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4화 (14/328)

014화 달빛을 가르는 화살 (2)

산군의 등장에 놀란 온달 일행에게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산군과 마주한 이리 떼 역시 놀람과 두려움에 모든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었다.

모닥불을 등지고 이리 떼를 향해 노한 눈을 들이댄 산군은 자신의 뒤에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의 열기가 못마땅한지 꼬리를 휘둘러 모닥불을 가로로 내리쳤다.

산군의 꼬리에 맞은 나뭇가지가 날아가며 오히려 산군의 등 뒤로 불꽃을 더욱 휘날렸다.

이런 사소한 것조차 뜻을 거스르자, 산군의 비위가 더욱 상해 아가리가 심하게 일그러져 자연스레 긴 송곳니가 드러났다.

경우의 활이 산군의 뒤를 겨누었다.

그러자 온달이 손을 들어 제지하며 목소리를 낮춰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있소.”

온달의 음성은 분명 산군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말을 알아듣진 못 하더라도 목소리가 내는 묵직한 울림만으로 등 뒤의 인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은 분명히 전달되었다.

산군은 여전히 모닥불을 등지고 이리 떼를 마주했다.

그러면서 살짝 고개를 돌려 불꽃이 날리는 모닥불 뒤 인간들을 잠시 돌아보았다.

누구도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지 않자, 고개를 정면으로 옮긴 후 두툼한 앞발을 장엄히 내디디며 이리 무리를 향해 한 발, 두 발 나아갔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세 종류의 범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좁은 한반도의 남쪽에서 사람과 인접해 살다 먹이를 찾아 올라와 터를 잡는 범.

요동과 요서 및 중국인 거주 지역에 살며 중국인에게 신격 대우를 받으면서도 사람을 종종 사냥하는 만주 범.

추운 동북 지역에서 내려온 세상 모든 범 중 가장 큰 동북호.

사람들은 이렇게 범을 구분했다.

그러나 범은 살아온 지역에 따라 체격과 털의 윤기 등만 차이가 날 뿐, 먹이가 풍부한 곳에 터를 잡기 위해 수백 리, 수천 리를 이동하기에 어떤 범이 어디에 산다는 것은 이 지역에선 통용되지 않았다.

어디든 터를 잡고 살게 되면 그곳의 상황에 맞게 적응하며 자신의 영토를 결코 그 어떤 짐승에게도 내주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삼한인들과 말갈인이 먼저 자리 잡고 사는 곳에선 범도 이들을 뭇짐승 다루듯 하지 않고 공존을 택한다는 것이다.

삼한인과 말갈인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복수함을 범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살육에 미친 겨울곰과 수를 믿고 자신들이 산의 주인을 자처하는 산림 이리들과 달리, 이런 지각력이 범과 다른 짐승들의 차이였다.

범은 결코 같은 범을 포함해 뭇짐승들과 영토를 공유하지 않는다.

늙은 산군은 불행히도 멧돼지 사냥에서 상처 입고 미친 겨울곰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그러면서 집단 공격의 이점을 살린 이리 떼를 한 번에 제압하지도 못해 제멋대로 날뛰게 했으나,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산군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었고, 끝내 오늘 밤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산군의 목에서 숨소리에 섞여 그렁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거친 포효를 참고 사냥감을 덮치기 전 숨을 고르는 소리였다.

범과 마주한 경험이 풍부한 온달과 막바우는 이 소리의 의미를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더욱 긴장해 각자의 손에 든 무기를 굳게 쥐었다.

그러나 산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들어 올려 겨누진 않았다.

“가만히, 가만히. 산군을 자극하지 말고 준비들 하세요. 곧 시작됩니다.”

무엇이 시작될지 막바우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리 떼도 힘겨운데 호랑이까지 나오다니… 뭐부터 공격해야 하죠?”

막바우의 말을 경우가 받아 물으며 산군을 겨누지 않고 있었으나, 활의 시위를 팽팽히 긴장시키고 있었다.

“이리부터. 산군을 덮치는 이리부터 쏘세요. 산군이 알 수 있도록. 우리가 산군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막바우 대신 온달이 답하자, 양만춘과 경우가 고개를 끄덕여 조용히 답했다.

풍산개 풍이는 경우의 뒤에 숨은 계집아이의 곁에 듬직하게 서서 지키고 있었다.

