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함께 가는 낙랑 사냥 대회 (2)
‘누군데 저리 놀라는 거지?’
양만춘의 이름을 듣자마자 평강 공주와 촌장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눈치 빠른 막바우는 도대체 저들이 누구길래 이리도 놀라는지 궁금해졌다.
옆을 슬쩍 보니 온달도 자신과 별 차이 없이 이들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온달님도 저들이 누군지 아직 모르시죠?”
막바우가 대놓고 온달에게 묻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모였다.
“나야 식견이 부족하니, 이름만으로 알 수가 없지요.”
온달은 막바우의 물음에 전혀 무안해하지 않고 솔직히 말했고, 막바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름만 들어서 뭐 하는 사람인지 어찌 아시겠습니까. 두 분 뉘시오?”
이번엔 막바우가 대뜸 양만춘에게 묻자, 오히려 촌장이 당황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막바우 자넨, 어서 사람들 모아 곰과 이리를 옮겨 오게나. 산에 오래 두면 피 냄새에 잡다한 것들이 몰릴 게야. 어서 서두르게.”
촌장의 엄한 지시에 양만춘과 경우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막바우가 투덜거리며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양만춘이 송구한 표정으로 온달에게 자신의 신분을 고하고 먼저 밝히지 못함을 용서를 구했다.
“안시성의 젊은 성주님이셨군요. 눈이 있어도 배움이 부족해 알아보지 못한 저의 죄가 크지요. 평소 귀한 분을 뵌 일이 적어 산속에서 성주를 만났으리라 생각 못 했습니다.”
온달이 오히려 용서를 구하자, 양만춘은 더욱 미안해하며 온달의 인품에 반했다.
‘참으로 그릇이 남다르시구나. 과연 부마로서 부족함이 없으시다.’
평강 공주와 혼례를 치렀다 해도 평원 태왕의 허락이 없었고, 중앙 귀족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음에 온달은 아직 부마의 지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정이 자질구레히 따짐을 싫어하는 양만춘은 온달을 부마로 인정하고 있었다.
비록 온달이 평민 출신이라 해도 그에겐 중요치 않았다.
그렇기에 한낱 변방의 작은 성주 따위인 자신을 크게 존중해 주며 작은 속임이라도 대범히 따지지 않는 온달의 성품에 매료된 것이다.
양만춘의 곁에 앉아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던 경우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가며 둥글고 큰 눈이 반짝였다.
아마도 뭔 기분 좋은 생각이 든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경우의 고운 음성이 차분하게 방안에 흘렀다.
아직 경우가 여인임을 모르는 온달로선 경우의 청아한 음색이 사내치곤 너무도 맑다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온달님과 평강 공주님, 두 분께옵선 낙랑의 사냥 대회를 참여하시기 위해 가시던 길이시지요?”
“그렇소이다. 초행길이라 지리를 잘 몰라 여쭙습니다. 삼월 삼일까지 열흘 정도 남았으니 늦지는 않겠지요?”
양만춘과 경우가 이 지역 토박이임을 믿고 온달이 묻자, 경우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결코 늦지 않으실 겁니다. 산을 내려가면 걸어서 삼 일 정도 거리인 데다가 저와 성주님께옵서 귀인들을 모시고 함께할 터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되십니다.”
그녀가 또박또박 한 마디 한 마디 전했다.
온달은 함께 낙랑 사냥 대회를 간다는 말에 놀라 부리부리한 눈을 더욱 크게 떴고, 양만춘도 놀라 경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이 친구가 뭔 생각인 것이지?’
자신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경우가 갑작스레 온달에게 제안하여 놀라긴 했지만, 양만춘은 결코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경우의 속은 알 수 없으나, 비록 여인이라 할지라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며 보아 왔기에 단지 충동적으로 제안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갑내기 양만춘과 경우는 남녀 사이를 떠나 무한 신뢰를 지닌 둘도 없는 그런 벗이었다.
뜻밖의 제안에 놀라는 온달이나 양만춘과 달리 평강 공주는 경우의 속내를 깨닫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인의 정치 수완이 보통은 아니구나.’
