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7화 (17/328)

017화 허황된 중원의 무술 (1)

자신도 데려가 달라 조르는 막바우의 모습이 왠지 정감이 가는 온달이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경우는 실눈을 뜨고 막바우의 몰골을 살피더니 긴 한숨 한 번 내쉬고는 온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난밤 미친 곰부터 이리 떼까지 상대하느라 다들 행색이 말이 아니구나. 그나마 온달님은 공주께서 잘 차려 입히셔서 그리 흉하진 않으나, 이 막바우란 사내는 머리까지 풀어재낀 게 꼭 전쟁통에 피난 가는 난민 행색이다. 비렁뱅이도 이런 비렁뱅이가 없구나.’

급히 떠나느라 모두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제대로 피도 닦지 못한 상태였다.

근접전을 펼치지 않은 경우를 제한 온달과 양만춘, 막바우의 몰골은 피를 뒤집어쓰고 군데군데 옷이 찢어져 있었는데, 그중 막바우의 몰골이 가장 참담했다.

평소 입던 옷 자체가 누더기를 기운 옷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성주께선 성에 돌아가시면 온달님과 이 막바우란 자가 입을 옷도 마련해 오십시오. 저흰 객잔에서 씻고 상처를 치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긁히고 물린 곳이 꽤 여러 군데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기에 하루 묵으며 경우가 이들을 치료해도 충분했다.

“아, 그래. 그게 좋겠군. 내 빨리 다녀오겠소. 그럼 공주님과 온달님께옵선 경우를 따라 객잔에서 잠시 쉬고 계십시오.”

양만춘이 경우의 말에 답하고 온달과 평강 공주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한 후,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잠시 후, 평강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아 막바우에게 말했다.

“그만 일어나시게. 우리도 어서 저 고개를 넘어 객잔에서 쉬어야 하지 않겠나.”

평강도 산을 내려가 마을에 도착하면 온달에게 미리 준비해 온 옷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경우가 먼저 양만춘에게 이야기하니 생각 깊은 경우가 기특해 웃은 것이다.

공주의 자상한 말에 막바우가 뛰어오르듯 일어나 온달에게 손을 내밀더니, 어리둥절해 멍하니 바라보는 온달에게서 운철 대검을 빼앗듯 받아 자신의 어깨에 메고는 앞장서 걸어 나갔다.

“나도 길 아니, 제 뒤를 잘 따라들 오십시오. 어서 가시죠.”

막바우가 앞에서 걷고 그 뒤를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따르며 그렇게 산을 올랐다.

요동반도를 서에서 동으로 가르는 천산 산맥은 높지는 않았으나, 산세가 험하고 동쪽으로 갈수록 더욱 높고 험했다.

이 천산 산맥을 앞뒤로 남과 북에 숱한 고구려의 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쪽 끝 해안과 맞닿은 절벽에 자리하려 고구려의 해군 기지 역할을 담당하는 비사성부터 시작해, 천산 산맥을 기준으로 산맥 아래 남쪽으로는 독산성, 적리성, 낭랑산상, 오골성,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등이 있었다.

그리고 산맥의 위 북쪽 방향으로 건안성, 안시성, 요동성, 백암성, 개모성, 석태자산성, 신성, 최진보산성, 성자산산성 등이 늘어서 고구려의 북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요하가 흐르고 있었고 서쪽으로 요택이 펼쳐져 있었다.

황하를 요수로 부르던 이전 시대와 달리, 서장에서 시작해 몽고 고원을 지나 다시 남으로 꺾여 서안에서 동으로 흘러 산동의 바다와 만나는 대륙에 요동치듯 굽고 긴 황하와 고구려의 영토를 표시하듯, 선 그어 요동벌에 흐르는 요하가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황하를 요수라 부르던 시대의 진시황이 황하의 북동 방면을 막연히 요동이라 부르던 것과 달리 지리적 이해와 개념이 보다 명확했다.

이들 성들은 고구려의 북방을 지키는 성이자, 중국을 통칭하는 중원의 모든 지역과 비교해 철과 말이 매우 풍부했다.

또한 산과 들이 만나는 곳부터 시작된 광활한 평야는 곡창지대로 고구려 발전에 근간을 이루는 지역이었다.

이곳의 성 중 고구려의 곡창지대이자 드넓은 요동벌의 관문인 요동성은 평지에 자리했다.

그 옛날 중국의 후한 말 기마민족인 선비족 출신 공손찬의 일가 공손 씨가 세운 성으로 고구려의 다른 성과 축조 방식이 달랐다.

여기에 고구려만의 축조 방식이 결합해 적을 막아내기 용이한 굽은 입구와 해자, 치 등이 보강되어 요동벌을 지키는 중심이 되었다.

