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생각보다 작은 중원
연태조 일행이 떠날 때, 청색 도포의 상 공자와 흰 수염의 단 사부는 온달 일행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고, 온달 일행도 애써 그들과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막바우만이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잘도 가네. 나도 뭐라도 좀 배워야지. 저런 여리여리한 어린 것한테 안 당하지. 제기랄.”
그 소리에 경우가 뒷짐 지고 서서 거드름 피우며 한 소리 거들었다.
“그러게, 그 좋은 힘으로도 발로 채여 컥컥거리는 모습이 애처롭던데, 군에서 사용하는 수박이라도 배워볼런가? 내 가르쳐 줌세.”
“참, 얄밉네.”
경우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풀 먹은 개마냥 입을 다무는 막바우였다.
약장수도 사람들을 모아 흥이 나게 약을 팔기 어려울 것 같은지, 소녀와 함께 주섬주섬 고약을 보따리에 담고는 등에 짊어졌다.
서너 살로도 보이고 대여섯 살 남짓으로도 보이는 소녀는 이런 소동 속에서도 잘도 약장수를 도와 짐을 꾸리고 그의 곁에 섰다.
“변변치 않은 저를 도와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약장수의 음색은 침착하고 단정해 악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고맙긴 뭘, 당연한 건데.”
막바우가 연태조 일행의 뒤를 노려보던 험악한 눈매를 풀고 웃으며 답했다.
“막바우, 그대는 뭐 도운 게 있긴 하오? 일만 크게 벌였지.”
경우가 공연히 핀잔을 주자 뻘줌해진 막바우는 다시 입을 닫고 말았다.
‘저, 경우란 자는 참 밉상이야. 날 구해준 것이 고마웠는데, 다 멀리멀리 날아가네.’
막바우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온달이 약장수를 염려해 말을 건넸다.
“떠나시려는 것이오?”
“네, 오늘 장사도 이젠 끝이니, 어디 쉴 곳을 찾아야겠지요.”
약장수의 대답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객잔에서 묵을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저 여인이 조금 전에 한 말이 걸리니, 오늘은 이 객잔에서 우리와 함께 머물도록 합시다.”
온달이 진심을 담아 염려했으나, 약장수가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오늘 괜히 저 때문에 곤혹스런 일을 겪으셨는데, 더 신세를 질 수는 없지요. 다음에 기회 되면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공손히 허리 숙여 한사코 사양하는 약장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막바우가 왼손으로 약장수 곁에선 소녀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성큼성큼 객잔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우리 온달 장군님이 말씀하셨으니, 얼른 따라들어 오시오! 아가 밥 안 먹었지? 안에 들어가서 밥 먹자.”
“아니, 저 인간은 왜 항상 막무가내지? 공주님, 우리도 들어가시지요.”
막바우의 뒤통수에 대고 경우가 한 소리하고는 웃으며 평강 공주와 함께 객잔으로 들어갔다.
평강은 자신을 챙기는 경우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온달에게 미소 지어 보이며 어서 데리고 들어오란 뜻을 보였다.
“다 들어갔으니, 우리도 들어갑시다.”
둘만 남자 온달이 서슴없이 약장수의 손을 이끌었다.
약장수도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따라 들어갔다.
온달 일행과 함께 이 층 탁자에 자리한 약장수는 막바우 곁에 놓인 운철 대검에 잠시 시선을 두더니, 공손히 읍하며 온달과 평강 공주에게 예를 표했다.
“고구려에서 가장 유명하신 평강 공주님과 온달님이시군요. 풍문으로 낙랑 사냥 대회에 참여하신다고 들었는데, 공연히 저 같은 인물의 일에 엮이실 뻔하셨습니다. 귀인을 만나 도움을 받은 저로선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나야, 뭐 별거 없는 인물인데, 귀인은 당치 않소. 그저 평강 공주 덕에 묻어 가고 있는 인생이지요.”
온달의 겸손하고 진솔한 태도에 약장수와 평강은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온달과 평강 공주의 신분을 알게 된 이상, 약장수도 자신에 대해 이름이라도 이야기함이 예의에 맞다 생각하여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성은 독고(獨孤)라 하옵고, 이름은 외자로 선(善)이라 합니다.”
온달은 약장수가 성을 지녔고, 그 성이 또한 처음 듣는 성이라 놀랐다.
하지만 평강 공주는 독고란 성이 수나라 황후와 같은 성이며 선비족과 연나라에서부터 북주에 이르기까지 지배 계급을 이루던 성임을 알고 있기에, 온달과 다른 의미에서 적지 않게 놀라 약장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성을 지닌 분이시군요. 신분이 높으신 분 같은데, 어찌 고약을 팔고 계시온지요?”
온달이 약장수에게 대뜸 사정을 묻자, 약장수는 여전히 미소를 담고 답하였다.
“부친께옵선 갈 곳 없는 망국의 백성은 그저 죽은 듯 선(善)하게 살아야 한다 하시며, 제게 선(善)이란 이름을 다시 내려 주셨지요.”
