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함께 가는 낙랑 사냥 대회 (1)
한번 기세가 꺾인 짐승은 결코 저항하지 못하는 법이다.
온달의 화살이 긴 울음과 함께 언덕 위 우두머리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 것으로.
많은 수의 이리 떼가 몸이 굳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런 이리 떼를 향해 날린 산군의 포효는 벼락과도 같아 감히 그 어느 이리 하나 앞으로 나서 산군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덤비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여전히 자신의 앞에 늘어선 이리 떼를 당당히 훑어보던 산군이 거침없이 한 발 두 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제야 정신이 든 이리 떼는 몸을 부르르 떨며 꼬리를 말았다.
이제 이리들의 눈빛은 사납지도 않았고, 흉측히 벌려 송곳니를 드러냈던 아가리도 꽉 다문 상태였다.
산군의 눈엔 이리 떼들은 이미 피 튀는 혈투를 벌여야 할 상대가 아닌, 그저 마음껏 유린할 사냥감이었다.
또다시 산군의 장엄한 포효가 밤의 적막을 깼고 그 울림에 모든 이리가 몸을 돌려 내빼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산군의 사냥 시간임이 분명해졌다.
산군은 조급하지 않았다.
도망치는 이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앞발을 내딛더니 잠시 멈추었다.
산군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온달과 양만춘은 긴장해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경우는 풍이가 짖지 못하게 등을 쓰다듬고는 활을 살며시 들었다.
막바우 역시 산군이 몸을 돌려 자신들을 덮쳐 올지 모른단 생각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아이와 경우의 앞으로 나가 몽둥이를 단단히 쥐었다.
산군을 이런 몽둥이로 어찌해 볼 수 없음을 그도 잘 알고 있었으나, 경우와 아이의 앞을 지킴은 그저 몸이 시킨 당연한 본능이었다.
산군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온달 일행과 이리 떼의 싸움에 끼어든 시점부터 산군은 인간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지금도 산군은 고개를 도망치는 이리 떼에게 고정한 채,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상태에서 잠시 서 있다가 마침내 네 발로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려 이리 떼를 쫓기 시작했다.
산군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온달 일행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경계를 풀지 못했다.
“정말 간 걸까요?”
양만춘이 먼저 말을 꺼냈고 온달은 그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경우와 막바우가 있는 모닥불로 이동하면서도 갑자기 등 뒤에서 산군이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에 온몸의 신경을 등 뒤에 집중해야 했다.
일행이 모두 모닥불 가에 모이자 그제야 긴장이 풀려 함께 주저앉고 말았다.
“어쨌든 오늘 밤, 모두 살았군요.”
경우가 긴 한숨 한 번 내쉬고 꺼낸 첫마디는 온달에게 건넨 살았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온달의 재주로 우두머리 이리를 맞추리라 기대하지 않았고, 단지 온달의 화살이 내는 울음소리에 놀란 우두머리가 잠시라도 언덕 위에서 도망치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놀람과 기쁨은 상당해 온달에게 돌려 칭찬한 것이다.
아이의 머리를 부드러이 어루만지며 온달이 특유의 순박한 미소와 함께 경우의 말에 답했다.
“모두가 무사해 참으로 다행입니다. 고생 많으셨소.”
온달의 굵은 목소리가 무척 선하고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경우였다.
“그런데 이리 떼의 사체가 꽤 많은데 먹을 수 있는 것이오?”
양만춘이 주변에 널린 이리 떼의 사체를 가리키며 막바우에게 물었다.
아마도 산골 마을 사람들의 식량으로 염두에 두어 말한 모양이다.
막바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고기가 질기고 냄새가 심해 맛이 없어요. 가죽은 추위를 막아 주니 마을에 옮기면 참 좋겠구먼요.”
가죽은 요긴하단 소리에 온달이 나서 이리 떼의 사체를 모닥불 앞으로 옮겨 쌓기 시작했고 양만춘과 막바우도 함께 도왔다.
