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달 아래 이리 떼와 혈투 (2)
어느새, 정면 모닥불로 달려들던 척후대 이리들의 사체가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억센 송곳니로 동료의 살을 뜯고 뼈를 부수는 이리 무리의 잔혹한 소리만이 밤의 적막을 깨고 모닥불 주변 온달 일행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동료의 시체를 물고 뜯으며 배를 채우다니, 짐승이지만 실로 잔인한 것들이다.’
온달의 이런 생각과 달리 이리 떼가 죽은 동료의 사체로 배를 채우는 행위는 평소엔 하지 않는 행동으로 오직 무리 사냥 시에만 행하는 습성이었다.
이것은 적의를 불태우며 살육을 준비하기 위한 이리 떼 고유의 특성이었다.
모닥불 앞에 우뚝 선 온달은 몸을 천천히 돌리며, 자신들을 둘러싼 이리 떼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하나하나 살피며 낮게 말했다.
“아이, 깨워야 하지 않겠소?”
아이가 흉측한 이 광경을 보지 않도록 잠재우던 경우가 널찍한 온달의 등을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잠을 깨웠다.
경우의 손길에 잠에서 깬 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경우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앉더니, 이내 곧 이리 떼의 으르렁거림에 놀라 경우의 뒤로 작은 몸을 숨겼다.
경우는 아이가 놀라 소리치지 않도록 손가락 하나를 아이의 입에 대고 자상히 말했다.
“괜찮아. 아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항상 내 뒤에 있으렴.”
경우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던 아이가 자신의 입에 닿은 경우의 손가락을 살며시 쥐고는 자신의 뺨에 갖다 대었다.
“막둥이, 말 못 해요. 비명을 지를 순 있어도 말은 못 해요. 어려서 열병을 앓다 살아난 뒤로 한 번도 말을 하지 못 했어요. 알아듣기는 하는데…….”
막바우의 이야기가 왠지 서글퍼 온달이 고개 돌려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대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계집아이가 경우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곰에게 물려간 아이를 구하러 달려와 곰만 잡았지, 아이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구나. 그래도 경우 저 사람이 꼼꼼히 잘 살펴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말이 쌀쌀맞지만, 좋은 이가 분명하다.’
아이를 내려다보던 온달이 시선을 경우에게 옮겼다.
그러자 둥글고 큰 경우의 눈망울이 모닥불 불빛에 반짝이며 온달을 올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내려다봐요? 할 말 있으세요?”
온달은 경우의 큰 눈망울이 불빛에 반짝이자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경우의 퉁명스런 목소리에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를 잘 돌봐 주셔서 참 좋은 분이라 생각했소. 고맙소.”
이리 떼가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이 상황에 아이를 계속 부탁한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아이는 걱정 마세요. 내가 반드시 지킬 터이니.”
영리한 경우가 먼저 온달의 근심을 덜어 주었다.
온달은 그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후 다시 전면을 주시하여 이리 떼의 움직임을 살폈다.
살육에 미친 겨울곰에게 물려가도 살려 달란 외침 한 마디 못 질렀을 아이가 애틋한 경우는 가만히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달리 아이가 살려달라 외쳤다면 겨울곰은 아이의 목뼈를 단숨에 분질렀을 것이다.
아이에겐 이 또한 불행하지만, 천운인 셈이다.
온달의 곁에 선 양만춘이 철궁에 활을 먹이는 온달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뒤, 산으로 올라가는 방향엔 이리가 없습니다.”
“살펴보셨군요. 나도 보았소. 그러나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라… 우리가 등을 보이는 순간, 이리 떼가 일시에 달려들어 우리의 목줄을 물어뜯을 것 같소.”
온달도 이미 살펴본 뒤라 철궁을 들어 전면 이리 무리 중 하나를 겨누면서 양만춘의 말을 받아 답했다.
양만춘도 온달의 이야기에 동의하며 활을 들어 좌측 이리 무리를 겨누고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함정일까요? 우리가 산으로 도망치도록 일부러 포위망 중 한 곳을 열어 둔…….”
“함정은 무슨, 제아무리 이리 떼라도 저 산 방향으론 포위할 수 없어 그런 것이오.”
우측을 주시하던 막바우가 이야기에 끼어들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건 뭔 소리요? 감히 포위를 못 하다니?”
수십 마리의 이리 떼 집단이 무엇이 두려워 포위망에 구멍을 만들었는지 궁금한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바우가 주시하는 우측에 활을 겨누면서 물었다.
“저 산머리에 굴이 하나 있고, 그 앞에 산 아래를 굽어보는 범바위라는 것이 있는데, 그 굴에 산군이 산다오.”
“산군?”
“낮이면 항상 범바위에 앉아 산 중턱을 내려다보고 있기에 뭇짐승들은 감히 함부로 저 산으로 기어들어 갈 생각 따윈 못할 것이오.”
