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봄의 절정에 내리는 반가운 비
타고난 성품이 선하고 다른 이를 의심할 줄 모르는 온달은 겨울곰을 잡도록 자신을 도운 사내들이 사냥꾼이라 말하자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런가 보다.’
하지만, 막바우는 의문을 품지 않는 온달과는 달랐다.
도통 사냥꾼으로 보이지 않는 사내들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저 사냥꾼이라 말하니 없던 의심마저 든 것이다.
“나는 막바우라 하고 여기 이분께옵선 평강 공주님의 부군이신 온달님이시오. 나 같은 천것도 이름이 있고 여기 자빠져 있는 이 곰도 미친놈이란 이름이 있소. 그러니 댁들도 이름은 있을 것인데 어찌 말하지 않는 게요?”
“어허, 막바우 자네, 이 무슨…….”
막바우의 말이 거칠어 온달이 제지했다.
그러나 막바우는 제 할 말을 다 하고는 사내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온달님이셨군요. 어쩐지, 지나칠 정도로 검이 크더니. 과연 듣던 대로 신력을 지니셨습니다. 제가 오늘 귀한 분을 뵙습니다.”
굵은 목소리의 사내가 온달에게 예를 갖춰 하리를 숙이자, 온달도 황망히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청아한 목소리의 사내도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한 후, 곰의 사체를 지키는 하얀 개에게로 몸을 옮겼다.
하얀 개의 곁엔 미친 곰에게 잡혀 갔던 아이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짐작건대 하얀 개는 이 아이를 혹시 모를 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고 있는 것처럼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온달과 인사를 나눈 굵은 목소리의 사내는 듣고 보니, 막바우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하얀 개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사내를 가리키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 이 자는 경우(慶雨)라 하며 어려서부터 이웃에 살아온 친동생 같은 사내지요. 그리고 저의 보잘것없는 이름은 ‘늦봄’이라 합니다. 저 역시 천한 것이라 내세울 성은 없고 남이 부를 이름만 있습지요.”
사내가 이름을 말하자, 경우라 소개된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더니 실소를 머금고 다시 하얀 개의 등을 쓰다듬었다.
경우란 경사스런 비를 이르며 가뭄에 때마침 내리는 단비, 급시우(及時雨)와 그 맥락이 같았다.
자신을 늦봄이라 말한 사내는 사실, 성은 양(楊)이요, 이름은 만춘(萬春)으로 그의 부친 양정이 봄 가뭄 극심했던 날, 경사스런 비와 함께 한 날에 태어난 만춘과 경우의 이름을 지었다.
‘봄의 절정에 내리는 경사스런 단비.’
이것이 둘의 이름으로, 양만춘의 부친은 개마 무사를 이끌고 숱한 공을 세워 대형의 지위로 안시성의 성주가 되었다.
* * *
경우의 아비는 양정 휘하 안시성의 궁노병(弓弩兵) 수장 대식으로 경우는 사실, 사내의 복장을 한 여인이었다.
양만춘은 이년 전, 부친인 안시성 성주 양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열여덟 나이로 안시성의 젊은 성주가 되었다.
고구려는 수도 평양을 오부로 나누어 관리했고, 지방은 성 단위로 군사, 행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 구성된 오부는 왕실을 구성하는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하는 절노부, 연맹장의 지위에 있었던 소노부.
그리고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관노부와 환노부 등으로 구성되어 각 부는 각각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갖추고 자치권 또한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관리를 임명하고, 그 명단만 태왕에게 보고하는 등 그 권한이 막강했다.
이러한 오부의 권한도 태왕의 힘이 강해지고 고구려의 국력 또한 강해지면서 점차 힘을 잃어, 각 부의 자치력이 약화되어 가며 오부 귀족들의 불만은 반대로 쌓여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방에서 차츰 세를 잃어간 각 부의 수장 층은 중앙의 귀족으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점차 오부의 성격도 변해 이제는 중앙 귀족들의 거주지나 출신지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어 가는 형편이 되어 수도 평양은 동, 서, 남, 북, 중앙 오부로 행정 구역이 나뉘었다.
지방은 대성(大城)과 소성(小城)및 주변 개개별 소성으로 나누어 대성(大城)이라 불리는 큰 지역은 욕살(褥薩)이 파견되었고, 그 이하 소성(小城)들엔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가 파견되어 다스리게 했다.
중요도가 낮은 개별 소성(小城)들은 성의 크기 혹은 관할에 따라서 가라달(可邏達)과 누초(婁肖)가 파견되었다.
요동성같이 크고 요충지는 대성이었고, 안시성은 변방에서도 그 외곽에 자리해 성도 작고 중요도가 낮아 대형 직급의 처려근지가 파견되어 성주의 임무를 수행했다.
고구려는 귀족들이 선출하는 재상 대대로 아래 열세 관등이 있었고 이들 관등명은 형(兄)과 사자(使者)를 사용해 구분했다.
