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
“단 사부, 우리 상(霜)이 괜찮은가요? 괜한 말썽 피우지 않게 객잔 안으로 데려오세요.”
따사로운 봄바람이 몸을 감싸듯 이 층 객잔 창을 통해 흘러나오는 여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흰 수염의 노인에게 전한 그녀의 목소리에 취한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위를 향했다.
그러나 한눈에도 지체가 높아 보이는 외모에 군중들은 감히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힐끔힐끔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 자들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상(霜) 공자께 무례를 범한 자들이온데…….”
아직 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는 막바우와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약장수를 이르는 말이었다.
노인이 상 공자라 지칭한 청색 도포의 사내는 흑의 사내 중 한 명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절뚝거리며 객잔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굴엔 여전히 수치와 분노가 가득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상(霜)이라 불린 청색 도포의 사내와 이 층 여인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것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외모와 분위기가 무척 닮은 두 사람은 남매 사이로 생각되었다.
노인의 물음에 여인은 망설임 없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관상을 보니, 그들은 꽤 오래 사네요. 오늘 죽을 운명은 아니니, 우리 상이의 말대로 약장수는 혀를 뽑고 감히 우리 상이의 손목을 잡은 저 더벅머리는 오른손을 자르세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맑고 고운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사람들의 귓전에 흘렀다.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음색과 다른 냉혹한 지시에 자신들이 잘못 들었다 생각하며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네, 존명(尊命). 이 늙은이 설(雪) 공녀님의 명을 받습니다.”
온달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잘못 들었다 생각하던 차에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의 차가운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어 급히 소리쳤다.
“아니, 이 무슨 소리요?”
온달의 묵직한 외침에 이 층 객잔의 연태조(蓮胎祚)와 젊은 여인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도 바닥에 쓰러진 막바우의 가슴에 발을 올린 채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중년의 연태조(蓮胎祚)란 사내는 곁에 서 있는 스물 남짓한 여인과 조금도 닮지 않고 얼굴선이 굵어 혈육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크고 검은 눈동자가 온달을 위아래로 훑다가 온달의 뒤, 말 위에 앉은 평강 공주에게서 시선이 멈추고는 낮게 코웃음 쳤다.
‘태왕의 금지옥엽이로군. 오부의 귀족 목 씨를 마다하고 찾아간 것이 저 성도 없는 온달이란 자인가? 기골이 장대한 무골이지만, 오부의 귀족들이 받아 주지 않는 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연태조의 시선을 느낀 평강도 고개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자 서로 고개 숙여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연태조(蓮胎祚)의 부친은 연자유(淵子遊)란 자로 고구려의 재상(宰相) 대대로(大對盧)를 지낸 인물이었고, 연태조 그 역시도 젊은 나이로 대대로를 지낸 바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재상 대대로는 태왕이 임명하지 않고 오부의 귀족들이 제가 회의에서 삼 년마다 선출하였다.
연태조의 경우는 부친 연자유의 후광 덕에 서른 후반 젊은 나이에 대대로를 역임하고 지금은 잠시 쉬던 중으로, 대대로는 다른 관직과 달리 삼 년이란 임기가 정해져 있고 연임이 되지 않아 다시 대대로에 오르기 위해선 적어도 삼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오부의 귀족들이 선출하는 방식이라 자식에게 직위를 세습할 수 없어 은연중에 권력 견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향후 태어날 그의 아들 연개소문은 세습 가능하고 임기 제한 없는 대막리지란 직책을 만들어 스스로 권좌에 오르게 된다.
‘단 사부의 완력도 대단하니, 어디 온달의 신력이 얼마나 훌륭한지 구경이나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연태조의 곁에서 온달을 내려다보던 여인은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온달의 외침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노인에게 돌리며 부드럽게 말하여 온달을 더욱 자극했다.
“사람들이 무척 놀라고 있으니, 더 혼란스럽지 않도록 속히 시행하세요.”