약장수가 말을 이어 갔다.
“저희 일가는 대대로 연나라에서부터 북주에 이루기까지 그들 나라를 섬겼고, 제 선조들은 연나라와 중원이 맞닿는 곳을 지키던 변방의 무장들이셨습니다.”
“…….”
“지금은 목숨이나 부지하기 위해 요동으로 넘어와 고약이나 파는 신세이오나, 북주의 황위를 양견이 찬탈한 이후 부친이 다시 내려주신 이름대로 선(善)하게 살고자 노력만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더는 깊게 내력을 묻지 않고 온달이 고개만 끄덕일 때, 막바우가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독고선을 졸랐다.
“아하! 중원과 맞닿은 곳에 사셨구나. 그런데 중국이 중원 아니오? 연나라도 중국에 땅을 차지한 나라로 아는데, 그럼 도대체 중원은 어디요?”
온달과 경우도 막바우의 말을 듣고 보니, 중원이란 곳이 어딜 이야기하는 곳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구분하지 않고 중국을 중원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중원이란 곳은 사실 고구려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지역이지요.”
“아니 그게 정말이오? 중국을 중원이라 칭하는 것이 아니었군. 그래 중원은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이오?”
막바우가 재차 묻자, 독고선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더듬거리며 설명하는 품새가 설명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중원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주나라의 동천에서 시작되지요.”
“은은 뭐고 주는 뭐요?”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막바우인지라, 대답하는 독고선으로선 진땀을 빼야 했다.
“요순 임금은 아시지요?”
“요순은 알지. 삼황오제도 알고. 아무렴.”
“그 요순 임금 시절 이후에 하나라가 생기고, 하나라가 부패하자 은나라가 생기지요. 경국지색 달기가 은나라를 망치자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생겨나지요.”
“아! 달기! 경국지색! 알지. 암! 거 재밌네. 그래 그다음은?”
달기와 경국지색 이야기가 나오자 괜히 신이 난 막바우였다.
“중국엔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큰 강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북에 황하요. 다른 하나는 장강이라고도 불리는 남에 양자강이지요. 둘 다 서장의 설산에서 시작해 흐르지만, 그 끝은 전혀 다른 강이지요.”
난데없이 독고선이 강에 대해 이야기하자 벌써부터 졸리기 시작한 막바우였다.
“서장에서 시작한 황하는 앞서 말했듯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지요. 이 황하는 북쪽 몽고 고원 쪽으로 휙 올라 그곳을 지나며 황토를 몰고 남으로 급격히 꺾여 내려오다가 다시 한 번 꺾여 동으로 흐르지요.”
“그래서 그 강이 왜요?”
“이 꺾여 동으로 흐르는 곳, 그곳에 진나라의 수도이자 진시황의 무덤이 있는 서안(장안)이 있고, 동쪽으로는 멀지 않은 곳에 관문 함곡관이 있습니다. 이 함곡관을 지나면 현재 수나라의 수도 낙양이 나옵니다.”
“아! 낙양!”
“이 낙양을 기준으로 하남성이 번영을 이루고 있습지요. 중원은 바로 이 낙양을 기준으로 하남성 대부분과 산동성, 산서성, 하북성의 일부를 가리켜 말하는 지역입니다.”
독고선의 이야기에 머리가 혼란스러운 막바우가 큰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아니, 거기가 중원이란 곳이오? 그런데 거기를 왜 중원이라 부르게 된 거요?”
“그것이 꽤 오래전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하던 것이니, 해보시오! 지금 이야긴 들어도 모르겠소.”
막바우의 재촉에 독고선은 더욱 더듬거리며 설명하기 시작했고 온달과 경우도 귀를 기울였다.
평강 공주는 사기를 통달했기에, 오히려 독고선보다 더 자세히 아는 이야기라 소녀를 무릎에 앉히고 다정히 이름을 물었다.
“아가, 네 이름이 무엇이니?”
“영(榮)이에요. 독고영. 오빠는 선이고 전 영이에요.”
또랑또랑한 소녀의 대답에 평강 공주가 독고선을 바라보니, 그녀와 눈이 마주친 독고선이 웃으며 말했다.
“제 동생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제 혈육이지요.”
이 말을 마치고 막바우의 재촉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닮았네. 알았으니, 이야기나 계속하쇼.”
“그 옛날 주나라가 장안에 수도를 정하던 시절, 서북 땅 이민족의 침입이 있었고, 주나라는 이를 못 견뎌 수도를 함곡관 너머 낙양으로 옮기지요.”
“…….”
“이후 주나라는 천하의 미치는 힘을 잃게 되고, 주변 제후국들이 득세하게 되지요. 주나라가 떠나고 비워진 장안을 진나라가 수도로 사용하게 됩니다.”
“아! 그 진시황!”
“이때는 아직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이라 당시의 진은 소국이었습니다. 이후 진이 이민족이 살던 파촉을 흡수해 관중 지역인 장안과 그 아래 한중, 파촉을 차지해 대국이 되지요.”
“그렇군요.”