형을 사용하는 관등은 건국 초기부터 형성된 귀족 세력에서 나온 관리이며, 사자를 사용할 경우, 행정을 맡은 관리 출신으로 이들 형과 사자의 지위에 따라 여러 관등으로 나뉘었다.
안시성 성주 양정은 대형 직급을 받았으니, 비록 그 세력이 크지는 않아도 고구려의 전통적 귀족 출신이라 그의 아들 양만춘이 대를 이어 안시성의 젊은 성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작은 성의 어린 성주 따위는 중앙 오부의 귀족들은 관심도 없어 아무도 안시성의 성주가 누구며 양만춘이 무엇 하는 인물인지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양만춘은 동갑내기 친구 경우로부터 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부의 귀족 목원의가 다스리는 지역 산골에 큰 곰이 출몰해 마을을 습격하고 살육을 펼치나, 이를 전해들은 성의 관리들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백성을 돕고 못된 짐승을 벌하기로 작심했다.
태대형 목원의는 내평 목충의 아비로, 목충은 평강과 혼담이 오갔던 인물이었다.
양만춘이 백성을 돕고자 마음먹어도 그곳은 자신의 관할지가 아닐뿐더러 막강한 세력을 지닌 목 씨 일가와 다투고 싶지 않아, 경우와 하얀 개 풍이만 대동해 곰 사냥을 나온 것이다.
작은 성이라도 성주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경거망동한 행동이었으나, 양만춘과 경우 두 사람 모두 이제 겨우 약관, 스물의 나이로 혈기가 왕성하고 떠들썩한 것을 찾을 시기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경우는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안시성 궁노수의 수장인 아비로부터 활쏘기를 배우고 어려서부터 그녀의 재주를 신통히 여긴 양정의 배려로 양만춘과 함께 스승을 두고, 말타기와 검술을 익혀 기마궁수의 수장을 희망하고 있었다.
기마궁수란 경무장기병(輕武裝騎兵)으로 빠른 기동성을 장점으로 하며 말 위에서 활을 주력으로 사용해 적의 후, 측면을 기습하고 상대편 기병과 직접 전투를 벌이며 패주하는 적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고구려의 대표적 기병이었다.
그녀는 본래 개마무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말에게까지 쇠로 만든 갑옷을 씌워 적의 화살을 중무장한 철갑으로 튕겨 내고 긴 창으로 밀어붙이는 무시무시한 중장갑기병(重裝甲騎兵)인 개마무사는 여인의 체력적 한계로 가능하지도 않고 받아줄 리도 없기에 차선으로 기마궁수를 택한 것이다.
고구려는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고 고조선으로부터 뛰어난 제련 기술을 이어받아 그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그 때문에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자신은 물론 말까지 쇠갑옷을 입혔는데, 말머리엔 통철판을 둥그렇게 감싸고, 말이 공격받을 부분은 모두 철판으로 갑옷을 만들어 쇠갑옷까지 입혔다.
이들은 적에게 공포와 위협의 상징이며 고구려인들에겐 승리를 뜻했다.
항상 전투 제일선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으며, 방어전에서는 맨 앞에 진을 치고 당당히 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호벽으로 화살은 물론 창 공격도 막아내기로 유명했다.
경우는 성도 없는 평민이란 신분적 한계와 여인이란 신체적 한계로 포기하고 택한 기마궁수에 들어가는 것마저 여인이라 거절당했다.
그렇게 심통이 난 참에 멀지 않은 곳에서 곰이 소란을 피운단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이 곰을 잡아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주를 알리고자, 마침 무료해하던 양만춘을 꾀어 사냥놀이를 나온 것이다.
이렇듯 곰 사냥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의도부터 달랐으나, 의협심 강한 양만춘은 어쨌든 잡고자 하는 마음 그대로 잡았기에 이번 사냥이 성공해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픈 경우는 자신의 활로 곰의 숨통을 끊지 못해 온달이 밉고 더욱 심사가 틀어져 있었다.
* * *
온달은 자신을 늦봄이라 말한 양만춘과 하얀 개를 쓰다듬고 있는 경우의 외모를 살폈다.
‘두 사람 모두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준수하며 활 재주는 물론 큰 곰에게 달려드는 용기 또한 높으니, 어디 하나 모자란 곳 없는 인물들이구나.’
또한 온달은 사냥꾼치곤 참으로 잘나고 젊어 마음 깊이 감탄하고 있었다.
‘더욱이 모르는 이를 위해 제 목숨도 아끼지 않는 선한 마음 또한 따를 자 없으니, 이들이 비록 나보다 어려 보이지만, 나이를 떠나 이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본받아 따라야겠구나.’
양만춘은 온달보단 작지만, 그 역시도 훤칠한 키와 당당한 체구를 지녔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호걸로 보였다.