이 성의 동쪽에 자리한 신성은 앞뒤로 평야와 산맥을 두고 있어 고구려 태왕들이 즐겨 사냥을 하는 곳이었다.

이 신성 부근이 이번 낙랑 사냥 대회가 진행되는 곳으로 서부총관 강이식과 부총관 을지문덕이 사냥 대회를 관장하고 있었다.

천산산맥은 압록강 이남에 펼쳐진 높은 산맥들에 비해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산세가 험하고 북으론 요동벌을 남으론 압록강과 두만강을 서로는 요하, 동으로는 깊고 푸른 동해와 닿고 있었기에, 고구려의 북방을 지키는 천혜의 방벽이자 요새였다.

온달은 산세가 험해 죽죽 미끄러진다 하여 죽령이라 불리게 된 소백산맥 산골 출신이었기에, 천산 산맥 줄기의 낮은 산들이 험하다 해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평강 공주만이 흔들리는 말 위에서 몹시 지쳐 보였으나.

조금도 다른 이에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넘는 내내 온달과 경우에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네곤 했다.

고갯길이 바위가 많아 험하긴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높지 않은 덕에 해가 머리 위에 충분히 남은 상태에서 고개 너머 객잔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층으로 된 꽤 큰 객잔 앞으로 길이 쭉 뻗어 상당히 큰 마을과 이어져 있었고, 객잔 앞엔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 객잔부터 시작해 북으론 모두 벌판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요동성이고 그곳에서 더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신성이 나오지요. 이번 사냥 대회는 요동성과 신성 사이 산과 들이 만나는 곳에서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말 위에서 손으로 여러 방위를 가리키며 경우가 평강 공주에게 설명했다.

비록 남장을 했어도 경우는 여인이었기에, 온달보다 공주가 편한 모양이었다.

평강 역시, 경우가 남장 여인임을 알고 있기에 전혀 불편한 마음 없이 그녀와 이야기를 잘 나누었다.

“이 객잔 앞에 길이 잘 닦여 있는 것이 남북과 동서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군요.”

평강의 눈썰미에 참으로 영리한 여인이라 생각하며 경우가 공손히 답했다.

“이 마을 서쪽으로 소금이 나오는 작은 평야가 있습니다. 그 크기가 크진 않아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지역에선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중국과 돌궐, 거란 상인은 물론이요.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몽고인들까지 들리는 곳입니다.”

“음…….”

“그렇기에 예로부터 연나라와 그 소금이 펼쳐진 땅을 두고 꽤 오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요. 지금은 연나라가 수나라에 의해 사라진 터라 우리 고구려와 감히 정면으로 대놓고 맞서 거스르는 이가 없어 꽤나 흥한 곳이 되고 있습니다.”

경우의 말대로 숱한 세월 고구려와 대치하던 연나라가 후연과 북주로 바뀐 뒤 끝내 사라진 후 이 지역에선 거란과 돌궐이 간혹 말썽을 부리긴 했으나,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이진 않고 있었다.

그들 민족은 남쪽의 진나라마저 정복하여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행보가 언제 만리장성 북으로 향할지 온 신경을 집중해 힘을 쌓고 있던 터라, 작은 소금 평야 따위는 중요치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의 왕실과 중앙 귀족 역시, 수나라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낙랑 사냥 대회를 진행하는 것은 그 위세를 주변에 보이기 위함이었다.

사실 기마민족의 사냥 대회는 적을 쫓고 몰아 섬멸하는 기마 전술 훈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 잘하네.”

어느새 막바우가 군중들이 구경하는 곳을 비집고 들어가더니 신이나 크게 소리쳤다.

말 위에서 온달이 내려다보니, 긴 봉을 지닌 젊은 사내가 웃통을 벗어 재끼고 봉술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서너 살 남짓 돼 보이는 소녀가 고약을 돗자리에 내려놓고 앉아 있었다.

사내는 봉술을 선보여 사람을 모으고 어린 소녀가 고약을 파는 모양이다.

봉술 시범을 보이는 고약 장수 사내는 어딘지 낯선 복장이었다.

상투를 틀지 않고 긴 머리를 검은 천으로 묶은 모양새가 삼한인 같아 보이진 않았다.

삼한인은 막바우처럼 봉두난발한 경우도 있으나, 단정히 상투를 틀어 올리는 것이 다른 이민족들과의 차이점이었기에, 사내의 행색이 온달의 눈에 쏙 들어온 것이다.

