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피를 쫓는 이리 떼
둥근 달은 잠시 구름에 가려 어둠이 내린 숲에 모닥불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이미 밤이 깊어져 마을은 날이 밝으면 내려가기로 했다.
뜻하지 않은 노숙을 하게 된 온달은 마을에 남겨 두고 온 평강 걱정에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마을 촌장이 선해 보이나, 금지옥엽 공주를 낯선 곳에서 홀로 남게 했으니, 나도 참으로 대책 없는 놈이구나.’
대장부로서 곰에게 물려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산으로 뛰어들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왠지 울적한 마음에 온달은 막바우가 피어 놓은 모닥불 가에 앉아 애꿎은 마른 나뭇가지만 뚝뚝 끊어 불 속으로 던졌다.
덕쇠네 막둥이는 온달이 앉은 모닥불과 조금 떨어진 곰의 사체 옆에 피운 모닥불 곁에서 경우의 무릎을 베개 삼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경우는 사냥꾼은커녕 글이나 읽는 사내의 손이라 보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작고 가는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막바우의 말대로 사냥꾼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런들 이 사내들은 곰을 잡도록 우리를 도운 이들이니, 그 마음은 의심하지 말자. 뭔 이유가 있겠지.’
누가 봐도 사내대장부인 양만춘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이름을 늦봄이라 말하였으나, 그래도 그의 기골을 봐서 사냥꾼이라 믿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호리호리한 경우는 온달로서도 그들의 말처럼 사냥꾼으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막바우가 하듯 대놓고 의심하는 티도 내긴 온달의 성품상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막바우는 부지런히 숲을 오가며 나뭇가지를 모아왔고 모닥불도 군데군데 피웠다.
곰의 사체 곁에 피워 둔 모닥불을 중심으로 사방 네 군데의 모닥불을 피우고 나뭇가지를 모으는 막바우의 행동에 온달이 의아함을 느꼈다.
“하나 관리도 바쁠 텐데 여러 곳에 피우느라 고생이 많소.”
온달이 슬쩍 여러 곳의 모닥불을 지피는 이유를 돌려 물었다.
“곰의 피 냄새가 짙어 쓸데없는 것들이 꼬일까 미리미리 대비해 두는 것입지요. 장군님은 이 모닥불 곁에 계십시오.”
막바우는 그렇게 답하고는 모닥불 주위에 쌓아 둘 나뭇가지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몸을 돌렸었다.
산짐승 소리는 물론이요, 산새들 소리도 없는 숲의 밤은 너무도 적막해 멍하니 불빛을 바라보다간 꾸벅 졸 것 같아 온달이 기지개를 켰다.
그때 그의 곁으로 양만춘이 다가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냥꾼이 입기엔 과할 정도로 값비싼 범의 가죽으로 만든 겉옷이 일렁이는 모닥불 불빛을 받아 화려하게 흔들렸다.
하얀 풍산개 풍이도 양만춘의 뒤를 따라 온달의 곁에 사지를 쭉 펴고 눕듯이 편안히 자리를 차지했다.
곰의 앞발에 맞아 가죽옷의 어깨가 찢어진 사이로 옷을 찢어 붕대 삼아 감싼 곳이 붉은 피로 짙게 물들어 온달의 눈에 들어왔다.
“어깨는 괜찮소? 곰의 앞발 후려치기가 상당할 것인데.”
“다행스럽게도 스쳐 맞았습니다. 그저 발톱에 패인 정도지요. 그런데 저 막바우란 사내는 산과 뭇짐승에 대해 잘 아는 듯하옵니다. 지금 모닥불을 지핀 형태가 마치 군의 진을 연상케 하는군요.”
“…….”
“저 아이의 모닥불을 중심으로 사방을 밝히고 특히나 온달님께옵서 계신 이곳은 앞이 탁 트여 무엇이 쳐들어올 때 가장 먼저 맞이할 곳 같습니다.”
온달은 양만춘의 이야기에 그제야 막바우가 자신을 아이와 떨어져 여기 앉으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허허, 사람도 참. 그럼 그렇다고 말이나 하지. 졸지 않고 준비나 하게. 내가 여기서 무엇인가를 막아야 하는 거구먼.”
온달이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말하자, 양만춘도 온달을 따라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이 산에 미친 곰 말고도 사람에게 덤빌 것들이 있나 봅니다. 범인가요?”
양만춘의 물음에 짚이는 것이 있는 온달인지라 짧은 신음 한번 내고는 별일 아닌 듯 표정을 풀어 답했다.
“음, 범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이리 같구려.”
“이리라고요? 이리라… 이리. 어쩌면 범이나 곰보다 더 성가신 것들일 수 있겠군요. 허, 그것 참.”
말을 타고 이리 사냥을 몇 차례 해본 경험이 있는 양만춘이었다.
그렇기에 이리 떼가 사람의 군사 조직처럼 체계적이며, 군령이 엄하고, 무리 지어 한번 달려들면 결코 물러섬이 없는 것을 잘 알기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온달은 막바우와 이 늦봄이란 사내가 자신보다 어리지만, 지혜가 대단하고 경험도 풍부함에 속으로 탄복하며 생각했다.
‘막바우나 이 자는 힘은 나보다 못 할지라도 용기나 지혜, 무예가 월등하니, 내가 이들처럼 스물일 때 한심한 것에 비하면 참으로 대단한 인물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양만춘에 대한 호감이 좀 더 높아져 있을 때였다.
양만춘이 커다란 눈망울을 더욱 크게 뜨며 공연히 웃음 짓고는 미안한 표정 가득해 머뭇머뭇 온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실은 온달님을 처음 뵈었을 때, 그러니깐 곰에게 저 큰 검을 들고 달려드실 때, 그때에도 온달님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소문에 듣던 그 검인지라… 알아보고도 모르는 척한 점 용서를 구합니다.”