남장을 한 경우는 여인치고는 큰 키지만, 사내로 생각할 땐 호리호리한 서생 행색으로, 연약해 보이는 체구에 반짝반짝 빛이나 살아 있는 동글고 큰 눈이 무척 매혹적이었다.
온달이 진심으로 양만춘과 경우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내자, 막바우가 살며시 온달의 옷소매를 끌어 몇 걸음 옮긴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
“온달 장군님, 이자들은 사냥꾼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정체를 속이는 자들이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것이 무슨 소리요? 속인다니…….”
“쉿! 듣습니다. 아무튼 조심하셔야 합니다.”
험한 산에서 사냥하는 사냥꾼은 몰이꾼과 추적꾼은 따로 없어도 창잡이와 활잡이의 구성만큼은 지켜야 했다.
창잡이가 짐승의 앞을 가로막고, 활잡이가 활로 숨통을 끊는 방식이 전형적인 사냥 방식으로 창잡이 없인 이곳에서 멧돼지 한 마리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를 잘 아는 막바우에게 양만춘과 경우가 칼도 아닌, 검을 사용하던 모습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둘의 지나칠 정도로 곱고 하얀 피부조차 사냥꾼으로 보기 어려웠다.
온달은 막바우가 공연히 의심한다 생각할 수도 없어, 말없이 걷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우가 쓰다듬고 있는 하얀 개를 가리키며 양만춘에게 물었다.
“아까 보니 곰에게 대담히 달려드는 이 개는 상당히 용감하고 영리한 것 같소이다. 주인께서 이런 사냥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이 개가 곰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냥하니, 의심하지 말게.’라는 듯 막바우가 잘 듣도록 일부로 큰소리로 물은 것이다.
“우리 풍이는 수백 마리의 멧돼지와 노루를 혼자 물어 잡았고, 열여덟 마리의 곰과 열두 마리의 표범도 잡았다오. 호랑이도 혼자서 상대할 수 있고. 아무렴 그렇지? 풍아?”
양만춘에게 물었는데 멀리 떨어진 경우가 대뜸 대답했다.
온달은 그 소리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 막바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막바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콧방귀만 뀌었다.
“뭔 소리여. 미친 곰 뒷발에 차이는 거 아까 다 봤구먼. 혼자 호랑이를 어찌 상대해? 그럼 아까 미친 곰도 혼자 물어 죽이지 왜? 저 사람들은 영 믿을 수가 없구먼.”
막바우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양만춘이 멋쩍어 웃음 지었고, 경우는 도끼눈으로 막바우를 노려보았다.
온달도 괜히 민망해 풍이라 불린 개에게 다가가 쓰다듬으며 경우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아, 그렇군요. 역시나 내가 보니 이 개가 그리도 용감하더이다. 이놈 참 잘 생겼다.”
온달이 칭찬하며 개의 옆에 주저앉아 손을 들어 쓰다듬으려 하자 개가 살짝 몸을 틀어 피했다.
또다시 민망해진 온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다가 개의 몸에 마치 훈장처럼 전신에 상처 자국이 들어왔다.
‘이 사람 말대로 호랑이를 상대하진 못해도 용감한 개는 분명하고 사냥에도 익숙한 것은 틀림없다. 막바우는 이 사람들을 왜 이리도 의심하는 것일까? 난감하구나.’
“경우가 이 풍이를 아껴서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했으나, 이 개는 날개가 달린 짐승 이외에 네 다리가 있는 짐승은 잘 잡는 사냥꾼 맞습니다.”
“그렇군요.”
“네, 경우 부친께서 아끼시던 개인데 이젠 이 개도 나이가 꽤 차 몸이 예전 같진 않은 가 봅니다. 한번 이름을 불러보시지요.”
양만춘이 곁에 다가와 민망해하는 온달에게 소리를 죽여 말했다.
“풍아! 이리로.”
양만춘의 말대로 온달이 손을 내밀면서 하얀 개를 불러봤다.
웅크렸던 몸을 푼 개가 온달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꼬리를 흔들지도 경계를 하며 으르렁거리지도 않고 침착하게 자기를 부르는 온달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 개는 풍산이란 산악지대에서 사는 개라 합니다. 그곳은 이곳 못지않은 고산지대로 그곳의 개들은 천성적으로 산을 잘 타고 뭇짐승들을 가까이에서 봐 잘 알고 겁이 없지요.”
“그런 내력이 있군요.”
“저도 본 적은 없으나 들리는 이야기로 표범과 대적해 쉽게 당하지 않고 이 개 세 마리면 사람의 도움 없이 표범을 사냥한다 하지요.”
“대단합니다.”
“상대가 호랑이만 아니면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하여 그 지역에선 사냥 시 항상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양만춘이 개에 대한 설명을 하자, 온달도 하얀 개의 단단한 근육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개 풍이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아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온달과 양만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