죽령 지역에선 삼한인 이외에 이민족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여러 민족의 왕래를 당연시 여기는 이곳의 다른 이들과 달리 온달이 유독 신기해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봉이 뱀처럼, 화살처럼, 혹은 돌개바람을 일으키는 용처럼 현란히 움직이며 웃통을 벗어 재낀 탄탄한 사내의 근육도 함께 꿈틀거리는 모습이 꽤 볼 만했다.

“백여 년 전, 숭산에 터를 세운 소림사에 천축국에서 달마 대사가 칠십여 년 전쯤 오신 뒤로, 중원의 무예는 다른 나라와 달라 내공과 외공이란 구분이 생겼습니다.”

봉술을 선보이는 사내가 흥을 돋구기 시작했다.

“내공을 수십 년간 깊이 쌓으면 절벽을 날아오르고, 말보다 빨리 달리며, 검에선 검기가 일어 십여 장 밖까지 뻗어 적의 목을 뚫습니다. 장법도 심오해 손바닥에서 바람이 일고, 손가락 끝에서 한 줄기 기운이 화살처럼 일지요.”

봉술을 선보이는 사내가 사람들을 재밌게 하기 위해 공연히 허풍스런 말까지 하며 봉을 휘둘렀다.

“이것이 일양지란 것이온대, 허공섭물과 탄지신통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이 휘어졌다 펴지고, 팽그르르 도는 그 모습이 신기에 가까워 저절로 사내의 이야기에 온달도 빠져들었다.

“옛끼! 여보슈! 손가락에서 빛이 나가고, 사람이 어찌 절벽을 오르오? 에이, 너무 말이 과하시오.”

“그러게, 사람이 수십 년 수련해 봐야 나이 먹으면 노인이 되어 허리도 안 펴질 텐데, 과장이 너무 심하구먼.”

봉술을 선보이는 사내에게 구경하는 이들 중 중늙은이 한 명이 빈정거리자, 곁에선 또 다른 중늙은이가 다시 말을 받았다.

구경하던 이들은 이 두 중늙은이의 허리가 구부정한 모습에 박장대소하며 봉술을 선보이는 사내를 향해 저마다 소리쳤다.

“그러게, 그렇게 신통한 재주가 있으면 장군, 대장군이 되어 전장을 누빌 터인데, 전쟁에서 장풍 쏘고 검기 날린단 소리 못 들어 봤소.”

“맞아! 나도 못 들어 봤다. 도대체 그런 인물들은 어디 있는 게요? 신선이오?”

“그래, 그 고약 붙이면 내공이 쌓이는 거요? 하하하.”

잘 구경하다가 괜히 훼방 놓는 이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덩달아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말문이 막힌 사내의 얼굴이 벌게졌으나, 꿋꿋이 봉술을 선보이며 답했다.

“무예를 수련하며 내공을 쌓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정갈하기에 입신양명과 사리사욕을 위해 피 튀는 전장을 찾지 않습니다.”

“…….”

“이 고약은 그런 맥락으로 제 스승께옵서 내공 수련을 하시며 몸에 쌓인 나쁜 독소를 뽑기 위해 만드신 것으로, 몸에 흔히 난 더러운 종기를 감쪽같이 없애고, 몸의 기혈이 잘 돌게 합니다. 몇 개 없으니 서두르십시오.”

말을 길게 하면서도 사내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봉 끝도 흔들림 없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스승을 두고 무예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온달이었으나, 스스로 운철 대검을 들고 산과 들에서 수련하였기에, 몸을 빨리 놀리면서도 호흡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내공이란 것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저리 봉을 빨리 움직이면서도 거친 숨 한 번 내뱉지 않으니 참으로 대단하구나.”

사내의 봉술에 감탄한 온달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온달의 굵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빈정거리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내리자, 사람들이 일제히 등을 돌려 온달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운철 대검은 누더기를 걸쳐 입은 막바우가 짊어지고 있었고, 그런 막바우를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눈에 온달은 그저 이 지역에서 흔히 보는 말 탄 건장한 사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꽤 큰 사람이네. 활을 멘 품새가 사냥 대회를 가는 길인가 보네. 그런데 행색이 어디서 돼지라도 잡다가 온 거야?”

“그러게, 옷이 찢어지고 피로 얼룩졌네.”

여기저기 옷이 찢긴 궁색한 온달의 행색에 고개 돌렸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곤 이내 다시 고개 돌려 봉술을 구경하였다.

“어서 들어가 쉬셔야겠습니다.”

평강이 뻘줌해진 온달에게 웃으며 말했다.

온달이 머리를 긁적이며 공주의 말을 따르려던 그때였다.

객잔의 이 층에서 누군가 머리를 내밀고 봉술 시범을 보이는 사내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

“당신 스승이 그 신묘하단 내공을 수련한다니, 당신도 할 수 있겠군요. 어디 구경 좀 해봅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