양만춘이 부친의 뒤를 이어 안시성 성주의 지위에 있다 하여도 중앙 오부의 귀족에 비하면 그 세가 미약하였고, 연이 닿은 오부의 귀족도 없는지라 중앙에 진출할 방법이 전무했다.
안시성 성주로 만족하는 양만춘은 더 높은 곳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아끼는 경우로선 양만춘이 태왕의 사위와 공주를 친구로 삼을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신분을 끝까지 속였다면 모를까, 양만춘이 안시성 성주임을 밝힌 이상 이들과 친구가 되지 못함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차 버리는 일이야. 온달이 비록 평민이라 귀족들이 반대한다 한들 태왕과 태자는 결코 공주를 버리지 않을 것이야.’
그렇게 생각한 경우는 말을 하기 앞서 또 다시 떠오르는 생각에 잠겼다.
‘온달이 낙랑 사냥 대회에서 두각을 내지 못해도 그가 거대한 운철 대검과 철궁을 가벼이 다루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상당히 인상 깊을 것이 분명하여, 조만간 태왕에게 부마로 인정받음은 이 사냥 대회가 아니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 당연해.’
생각할수록 미소가 절로 번졌다.
‘우리가 그를 도와 사냥 대회에서 부각시킨다면 안시성 성주는 부마를 처음 인정한 귀족이 된다. 그것도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부마를… 온달은 곧 정치적으로 이 고구려의 핵심이 될 것이야.’
“안시성 성주께옵선 다스려야 할 곳이 계신 분이시온데 어찌 저와 함께 낙랑 사냥 대회까지 동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부족해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부담 갖지 마시옵고 감사히 마음만 받습니다.”
온달이 정중히 거절하자, 평강 공주는 과연 경우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 그녀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온달의 거절에도 경우의 눈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태왕의 금지옥엽 공주와 부마께서 사냥 대회에 참여하시는데 모시고 가는 이와 시중드는 이 하나 없다면 태왕의 위엄이 작은 티만큼이라도 손상되올까 심히 염려됩니다.”
“그, 그렇소?”
“그러하기에 중앙 오부의 귀족들과 비교해 두 분의 행렬이 비슷하지는 않더라도 많이 차이 남은 우리 대고구려의 위상과도 관계되는 일이 오라, 감히 부족하오나 안시성 성주가 두 분을 모시고 안시성 궁노수 수장 대식의 자식인 제가 시중을 들려 청하는 것이 옵니다.”
“아…….”
“부디 부족하다 내치지 마시옵고 대고구려의 위상과 태왕의 위엄을 생각하시어 모시게 하여 주시옵소서.”
양만춘은 사전에 경우와 의논하진 않았으나,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들이 온달과 평강 공주를 모시고 사냥 대회에 가는 것이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온달께서 구 척이나 되는 운철 대검을 다루시고 쇠로 된 철궁을 가벼이 당기시어, 그러한 것들이 위풍당당하고 뭇사람 중에 돋보이게 하는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말과 몰이사냥에 익숙한 귀족들과 겨루어 두각을 보이기란 쉽지 않으실 것이다.’
양만춘은 짧은 시간이지만, 계속해서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보니 정식으로 무예를 익히지 않아 힘으로만 검을 다루시던데 근접에서 짐승을 상대로는 부족함이 없으나, 말을 타고 하는 몰이사냥은 또 다른 일이다. 아마도 경우가 여기까지 생각해 돕고자 하는 모양이구나. 역시 경우는 사람을 대함에 사려 깊고 진정이 있구나.’
경우의 의도를 모두 이해하진 못했으나, 그녀가 낙랑 사냥 대회에 온달과 평강을 모시고 가자는 제안에 동의하는 양만춘이었다.
“이 친구 경우의 말이 옳습니다. 부족하오나 두 분을 모시게 해주십시오.”
양만춘은 잠시 침을 삼킨 뒤, 말을 덧붙였다.
“저는 이 산 아래 객잔에 말을 메어 두었으니, 내려가 말을 몰아 안시성에 잠시 들린 후 곧바로 두 분과 경우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성의 일은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 잠시 부탁하면 되오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이를 어쩐다. 어쩌면 좋겠소?”