온달의 제지에도 오히려 재촉하는 여인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여인의 명을 받은 노인이 고개를 숙여 답한 후, 자신의 발아래 숨을 헐떡이는 막바우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오른손엔 어느새 등에 멘 박도가 뽑혀 들려 있었다.
찌르고 베는 무기는 검(劍)과 도(刀)가 대표적인데, ‘검’은 검신이 곧고 양쪽에 날이 있으며 ‘도’는 칼신이 휘어지고 한쪽에만 날이 있는 것을 말한다.
통칭 ‘도검’으로 불리는 이 병기들은 재료나 크기, 사용처와 모양에 따라 나뉜다.
장도(장검), 대도(대검), 단도(단검), 비수(匕首), 수리검(手裏劍).
고구려 군에서 사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환도(環刀) 혹은 환도대검, 허리에 차는 패검(佩劍).
여자들이 장식용으로 옷고름에 차는 은장도, 무녀들이 춤출 때 드는 무검 등과 이 밖에도 박도(博刀), 강(綱), 참마도(斬馬刀), 예도(銳刀) 등 다양한 도의 종류가 있었다.
노인이 등에서 뽑아 든 박도는 날이 비정상적으로 넓고 무거운 도로, 육중한 무게로 내려치는 공격이 가능하여 적의 방어구를 박살내고 깊은 내상을 입힐 수 있었다.
이 박도는 적의 진영을 무너뜨리는 돌격용으로 많이 사용되며 돌진하여 일시에 기세를 꺾고 일격을 노리는 병기였다.
일반적인 도에 비해 매우 무겁기 때문에 이 박도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강한 완력이 필요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손으로 단단히 쥐고 사용하였다.
노인은 이 육중한 박도를 한 손에 쥐어 가벼이 다루니, 그의 완력이 범상치 않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당장 멈추시오!”
온달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마음이 급해 몸을 날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노인과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고, 조금 전 막바우를 도왔던 약장수도 주위를 둘러싼 흑의 사내들의 칼에 막혀 막바우를 돕기 어려워 보였다.
온달의 외침을 듣고도 노인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노인은 입가에 비웃음만 담은 채 막바우의 오른손을 쥐고 박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시퍼런 날보다, 육중한 박도의 무게가 휘두르는 사람의 힘까지 더해, 기세를 타고 막바우의 손목을 내리칠 경우 단번에 뼈까지 잘라낼 것만 같았다.
약장수는 자신을 돕다가 험한 꼴을 당하게 된 막바우가 염려되어 구하고자 발을 내디뎠으나, 자신을 향해 겨눈 흑의 사내들의 칼끝에 멈춰서야 했다.
‘별수 없구나. 피를 볼 수밖에.’
불가피하게 싸움을 벌여야 함을 깨닫고 봉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봉 끝을 앞으로 살짝 뻗어 흑의 사내들의 칼과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단숨에 이들을 재끼고 저 노인에게 타격을 입혀야만 저자를 구할 수 있다.’
이런 생각 중에도 노인은 뿌리치려는 막바우의 오른손을 거칠게 잡아 올리고 있었다.
“이 손 놔! 이 늙은이야!’
겨우 숨을 고른 막바우가 노인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으나, 노인은 비웃기만 할 뿐이다.
“그래, 나 늙은이다. 그런데 넌 이제 외팔이가 될 거고. 외팔이보다 늙은이가 낫지. 아무렴.’
노인의 빈정거림에 막바우의 얼굴이 벌게져 노인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
약장수가 흑의 사내들을 향해 봉을 휘두르려 할 때, 막바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려 달려가던 온달의 귓전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소리는 온달의 앞을 곧장 날아 박도를 휘두르려던 노인의 상투를 묶은 천을 찢고 그대로 계속 날아 굵은 나무에 박혔다.
“온달님께서 멈추라 하지 않았느냐!”