“산군? 범이오? 호랑이?”
경우가 산머리를 올려다보며 재차 묻자, 막바우는 등도 돌리지 않고 손에 쥔 몽둥이를 꽉 쥐며 답했다.
“산군을 무시하는 미친 겨울곰이 산에 오르기 전, 우리를 이 바위 뒤에서 기습하려 한 것도 산군과 우리를 앞뒤로 상대하기 어려워 그런 것일 거요. 아마도 이놈들도 산군을 두려워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공연히 산군을 자극해 산군과 우리를 앞뒤로 맞아 상대하기 싫어 길을 터 둔 것이 분명하오.”
“…….”
“길이 열렸다고 신나서 저 산을 오르려 하면 온달 장군님 말씀처럼 놈들이 일시에 떼로 달려들어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오. 아무렴.”
휘영청 밝은 달은 산머리 위에 떠 막바우가 말한 범바위의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
“저놈이 좀 전에 설명한 이리 무리의 우두머리요?”
좌측을 주시하던 양만춘이 꽤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 홀로 서서 모닥불을 내려다보는 이리를 가리키며 막바우에게 물었다.
먼 거리였지만, 달빛을 고스란히 받은 우두머리 이리의 윤곽이 또렷이 보였다.
그 크기가 다른 이리보다 한 둘레는 더 클 것이란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송아지 정도 크기겠군. 과연.”
온달도 양만춘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놈이 막바우가 말한 우두머리임을 깨달았다.
“교활한 놈이죠. 항상 내려다보는 곳에서 지휘하지만, 활이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막바우의 말대로 일반 활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놈이 있었다.
‘내 철궁이라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매의 울음을 길게 울며 나는 내 화살을 놈은 쉽게 피할 것 같구나. 어쩌면 좋을까? 그래도 시도해야 하나?’
일천 보 밖까지 날아가는 온달의 철궁은 분명 우두머리를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으나, 온달은 자신의 재주로는 맞출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온달이 머뭇거리던 그 순간, 양만춘의 앞에 섰던 풍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리 못지않게 시각, 후각, 청각이 발달한 풍산개의 야성이 이리 떼의 진영 변화를 느껴 인간들에게 준비하라 경고한 것이다.
이리는 사람들이 키우는 개와 달리 결코 짖지 않고, 집단 공격 전 으르렁거림조차 멈춘 채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움직여 일시에 공격을 시작한다.
한 번 공격에 네다섯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이런 무리가 서넛으로 집단을 이루어 몰아치듯 공격해 방어를 무너뜨린다.
또한 뒤에 진을 친 부대가 대기하다가 앞선 부대와 번갈아 쉴 틈을 주지 않고 지구전을 펼쳤다.
이런 전술은 초원 유목민들의 기마 전술과 유사한데, 이리 떼가 사람에게 배우지 않았을 터이니, 사람들이 이리 무리의 사냥을 통해 배워 만든 전술일 것이다.
풍이의 으르렁거림에 잔뜩 긴장을 한 온달의 어깨가 저려왔다.
이 긴장감은 양만춘도 마찬가지로 활을 쥔 손끝이 떨려 팽팽히 시위에 메겨진 화살 끝이 흔들렸다.
막바우도 몽둥이를 앞으로 겨누고 정면을 주시했는데, 무릎 아래가 떨려 손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온다!”
가장 뒤에 서 있던 경우의 입에서 높은 고음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팽팽히 당겨진 시위가 바람 소리를 내며 우측에서 달려오는 이리 무리 속으로 꽂혔다.
정확한 솜씨로 선두에 선 이리가 쓰러지자 뒤에 진을 치고 있던 이리 서너 마리가 일시에 동료의 사체로 달려들어 아직 남은 숨통을 마저 끊고는 가죽을 찢고 살을 바르며 뼈를 우드둑 씹어댔다.
“이 지독한.”
이리 떼가 억센 송곳니로 뼈를 부수는 소리는 듣는 이에게 자신들의 뼈도 물리면 곧 저처럼 되리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이것은 이리 떼에게 저항하는 사냥감을 공포로 무력화시키는 행위 중 하나였다.
온달은 뼈가 으깨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견뎌 내지 못하고 활시위를 당겨 매의 울음으로 덮고자 했다.
온달의 철궁을 벗어난 화살이 날카로운 매의 울음으로 밤하늘을 찢으며 전면에 덮쳐 오는 이리 무리 속에 꽂혔다.
화살에 어깨가 꿰뚫린 이리는 강한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가 뒤에 진을 치고 있는 무리 속으로 처박혔다.
이번에도 이리들은 동료에게 달려들어 송곳니로 뼈를 부스는 흉측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 소리에 질린 양만춘의 활 끝이 떨리고 머뭇거리자, 뒤에 선 경우의 날카로운 질책이 울렸다.