이날 밤 온달 일행은 산군의 장엄한 포효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산 저 산, 숲으로 들로 이리 무리를 쫓으며 ‘이곳은 나의 영토이니 두 번 다시 감히 넘보지 말거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산군의 포효 소리가 자신들을 향하지 않았음에도, 온달 일행은 멀리 산군의 포효가 메아리쳐 울릴 때마다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새벽이 되자, 아침을 맞는 안개가 내리더니 멀리 산 위로 불타는 해가 오르며, 자연스레 안개가 걷혀 시야가 넓어졌다.
온달은 긴 수풀로 구성된 꽤 넓은 들이 주단으로 펼쳐진 것에 놀랐다.
주단의 정체는 수를 가늠할 수 없는 꿩들이었다.
색이 유난히 선명해 찬란한 꿩의 깃털은 적색, 청색, 녹색, 흰색으로 온 들을 물들였다.
죽령 지역에서도 꿩을 보아 온 온달이었으나, 이런 수의 꿩들은 처음인지라 무척 놀라 한참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 지역은 짐승들이 내가 살던 죽령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군요. 대단합니다.”
온달이 감탄하자 경우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꿩은 잡기도 참 수월하지요.”
“그런가요?”
“저놈들에겐 나쁜 버릇이 있는데 자기의 보호색으로 은신을 잘한다고 믿는 것이지요. 사실 저놈들이 낙엽이 내린 가을 숲에 내려앉아 있으면 사람 눈으로는 잘 구별되지 않아, 발견 못 합니다.”
“하하, 그렇군요.”
“놈들은 그걸 믿고 사람이나 짐승이 지나가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몸을 숨기지요. 그런데 저놈들은 시력이 나쁘고 귀가 좋아 큰 소리를 내면 일시에 놀라 날아갑니다. 이렇게요. 풍아!”
경우의 지시에 풍이가 풀숲을 내달리며 크게 짖었다.
그 순간, 소리에 민감한 꿩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하늘에 주단을 펼쳤다.
꿩의 긴 꼬리 깃털들이 빠져나와 하늘 위에서 꽃잎처럼 날리어 더없이 아름다웠다.
경우의 화살이 그사이를 뚫고 한 마리를 땅으로 떨구었고 풍이가 잽싸게 달려 물어왔다.
경우의 말대로, 그녀의 한해서 꿩 사냥은 참으로 쉬워 보였다.
“꿩은 맛 좋은데…….”
풍이가 물어온 꿩을 들여다보며 막바우가 중얼거리자, 경우가 싱긋 웃더니 막바우의 손을 잡아끌고 나가며 말했다.
“오늘 내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잡아 줄 터이니, 마을 사람들과 맛나게 드시구려.”
풍이와 막바우가 들을 달려 꿩을 하늘로 날리면 경우의 화살이 여지없이 떨어뜨렸다.
풍이와 막바우는 서로 다투어 신나게 달려 쉴 새 없이 꿩을 날랐다.
경우는 자신의 말대로 화살이 다할 때까지 꿩을 떨구었고, 풍이와 막바우는 숨이 턱에 찼음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들을 뛰어다니면 꿩을 날라 수북이 쌓아 놓았다.
온달은 경우와 막바우의 꿩 사냥을 감탄하며 바라보다가 그녀의 화살이 바닥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쌓아둔 꿩을 묶어 냉큼 짊어지었다.
“아니, 아이고 장군님. 제가 메고 가겠습니다.”
막바우가 숨을 헐떡이며 온달이 짊어진 꿩들을 받으려 하자, 온달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사냥하느라 고생하셨는데 이건 내가 마을까지 나르겠소. 곰과 이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 옮기라 합시다.”
온달이 듬직한 등을 보이고 앞서 걷자, 막바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따랐다.
양만춘은 그런 온달의 넓은 등이 무척 자상하다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산을 내려오며 잠시 걸음을 멈춘 온달은 어깨에 멘 운철 대검을 땅에 꽂고는 여전히 한 쪽 어깨에 꿩을 엮은 줄을 맨 채, 철궁을 들어 화전민 마을 방향으로 길게 화살을 날렸다.
