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겨울곰과 산군 그리고 사냥꾼 (1)
온달과 평강은 연기가 피어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앞에 방금 찍힌 것 같은 큼지막한 동물의 발자국이 들어와 발을 멈추게 했다.
말에서 내린 온달이 넓적한 모양에 손바닥을 대어 보니,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다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상당히 넓었다.
육중한 무게가 땅을 짓눌러 만든 발자국, 곰의 발자국이 분명했다.
온달은 그간 자신이 상대했던 곰의 발자국과 비교해 곰의 크기를 어렴풋이 예측해 보았다.
“곰이오. 아주 큰… 족히 백관은 넘을 것 같소.”
온달이 말 위의 평강 공주를 올려다보며 근심 어린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평강이 손을 들어 곰의 발자국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사람의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둘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며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평강이 먼저 침묵을 깼다.
“이 곰은 사람들의 뒤를 쫓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서둘러 마을에 가 알려야겠습니다.”
족적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온달도 그녀의 말대로 이 곰은 사람들의 뒤를 쫓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에게 걸리는 것이 있었다.
‘분명 곰 발자국은 맞지만, 그간 내가 마주했던 곰과 크기를 비교할 때 터무니없이 크다. 더구나 저 수풀 속에 보이는 것은 늑대들의 발자국이다.’
평강의 시야엔 들어오지 않았으나, 그동안 산속에서 홀로 무예를 수련하며 사냥 대회를 준비해 왔던 온달의 넓은 시야엔 수풀 속 조심스럽게 찍힌 이리 떼의 발자국이 들어왔던 것이다.
개의 발자국보다 크고 십여 마리가 무리 지어 다니면서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이리들의 습성에도 불구하고.
온달의 눈은 수련을 통해 시야가 넓고 매서워, 여기저기 풀을 밟아 남긴 이리들의 발자국을 용케 발견하였다.
“공주, 마을에 가기 전 이 발자국들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소.”
“네, 그게 좋겠어요. 일단 마을에 들어가면 이 발자국들을 살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니, 발자국에 필시 이유와 목적이 담겨 있을 거로 생각해요.”
어느새 평강도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온달이 둘러본 이리 떼의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평강의 표정이 굳어 있자, 온달이 부드러운 미소를 담아 말했다.
“큰일이야 있겠소만, 그래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온달이 평강을 안심시킨 후, 잠시 앞뒤로 이어진 발자국들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곰은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발자국과 수레의 바퀴 자국 이외엔 더 이상 앞으로 향하는 곰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 떼의 발자국도 어지러이 널려 있었으나 앞으로 향하진 않았다.
“여기까지만 쫓아온 것 같구려. 그런데 곰의 발자국도 늑대들의 발자국도 여태껏 내가 보아온 것들보다 곱절은 크오.”
“장군님께서 사시던 죽령 지역의 곰과 늑대보다 이 지역의 곰과 늑대가 큰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짐승들은 추위가 심하고 험한 지역일수록 그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몸이 커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곳의 짐승들이 그러하옵니다.”
온달은 평강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이 많았다.
온달도 한강을 넘어 올라오면서 대동강을 건널 때쯤, 산과 들에 보이는 뭇짐승들의 크기 차이를 조금씩 느꼈다.
또한 높고 험한 고원들을 지나 압록강에 다다르면서 멧돼지는 물론이요.
노루와 사슴의 크기조차 죽령의 것들과 확연히 차이가 났었다.
“아, 그래서 그랬군요. 이제 좀 알겠소. 그간 신기한 일이라 생각만 했는데 그런 연유가 있었구려.”
“아무래도 수레에 실린 물건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장군, 서둘러 마을로 가셔야 함이 옳을 것 같사옵니다.”
평강은 곰과 이리 떼가 이유 없이 사람들 뒤를 쫓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온달을 재촉했다.
온달은 평강을 번쩍 안아 말 위에 앉힌 후, 자신도 누렁이에 올라타 고삐를 쥐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평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주, 그런데 이곳은 남녘보다 추운 곳이고 또한 지금은 아직 꽃피는 춘삼월도 아니오.”
“네, 그러하옵니다.”
“그럼, 곰은 아직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야 하는 것 아니오?”
온달의 물음에 평강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말의 옆구리를 박차고 달리며 급히 말했다.
“이 곰은 겨울곰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겨울곰? 그것이 무엇이오?”
그녀의 말에 놀라 온달이 재차 물었으나, 이미 평강은 마을을 향해 말을 재촉해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온달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온달이 뒤를 쫓아 따라오자 평강은 겨울곰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곰은 겨울잠을 자기 위해 좋은 굴과 나무밑동을 찾다가 못 찾고 겨울을 맞이하면 잠자기를 포기하고 겨울을 버티지요. 이런 곰을 겨울곰이라 합니다.”
“…….”
“겨울곰이 겨울잠을 잘 좋은 구멍을 발견하고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하나 더 있는데, 곰 자체가 겨울잠을 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라 하옵니다.”
“겨울잠을 잘 준비나 필요성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
듣고도 모를 소리에 온달이 반문하였다.
“곰이란 놈은 뱀이나 개구리와 달라 겨울잠을 자는 이유가 추위 때문만이 아니 오며 대체로 먹이 때문에 자는 것이지요.”
“…….”
“눈이 내려 먹을 것을 찾지 못할 겨울 동안 먹지 않고 겨울잠을 자려면 먹거리가 풍부한 늦가을에 기름진 먹이를 많이 먹고 몸 안에 축적해 놓아야만 하고 반드시 그래야만 구멍 안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발바닥만 핥으며 보낼 수 있는 법이지요.”
온달이 알아듣기 쉽게 잠시 말을 끊는 평강이었다.