“정신 차리고 집중해!”
그녀의 질책과 함께 발사된 화살이 양만춘의 옆을 스쳐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이리의 아가리에 들어갔다.
목이 뚫린 이리가 털썩 쓰러졌다.
그녀의 외침이 파동으로 변하여 고막을 흔들었다.
정신이 돌아온 양만춘이 화살을 날리자, 이내 곧 바람이 되어 우측 모닥불을 뛰어넘는 이리의 이글거리는 눈에 꽂혔다.
이리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화살이 박혀 피를 쏟는 눈으로 계속 달려들다가 양만춘의 발차기에 날아가 처박혔다.
오른발을 지축으로 중심 잡아 왼발 무릎을 굽혀 올렸다가 강한 탄성으로 발끝을 창처럼 꽂은 것이다.
이 매끄러운 동작은 고구려 전통 무술 수박이었다.
수박은 맨손을 사용하는 적수공권이 주였지만, 전신에 힘을 실은 날렵한 발기술도 꽤 실전적이었다.
양만춘이 경우의 도움으로 정신 차릴 무렵.
몽둥이에 의지해 달려드는 이리를 상대하던 막바우가 이리에게 허벅지를 물리자, 경우의 정확한 활이 또다시 날아 이리의 목에 박혔다.
이 순간의 빈틈을 노린 이리 한 마리가 모닥불을 타고 넘어 인간 무리의 약점인 작은 계집아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경우가 활에 화살을 먹이던 그 짧은 빈틈이 방어의 균열을 가져온 것이다.
당황한 경우가 아이의 앞에 서서 발로 이리를 걷어차려 하고 막바우가 급히 몸을 돌려 아이를 구하려 할 때, 풍산개 풍이가 몸을 날려 공중에서 이리의 목을 물어 함께 땅으로 떨어져 저지하며 버텼다.
급히 달려온 막바우가 풍이에게 물려 땅에 쓰러진 이리의 배를 발로 밟고는 그대로 몽둥이를 내려쳐 두개골을 박살내었다.
“자리를 지켜요.”
고맙다는 인사 대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란 경우의 질책에 막바우와 풍이는 할 일 없이 몸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막바우가 자리를 비워 이미 뚫린 우측으로 세 마리의 이리가 일시에 달려와 막바우와 풍이를 덮쳤다.
“이런 제기랄!”
막바우의 비명에 놀라 돌아본 온달의 시야에 막바우와 풍이가 이리 떼의 공격을 받는 모습이 들어왔다.
경우처럼 난전을 벌이는 곳에 정확히 활을 쏠 수 없는 온달인지라 급한 마음에 막바우를 향해 달려가려 하자, 경우가 외치며 제지했다.
“각자 자기 자리를 지켜요! 어느 곳이든 비워선 안 돼요!”
경우의 외침과 함께 한 번에 두 개의 화살이 그녀의 활에서 나가더니 신통하게도 두 마리의 이리 목에 정확히 꽂혔다.
빠르고 정확한 활 솜씨에 두 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하는 신기마저 보여주자, 온달은 경우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뒤에서 활로 지원할 터이니, 믿고 다들 자기 자리를 지켜요! 풍이! 넌, 막바우 저 친구가 약하니 돕고!”
“내가 왜 약혀? 아, 이런 제길.”
경우의 지시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풍산개 풍이가 자신의 앞에 서서 달려드는 이리를 막았다.
막바우는 왠지 개에게마저 약하다고 평가받는 것 같아 이를 갈고는 그대로 달려드는 이리의 몸통을 몽둥이로 후려갈겼다.
“절대 뚫리지 마! 뚫리면 곰에게 이 아이를 구한 보람이 없어!”
활에 화살을 먹이는 사이, 모닥불을 넘어 달려드는 이리의 수가 늘자 더욱 빨리 활시위를 당기며 일행을 독려하는 경우였다.
그녀는 화살집에서 화살이 두 개 잡히면 동시에 두 대의 화살을 날리고, 하나가 잡히면 한 대의 화살을 날리며 이리 떼의 수를 줄여갔다.
그러나 끝내 몰려드는 이리의 수가 늘어 양만춘과 온달은 땅에 박아 둔 검을 뽑아 들고 이리를 상대해야 했다.
양만춘은 왼손에 수박 기술을 사용해 이리의 목을 후려치거나 발로 걷어찬 후 검으로 찔렀다.
또한, 온달은 양만춘의 경쾌한 몸놀림과 쾌검보다 느리지만 묵직한 운철 대검을 휘둘러 한 번에 두 마리의 이리의 갈비뼈를 박살내어 멀리 날려 버렸다.
인간들의 방어가 좀처럼 뚫리지 않자,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던 우두머리 이리의 아가리가 흉하게 실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