“그리고 주나라가 천도한 낙양을 가운데 두고 주나라보다 더 큰 나라들이 있었지요. 장안의 진을 포함해 서남에는 초, 산동의 제, 북에는 조, 위, 한으로 나누어진 또 다른 진나라가 있었고, 남의 오월과 동북 방면에 연나라가 있었습니다.”
“연나라가 그렇게 오래된 나라요?”
중국 역사 속 선비족의 연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다가 여러 이름으로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는지 모르는 막바우였기에, 연나라가 고구려보다 더 오래되었고 강성했음에 그저 놀라 물었다.
”음, 연은 선비족의 나라로 중국에 땅을 차지했으나, 한족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엄밀히 말하면 이민족의 나라지요. 문화가 한족보다 그리 발전하지 못해 이전의 기록이 없지만, 적어도 주나라보단 더 오래되었다 생각합니다.”
“아, 그렇소? 하긴 고구려도 이전에 고조선이 있으니… 하던 이야기 계속해 주시구려.”
“주나라를 둘러싼 강대국들 이외에 낙양을 중심으로 주나라 근처엔 십여 개의 소국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지금의 한족들을 대표하며 이곳을 바로 중원이라 부르게 되지요.”
“소국?”
막바우는 나름 집중하며 듣고 있었다.
“이들 소국들은 주위를 둘러싼 진을 포함한 강대국들인 제, 초, 오월, 위, 한, 조, 연 등의 나라들이 쉽게 탐을 냈지요. 달리 말하자면, 강대국들이 빙 둘러 싸고 탐을 낸 작은 나라들이 모인 한족의 땅이기에, 중원이라 불리게 된 것이지요.”
“아니, 그럼 좁은 땅에 작은 나라가 득실거리던 그런 곳이 중원이었소? 대단할 것도 없는 곳인데, 왜 중국인들은 중원, 중원 타령인 것이오?”
“그것이 생각해 보면 장안이 중국의 딱 중심이 분명하고 천혜의 요새에다가 관중 지역도 있으니, 더 중요하게 보일 것입니다.”
“음…….”
“그러나 중원이란 곳은 장안 아래 즉 서에 화산, 낙양 인근에 숭상, 그 아래 남에 형산, 동에 태산, 낙양 위 북에 항산 등의 오악(五岳)이 둘러싸고 황하가 그 중심을 흐르는데 바로 이런 지리적 중심을 중원이라 칭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약장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하며 중심이 되고, 그 주변 소국을 모두 정복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며 중원을 평정하면 세상을 지배한단 이야기가 돈 것도 한몫하였고, 역설적으로는 강대국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서로 먹으려 각축을 벌여 중원인 셈이 된 것이지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중원이 참 보잘것없고 작은 지역이었군요.”
“작기는 하나 꽤 중요한 요충지이지요. 물자도 풍부하고. 그렇기에 현재도 낙양이 수나라의 수도이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런데 이 중원에 수도를 정하면 오래 못 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방비가 쉽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수나라의 수도로 낙양은 그리 오래 못 가지 싶습니다.”
듣고 보니 독고선 말이 그럴듯해 지루해하던 막바우가 급히 하품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별거 없구먼.”
이야기의 본질과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막바우에게 웃으며 독고선이 계속 말을 이었다.
“객잔 밖에서, 중원에 대한 증오로 저를 공격한 상이란 젊은 공자는 꼬아 만든 금귀고리와 범과 이리를 금실로 수놓은 문양으로 짐작하건대, 연의 왕 성 모용 씨가 분명합니다.”
“…….”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현재 수의 황제는 저희 독고 씨나, 모용 씨와 같은 선비족 출신이라 들었는데, 그가 중원을 차지하며 모용 씨 일족과 대립한 것이 있나 봅니다.”
이 부분은 평강 공주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부분인지라 독고선의 이야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 어린놈이 수의 양견에게 쫓겨나서 중원에 원한이 단단한 게로군. 그런데 독고 형은 그 봉술을 중원 무림에서 배운 것이오?”
“하하하, 어릴 적, 숭산에서 잠시 수련은 하였으나, 창법은 그곳에서 배운 것이 아니옵니다. 제 내력을 말할 수 없어 중원 무림의 봉술이라 했으나, 실상은 저희 가문 대대로 내려온 가전비기, 가전무술입니다.”
“아…….”
“한 때 독고창법이라 불렸다는데, 제 실력이 보잘것없어 내세울 것이 못 됩니다.”
“아니던데, 거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게 창술 좀 가르쳐 주시오. 상당히 요긴해 보이더만.”
독고 일가의 가전무술을 가르쳐 달라 조르는 막바우가 한심해 경우가 한 마디 쏘아 붙이려 할 때 독고선이 웃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보잘것없는 이 창법은 일가가 아니면 가르쳐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시고 스스로 익히시는 것은 괜찮겠지요. 제가 동생 영이에게 매일 아침마다 창법을 가르치는데, 그때 보시고 필요한 부분은 익히셔도 좋을 듯합니다.”
어떤 연유인지 독고선은 막바우의 무례한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