인간들이 일촉즉발의 순간을 대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사이.

산군의 위세에 질렸던 이리 떼가 자신들의 수적 위세를 믿고 눈치 없이 먼저 도발하기 시작했다.

선두의 제법 큰 이리 한 마리가 흉한 아가리에 침까지 흘리며 이를 드러내고 낮게 으르렁거리더니 산군을 향해 한 발, 두 발 다가왔다.

한 놈이 나서니, 그 뒤엣것들도 기세가 살아 뒤를 따랐다.

산군은 이 겁 없는 조무래기들이 감히 자신을 능멸한다 생각했는지 분을 참지 못하고 끝내 포효하고 말았다.

장엄한 산군의 울음이 숲을 뒤흔들고, 가까이에서 벼락을 맞듯 그 소리를 받은 온달 일행은 등골에 소름이 돋아 이마를 타고 흐르던 식은땀마저 한기에 섞여 날아가고 말았다.

산군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던 이리 떼도 그만 얼어 네 다리가 땅에 붙었고, 언덕 위에서 잘도 산군을 향해 울부짖었던 우두머리조차 이젠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절대강자의 당당한 위엄이었다.

미친 겨울곰보다 체격은 작지만, 그래도 족히 백 관 가까이 되어 보이는 산군의 육중한 몸통에서 뿜어 나온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며, 길게 메아리칠 때까지 숲에 그 어느 하나도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 정신을 가다듬은 것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두머리 이리였다.

‘수로 일시에 밀어붙여라! 온 산에 아직 남은 이리 무리는 이곳에 집결해 자만심 가득한 호랑이와 인간들을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 놓아라!’

총공격 신호를 긴 울음으로 명하는 것 같았다.

우두머리의 명령은 절대적이라 거역하는 이리는 없었다.

가장 선두에 선 이리가 산군을 향해 달려듦과 동시에 모든 이리가 일시에 덮쳐 왔다.

‘어쩌면 지금이 도망갈 절호의 기회일 건데.’

경우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산군을 두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산군을 덮쳐 오는 이리 떼를 향해 화살 두 대를 일시에 날렸다.

산군은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고 덤비는 이 시건방진 이리 집단에게 더욱 격노했다.

뒷발로 몸을 일으켜 세운 산군은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달려든 이리를 앞발로 후려쳐 땅에 패대기친 후, 자신의 옆구리를 겨냥해 달려드는 이리를 물어 허공에 높이 띄웠다.

산군의 이런 동작은 전광석화 같았다.

그러나 삼면에서 밀려드는 이리 무리 역시 매우 빨랐다.

피에 굶주린 이리의 이빨이 우측으로 돌아간 산군의 두툼한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산군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이리의 공격에 맞서려던 순간, 경우가 쏜 화살 중 하나가 정확히 이리의 아가리에 박혀 숨통을 끊었다.

다른 화살도 산군의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아 몸을 솟구쳐 덤비던 이리의 목을 꿰뚫었다.

인간들이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돕고 있음을 산군도 느끼며 이제 뒤엔 적이 없다 생각한 듯 보였다.

산군은 시건방진 이리 무리를 응징하기 위해 돌진했다.

“우리도 이 기회에 이 잡스런 이리를 소탕합시다. 막바우와 경우님은 모닥불 가에 남아 아이를 지키십시오. 갑시다!”

산군의 돌진과 함께 온달이 운철 대검을 굳게 들어 올리며 양만춘에게 말했다.

양만춘도 기다렸다는 듯 전혀 두려움 없이 온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리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아니, 그냥 기다리지. 겁 없이… 당신은 여기 남아 우리 앞을 지켜야죠!”

겁 없는 사내들이 끓어오르는 피를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가자, 경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막바우마저 몽둥이를 쥐고 뛰어 나가려는 모습에 크게 소리쳤다.

막바우는 경우의 고함에 맥없이 멈췄다.

그의 시야에는 산군과 함께 이리 떼에 돌진해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는 온달과 양만춘의 위풍당당한 등이 보였다.

막바우는 무리에서 이탈해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이리를 냅다 몽둥이로 후려쳐, 그동안 이리 떼에게 둘러싸였던 울분을 풀었다.

“어딜, 이 개새끼가!”