“아, 그렇소? 그런데 그런들 어떻소. 개의치 마시오.”
양만춘은 온달을 먼저 알아보았으나, 곁에 있던 경우가 곰에게 달려드는 온달을 가리키며 ‘미친 사람’이라 소리친 통에 그것이 걸려 알아보지 못한 척한 것이었다.
온달이 선선히 받아주자, 이번에도 양만춘이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무엇이오? 하시구려.”
“실은 저의 이름 늦봄은 어릴 적에 어른들이 부르시던 것으로 제 본명은 만춘이요. 성은 양이라 하옵니다. 만춘이란 이름의 뜻이 완연한 봄, 혹은 봄의 절정이라 늦봄으로 불리었지요. 본의 아니게 속인 점 용서를 구하옵니다.”
“그렇소? 수의 황제와 같은 양 씨 성을 지닌 분이시구려. 만춘이라… 그 이름이 늦봄과 통하니 꼭 속인 것은 아니구려. 괜찮소. 괘념치 마시구려.”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 수의 황제 양견의 이름은 삼한 누구나 알고 있었다.
온달은 만춘이란 이 사내가 양씨 성을 지님을 듣고 ‘성도 이름도 제대로 없는 평민은 아니구나’라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또 있소? 혹시, 사냥꾼이 아니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오?”
양만춘이 또다시 고백을 하려 하자, 이번엔 온달이 선수 쳐 물었다.
온달에게 정곡을 찔린 양만춘은 얼굴이 벌게져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괜찮소. 사냥꾼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소. 산에 올라와 곰 잡으면 사냥꾼인 것이지. 사냥꾼이 태왕님 허락받아 하는 벼슬자리는 아니잖소. 괜찮소.”
이번에도 온달이 호탕하게 괜찮다고 답하자, 양만춘의 붉어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온달님, 하나 더 아뢰고 싶은 것이 있사온데.”
“아직 더 있는 것이오? 속 편히 마저 하시구려.”
“실은…….”
“뭔 자백을 끝도 없이 하는 거여. 거 봐요! 제가 이상하다 했잖아요. 하나하나 감질나게 풀지 말고 할 거 있음 다 말해 보쇼!”
언제 왔는지 막바우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온달의 맞은편에 털썩 앉더니 신나서 떠들어댔다.
막바우의 우렁찬 목소리에 풍산개 풍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경우가 앉은 모닥불로 어슬렁어슬렁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허, 이 사람도 참. 허허허.”
온달은 양만춘이 혹여 무안할까 봐 웃음으로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잠깐, 온달 장군님 웃지 마시고 잠깐…….”
그 순간 막바우가 온달의 웃음을 중지시키며 고요한 숲의 적막에 귀를 기울였다.
경우의 모닥불로 향하던 풍산개 풍이도 제자리에 서서 귀를 쫑긋하며 집중하더니, 입을 일그러뜨려 송곳니를 드러내고는 낮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풍아, 그만.”
양만춘이 풍이를 불러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 후 자신도 숲의 고요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우거진 숲에 싸여 바람도 멈춘 원시림 속에 서늘한 한기가 가득했고 비린내와 함께 조용히 풀이 눕는 소리만 들려왔다.
“피 냄새는 우리 뒤의 저 곰에서 나야 하는데, 이 피비린내는 앞에서 잔바람을 타고 오고 있군요. 그런데 무엇이 다가오는지 소리는 들리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
양만춘이 목소리를 낮춰 온달에게 속사이고는 뒤를 돌아 경우를 살폈다.
경우도 무엇인가 낌새를 눈치 채고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활을 챙겨 자신의 손 가까이 두고 양만춘에게 걱정말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고 있구먼요. 오고 있어요. 풀이 눕는 소리가 놈들이 다가오는 소리예요. 풀이 눕는 속도로 봐. 모두 여섯 마리. 이리 떼의 척후가 분명합니다.”
산을 올라올 때 가지고 온 나무 창이 부러져 못 쓰게 된 막바우는 미리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몽둥이를 만들어 둔 터라 그것을 꽉 쥐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막바우가 뚫어지라 응시하던 그곳.
어둠 속에 붉은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온달의 엄지손톱보다 작은 불빛은 어둠 속에서 살며시 켜지고,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가 환한 모닥불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주시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두 개로 시작된 불빛의 옆으로 두 개의 불빛이 풀이 눕는 소리와 함께 살며시 다가와 서더니 미동 없이 모닥불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두 개의 작은 불빛이 그 옆에 서고, 그 뒤를 이어 풀이 눕는 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다가와 옆에 섰다.
모두 열두 개의 불빛이 모닥불 주위 사람들을 주시하고 서서 가끔은 위아래로 흔들리며, 가끔은 사라졌다가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장정 허리 높이보다 조금 낮게 어둠 속에 떠 있었다.
“이리 떼, 여섯 마리, 척후대가 틀림없어요.”
어둠 속 불빛을 마주 보며 막바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불빛과 모닥불과의 거리는 열 장 조금 넘어 보였다.
“이리란 것들은 십여 마리가 가족을 이뤄 한 굴에서 사는데 강력한 우두머리가 나타나면 각기 흩어져 사는 다른 무리마저 그 집단을 따른다 합니다. 지금 우리 산이 그런 경우지요.”
“허허, 이놈의 산…….”
“저놈들은 우리의 방비를 점검하는 것이니, 놈들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척 경계는 늦추지 말고 태연히 이야기들 하십시오. 우리가 도망가거나 당황해 방비가 흐려지는 순간이 바로 놈들의 공격 시점입니다.”
전방의 흔들리는 불빛을 주시하며 막바우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