지위를 얻고 태왕에게 대형의 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보통 조의선인은 열 살이 되기 전부터 함께 모여 수련하지만, 온달처럼 뒤늦게 경연을 통해 참여하기도 했다.
평강 공주는 양만춘이 온달을 지지하기 위해 조의선인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이를 일부러 모셔 온 것에 무척 기뻐하며, 온달을 대신해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위대한 신크마리 해진님을 이 평강이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