언덕 위에서 인간과 범이 합심해 자신의 무리를 마구잡이로 짓밟는 광경에 격분한 우두머리는 계속해 목을 길게 빼고 아직 여러 산에 남아 있는 이리 무리를 부르는 것에 집중했다.

‘모여라! 더 모여라! 어서 빨리 와 저것들을 찢어발겨라!’

우두머리의 울음은 이렇듯 외치고 있었다.

이윽고 이 산 저 산 멀리 떨어진 숲에서도 이리들의 화답이 길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직 올 것들이 더 남은 건가요?”

자신의 다리를 물고 늘어지던 이리의 척추에 검을 쑤셔 박으며 양만춘이 온달에게 물었다.

양만춘의 팔과 다리는 그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온달이 왼손으로 이리의 긴 목을 쥐어 아귀힘만으로 목뼈를 분질렀다.

그리고는 운철 대검을 휘둘러 주변 이리들의 뼈를 박살내어 간신히 틈을 만든 후,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답했다.

“나도 얼마나 더 있는지 잘은 모르겠소만, 화답하는 이리들의 울음이 상당하니 꽤 있을 것 같소.”

온달의 숨이 턱까지 찬 것이 꽤 지쳐 보였다.

그들의 앞에서 거대한 몸을 날려 이리의 등뼈를 부수는 산군의 몸놀림도 처음과 달리 상당히 둔해져 지쳐 보였다.

상당수의 이리를 죽였으나, 아직도 이리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에 질린 온달은 모골이 송연해져 멀리 언덕 위에서 목을 길게 빼고 우는 우두머리를 노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뜬 밝은 달 아래 우두머리의 모습이 또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더 망설일 시간이 없다.’

운철 대검을 땅에 꽂고 어깨에 멘 철궁을 들어 효시를 먹였다.

온달은 망설임 없이 언덕 위 우두머리 이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거리는 충분하다. 그러나 내가 맞출 수 있을까?’

자신의 실력이 언덕 위에 이리를 맞추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자, 화살 끝이 흔들렸다.

그때, 온달이 운철 대검 대신 철궁을 든 그 순간의 틈을 노린 이리 한 마리가 그의 목을 노리고 몸을 날려 왔다.

온달은 이리가 덮쳐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두머리를 겨누던 활을 내리지 않고 더욱 집중했다.

짧은 바람 소리가 온달의 귓가에 전해지고는 온달에게 달려들던 이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경우의 화살이었다.

“어서 쏘세요! 할 수 있어요!”

경우의 외침과 함께 온달의 철궁에서 매의 울음이 길게 울리더니 끝없이 이어지며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

날카로운 매의 울음소리에 산군도 놀라 하늘을 올려다봤고, 맞서던 이리 무리도 모두 고개를 올려 밤공기를 찢으며 날아오르는 화살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높이 오른 화살은 달빛을 받아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선명히 선을 그렸다.

언덕 위 우두머리도 울음을 멈추고, 매의 울음으로 끊임없이 울며 다가오는 아름다운 한 줄기 빛을 취한 듯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달빛을 가르며 높이 뜰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던 우두머리는 화살이 지르는 날카로운 울음이 점점 커지며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울음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달빛을 가르던 빛이 그리는 속도는 하강하며 더욱 빨라졌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화살의 강한 바람과 한결 강해진 울음을 얼굴에 맞은 우두머리가 커졌던 동공을 찌푸린 순간 온달이 쏜 화살이 우두머리의 쫑긋 솟은 귀를 찢었다.

화살의 강한 힘은 우두머리의 왼쪽 귀를 뿌리째 날려 버리고도 계속 뒤로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 우두머리의 귀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솟아올랐다.

우두머리 역시 화살이 뚫고 나간 충격에 땅을 강하게 딛던 네 다리의 힘이 무력화되어 몸이 뒤로 날아가 언덕을 굴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맞힌 건가? 맞혔나?”

정확히 맞춰 숨통을 끊지는 못했으나, 온달의 화살은 언덕 위에서 이리 무리를 지휘하던 우두머리를 끌어내렸다.

“맞혔다!”

온달보다 경우가 더욱 놀라 중얼거렸다.

이리 무리 역시 이 광경에 기가 질려 모든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었다.

한동안 이어진 적막을 깬 것은 감히 자신을 마주하면서도 겁 없이 한눈파는 이리 무리의 멍한 행동에 분노한 산군의 포효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