경우의 목소리였다,
온달이 고개 돌려 보니 평강 공주의 옆에서 말 위에 앉은 경우가 활에 화살을 다시 단단히 먹여 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경우가 쏜 화살에 상투를 동여맨 천이 찢겨 날아간 노인은 길고 하얀 머리가 산발되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노인이 막바우의 오른손을 쥔 왼손을 풀고, 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허리를 곧게 펴고는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경우를 노려보았다.
노인의 깊게 패인 눈에서 안광이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이, 시건방진…….”
“누구든 움직이면 내 활이 눈을 파버릴 것이다! 막바우 빨리 일어나라!”
노인의 매서운 눈매에 지지 않고 경우가 도리어 더 큰 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자신을 밟고 있는 노인의 발을 간신히 치운 막바우가 네발로 기둣 몸을 놀려 노인의 곁을 급히 벗어났다.
그리고는 땅을 짚고 일어서고는 곧장 소녀의 곁에 두고 온 온달의 운철 대검을 향해 달려갔다.
막바우가 위기를 벗어난 것에 온달과 약장수는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아직도 험악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노인과 흑의 사내들을 상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단 사부!”
이 층 객잔의 창가에서 연태조가 굵직한 음성으로 노인을 불렀다.
큰 소리 내어 외치지 않았음에도 웅후한 소리에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한발 물러서게 할 정도로 위엄이 있었다.
노인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살기 가득한 눈을 올려 연태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대가 상 공자의 체면과 설 공녀의 명을 중히 여겨 반드시 따라야 함을 내 익히 잘 알고 있으나, 단 사부 당신이 상대하는 이 중 한 분은 내가 무척 잘 아는 분이니, 내 얼굴을 봐서 오늘 이 순간은 참아주지 않겠소?”
“…….”
“다른 날, 다른 곳에서 그대가 이 일을 다시 따지기 위해 저들을 상대한다 해도 그땐 내가 관여치 않겠소이다. 어떻소?”
노인이 입을 실룩거리며 불만에 찬 표정으로 답하려 할 때, 연태조의 곁에 선 여인이 곱게 그를 불러 막았다.
“그렇게 하세요. 단 사부, 어차피 이들은 오늘 죽지 않는 자들이에요. 한 사람을 제하고는 모두 수명도 참 길고요. 그만 올라오세요. 오늘 일은 다음에 하면 됩니다. 새털처럼 많은 날이 숱하게 남았잖아요.”
여인의 말은 곱고 부드러웠으나, 손목을 자르고 혀를 뽑는 그런 일은 오늘 하지 않아도 다음에 하면 된다는 뜻이니, 가냘프고 아름다운 외모에 비해 심성이 무척 악랄했다.
여인의 말에 온달이 어이없어 빠지려 할 때, 평강 공주가 먼저 입을 열어 연태조에게 감사를 표했다.
“대대로께서 저를 기억하시어 체면을 지켜 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공주께옵선 낙랑으로 가시는 길이신가 보군요. 객잔이 좁아 함께 계시기 껄끄러울 듯하니, 저희가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연태조가 언제 싸움 벌일지 모를 이들과 평강 공주가 객잔에 함께 머물기 껄끄러움을 염려해 말했다.
굵직한 목소리와 달리 의외로 섬세히 배려하자, 평강도 고개 숙여 답했다.
대화를 마친 연태조는 창문을 닫고는 곁에선 여인에게 물었다.
“한 사람을 제하고 모두 수명이 길다 하였는데, 수명이 짧은 이가 누구더냐?”
연태조의 물음에 여인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제가 이야기하던 순서에서 이미 느끼신 바가 있으셨기에 확인 차 물으시는 것 아니시옵니까?”
“말이 길다. 어서 답하거라!”
“수명이 짧은 이는 온달이옵고, 향후 오 년 뒤 세상에 그는 없습니다.”
타인의 죽음을 웃으며 말하는 여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연태조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다른 이들처럼 애써 반대할 필요가 없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