“아! 그렇구려. 그럼 준비 안 되어 겨울곰이 된 놈 말고, 그럴 필요가 없어 겨울곰이 된 것은 어떤 경우요?”
“굳이 늦가을에 먹이를 비축해 먹어 두지 않고, 겨울이 되어도 먹을 것이 충분한 경우에 겨울곰이 됩니다. 하지만 눈 내린 겨울에 덩치 큰 곰이 산과 들에서 먹잇감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요.”
온달의 눈에 고삐를 쥔 평강의 가녀린 손끝이 떨리고 있음이 들어왔다.
“쉬운 것은 오직 인가를 습격해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것인데 굴을 찾지 못해 겨울곰이 되었든, 먹이가 풍족해 겨울곰이 되었든, 모든 겨울곰은 인가로 내려오는 것이 필연입니다.”
“…….”
“또한 먹이가 풍족하다고 느껴 겨울곰이 된 놈은 그 먹잇감을 인가에서 얻고자 처음부터 생각한 곰입니다. 겨울곰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미친 곰입니다. 장군, 서두르셔야 합니다.”
평강의 설명에 온달의 등줄기에서 굵은 땀이 흘러내리더니 이내 찬바람을 맞아 싸늘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그녀의 설명대로 겨울곰은 사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겨울을 나기 위한 먹잇감으로 여겨 한번 습격한 마을을 지속적으로 습격해 인축을 해쳤다.
그렇기에 겨울곰이 생겨난 일대의 사람들은 마을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온달이 말을 달리며 생각해 보니, 자신이 수풀 속에서 본 이리 떼의 발자국은 겁 없는 원시림의 이리들이 겨울잠을 자지 않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곰이 약해졌으리라 판단해 곰 사냥을 하기 위해 쫓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리들은 영리한 놈들로 인가와 가까워지자 추격을 포기한 것 같으나, 처음부터 사람을 목적으로 한 탐욕스런 곰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발자국이 멈추었지만, 공주의 말대로 역시 이놈은 마을 쪽으로 가 숨어 있겠군.”
온달과 평강 두 내외의 생각은 일치했다.
어둠이 내릴 무렵, 높지 않은 언덕을 하나 넘어서자 저 멀리 산 중턱에서 불빛들이 보였다.
산골 마을에 사람이 꽤 있는 것 같았다.
“화전민 마을이 분명합니다.”
이런 깊은 산속에 자리한 마을은, 사냥을 업으로 하는 사냥꾼 마을과 화전 밭을 일구는 화전민 마을 그리고 산채를 형성한 산적들 이외에 달리 다른 마을이 있을 리 없었다.
평강 공주가 화전민 마을이라 단정한 이유는 사냥꾼 마을에서 들려야 할 수많은 개들이 짖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지 않고, 목책이 없어 산적들의 산 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전민들이라면 곰에게 속수무책일 터인데 큰일이오.”
온달과 평강이 더욱 서둘러 말을 몰자, 점점 마을의 윤곽이 드러났다.
불빛의 개수로 보아 십여 채의 인가가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말 울음소리에 놀란 화전민들이 나와 온달과 평강 공주가 말을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때,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기다리다가 온달과 평강 공주가 가까이 다가오자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 이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이런 깊은 산에서 귀한 분을 맞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곧 밤이 깊어집니다. 날이 풀려간다 해도 아직 산속은 겨울이지요.”
산속에서 손님을 맞아주지 않고 내치면 그 객은 찬 이슬을 맞으며 노숙하다가 표범과 이리의 밥이 되기에, 이런 손님맞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왠지 촌장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선 일반적인 객 맞이가 아닌 온달과 평강 공주를 향한 깊은 존경심과 애정이 우러나오고 있었다.
이 깊은 산속 마을에도 거대한 검은색 강철 대검을 어깨에 멘 온달에 대한 소문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고구려를 포함한 삼한 전 지역 평민과 노비, 백성과 민중들의 희망이 된 온달.
고귀한 공주의 신분으로 오직 온달이란 인물의 능력만을 보고 평민을 낭군으로 모신 공주.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순박하고 선한 눈빛에 평강 공주는 말문이 탁 막혔다.
겨울곰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피난을 하라고 권고하려 생각했으나, 그들이 이런 산속까지 들어와 힘든 삶을 산 이유 또한 있을 것이었다.
또한 자신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 이미 겨울곰에 대한 소문도 들었을 터이기에, 굳이 묻지 않아도 마을을 떠나지 않은 사연이 가슴 저리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들이 피난을 할 마땅한 곳이 없을 것이며, 밑바닥 생활을 하는 그들을 반겨 줄 마을 또한 없었으리라.
촌장이 화전민 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큰 자신의 집으로 온달과 평강 공주를 모신 후,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근처를 두 분께서 통과하실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는데, 참 다행이며 잘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미친 곰이 겨우내 마을들을 습격해 우리 마을 이외에 남은 곳이 없지요.”
“설마 우리들을 기다린 것이오?”
마음이 뭉클해진 온달이 묻자, 촌장이 주름 가득한 얼굴에 환한 웃음으로 자글자글한 주름을 더욱 만들며 답했다.
“사실 갈 곳 없어 남아 있었는데, 기다린 셈이 되었군요. 송구하옵니다.”
온달도 산속 생활을 하였기에, 촌장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모아 둔 재산 없이 이 허름한 초막을 버리고 성안에 들어가면 집 한 칸 없는 비렁뱅이 신세로 살거나, 남의 집 노비가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마을을 찾아간들 별반 다를 바 또한 없었다.
이들은 이곳에 머물면 겨울곰에게 죽으리란 것도 알지만, 다른 수도 없었고 온달과 평강 공주가 근처를 지난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하룻밤이라도 모시고 싶은 마음에 아직 떠나지 못하고 기다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