아마도 화살이 마을까지 당도하진 않겠지만, 화살이 날며 우는 소리는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영리한 평강 공주는 이 소리가 마을을 향해 다가옴을 깨닫고 온달이 무사히 마을로 내려옴을 알 것이다.
온달의 생각대로 마을 입구엔 평강 공주와 사람들이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덕쇠네 아비와 어미는 계집아이의 오라비 덕쇠와 함께 달려와 서로 부둥켜안고 울더니, 온달을 향해 엎드려 절하며 또 울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화전민 마을을 구한 온달에게 그저 마음이 격해 말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촌장을 비롯한 모든 마을 사람들도 땅에 엎드려 절하며 울었다.
얼떨결에 온달의 곁에 서 있다가 함께 절을 받은 막바우는 멋쩍어 괜히 풍이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양만춘은 아침 햇살 아래 정겨운 이 광경이 너무도 흐뭇해, 비록 자기 관할지는 아니라도 성을 떠나 이곳을 찾아온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해 곰 사냥을 제안한 경우가 기특했다.
“그래, 경우 네가 여길 오자고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었다. 넌 정말 사려 깊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따뜻해. 내가 본받아야겠구나.”
난데없이 칭찬받은 경우는 자신이 백성을 생각해 곰 사냥을 의도하지 않았음에 부끄러워 답도 못 하고 얼굴을 붉혔다.
온달을 달려와 맞은 평강 공주는 그의 뒤에 낯선 이들이 있음에 살며시 살펴보고는 경우와 시선을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고운 여인이 남장을 하고 검과 활을 메었구나. 무슨 사연일까?’
평강 공주의 눈매는 역시 정확해, 흙투성이 피투성이에 온몸이 얼룩지고 옷이 누더기가 된 경우를 용케 여인으로 알아보았다.
“민망하오. 그만 일어나시구려.”
온달이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자,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서로 손을 내밀어 온달과 양만춘, 경우의 짐과 무기를 받아 대신 짊어지어 편히 해주려 했다.
자신의 운철 대검을 낑낑거리며 여럿이 들고 가는 모습에 온달은 괜히 미안해 머리를 긁적였다.
촌장의 집으로 안내받은 일행은 정성스레 차린 아침상을 받으며 화전민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받았다.
“여기 이분은 양 씨 성을 사용하시는 분으로 이름은 만춘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곁에 계신 이분은 고마운 단비란 뜻의 경우란 이름을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두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공주를 볼 수 없었을 것 같소. 자신들을 사냥꾼이라 말씀하시는데, 그 재주가 실로 대단하십니다.”
온달이 함께 온 이들을 소개하자, 촌장과 평강 공주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막바우는 들어도 모르는 이름이지만, 촌장은 달랐다.
이 근방에 양 씨 성을 사용하는 이들은 안시성 성주 일가 이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평강 공주 역시 안시성 성주가 이제 갓 약관이 된 청년 장사로 양 씨 성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기에, 온달의 설명으로 단번에 양만춘의 신분을 알아보았다.
“귀한 분들이시군요. 이곳은 오부의 귀족 목 씨 일가의 세력지인데도 불구하고 백성의 고난을 제거하기 위해 오셨으니, 실로 영웅호걸이시옵니다.”
평강 공주가 대번에 자신의 신분을 알아보고 사냥꾼 행세를 한 이유까지 눈치 채자, 온달에게 사실대로 털어 놓지 못한 양만춘은 무안해 그저 머리 숙여 답할 수밖에 없었다.
경우도 평강 공주와 촌장이 양만춘의 정체를 눈치 챈 것에 당황해 서둘러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촌장께선 마을 사람은 물론 누구에게도 이분을 이곳에서 봤다는 말을 전하지 마시오.”
영리한 경우가 중앙의 귀족 목 씨 일가와 충돌을 사전에 방비하자, 평강 공주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요. 촌장께선 이분의 말을 따르심이 좋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감히 이런 산속에서 귀인을 뵐 리가 없지요. 염려치 마십시오.”
비록 작은 산골 화전민 마을 촌장이었으나, 다른 이의 앞에 서는 자는 역시 생각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