양만춘의 진중한 목소리가 더해지자 온달도 마냥 거절하기 어려워 평강 공주를 바라보았다.
‘우리 온달 장군님이나 저 양만춘 성주는 사람이 바르고 의심할 줄 모르니, 저 경우란 여인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쉽게 속일 수 있겠구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저 여인의 마음이 욕심은 많지만 악하지 않아 다행이다.’
경우와 눈을 잠시 마주한 평강이 고개 돌려 온달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답했다.
“이분들의 마음이 이토록 깊고 고마운데 마냥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함께 하시면 큰 힘이 되시리라 생각되오니, 이 또한 좋은 일이지요.”
평강마저 동행을 원하자, 온달도 양만춘과 경우에게 감사를 표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앙의 귀족들은 우리 장군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야. 이번 사냥 대회에서 깊은 인상을 줄 순 있어도 우승까지는 어려울 터이고. 차라리 잘 되었어.’
그렇게 결심한 평강 공주에 머릿속에 계속해서 생각이 떠올랐다.
‘작은 성이지만 안시성 성주가 함께한다면 오부의 귀족 세력과 닿지 않는 귀족들 중에서 우리 장군님을 부마로 지지하는 이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게야. 낙랑 사냥 대회에 도착하면 강이식 장군과 을지문덕 공부터 만나보도록 하자. 분명 양만춘과 더불어 우리 장군님께 큰 힘이 될 것이야.’
평강은 그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경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왕 결정된 일이니 서두름이 좋겠습니다. 낙랑 사냥 대회에 앞서 만나야 할 이들도 있고 성주님께서도 안시성을 다녀오셔야 하시니.”
양만춘이 안시성에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며 평강이 운을 띄우자, 온달이 덩달아 동의하며 서둘렀다.
“아, 그렇군요. 성주께서 성을 살피셔야 하니 서두릅시다. 막바우를 보고 가면 좋으나, 바쁘게 되어 먼저 떠나야겠소. 촌장께선 이야기 잘 전해주시구려. 돌아올 때 꼭 들리겠다고.”
온달은 산에 올라간 막바우와 인사도 못 하고 떠남이 아쉬웠으나, 돌아오는 길에 보면 되겠다 싶어 촌장에게 대신 인사를 전했다.
아마도 밤새, 죽을 고비를 함께 넘겨 정이 생긴 모양이다.
산을 내려간 온달 일행은 곧바로 객잔에 들려 양만춘과 경우의 말을 찾았다.
“저 고개 너머 객잔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오늘 밤 묵으시면 내일 아침엔 제가 찾아뵐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우가 길을 잘 아니, 두 분을 안내할 것입니다.”
정면에 보이는 산은 양만춘의 말대로 한눈에도 바위가 많고 험해 보여 고개 너머까지 반나절은 족히 걸려 보였다.
“지금 출발해 넘으면 해가 딱 떨어져 객잔에 묵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그곳에서 내일 뵙겠습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굳이 내일 아침까지 급히 올 필요 없다며 온달이 답하자, 양만춘이 머리 숙여 인사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산을 날듯이 뛰어 내려오는 것이 양만춘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 막바우 아닌가요?”
양만춘의 말에 온달이 시선을 돌려보니 정말 막바우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기다리세요! 나도 같이 가요!”
얼굴에 불만 가득 담은 막바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와 온달의 말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볼멘소리부터 했다.
“인사도 없이 어찌 가시나요? 사람이 그리 무정해도 되십니까? 온달 장군님, 나도 그 낙랑 사냥 대회 따라가고 싶소!”
“허허, 이것 참.”
“이 사냥꾼들은 데려가고 나는 두고 가는 법이 어디 있소? 내가 저들처럼 활은 못 다루더라도 힘이라면 나도 자신 있으니, 온달 장군님이 사냥 대회 참여 전까지 저 시커먼 검을 대신 들고 힘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할 자신 있소. 그러니 데려가 주시오!”
대뜸, 불만을 쏟아내다가 자신도 데려가 달라 조르는 막바우의 순박한 모습을 내려다보며 온달이 환히 웃었다.
“허허, 이것 참.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