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김태준
1.
주총에서 삼우그룹 측은, 김대영과 김태준 측은 참패했다.
그들은 여전히 삼우그룹의 지배자이긴 했지만, 미래에도 삼우그룹의 지배자로 남을 수 있는지는 미지수가 됐다.
“김 회장이 이대로 죽으면, 그 양반이 가진 지분은 태준이하고 도은이한테 균등하게 상속이 될 거야. 그럴 경우, 상속세도 상속세지만, 두 사람이 백중지세가 되지.”
다시 4개사의 합병을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1차에서 실패한 이상, 2차는 시도조차 하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 됐다.
“언론도,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전부 등을 돌렸어. 더러운 새끼들, 평소에 김 회장한테 그렇게 용돈 받으려고 넙죽거리던 것들이…….”
김대영은 이번엔 정말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삼우병원 VIP실에 입원했으며, 주총이 끝나고 1주일이 지난 8월 19일 금요일 현재까지도 의식 불명 상태로 호흡기에 의존한 채 가까스로 생명만 유지하고 있었다.
“차라리 김 회장이 멀쩡하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현금 마련해서 증여세를 토하고서라도 지분을 태준이한테 몰아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도 못 되니까.”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이 중천에 뜬 정오.
박태화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며, 강철을 바라봤다.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 물음에 박태화의 맞은편에서 차가운 녹차를 마시던 강철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말입니다?”
“허, 이 사람. 계획 없는 척하기는. 나한테도 말해주기 싫다는 건가?”
박태화의 말에 강철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일단은 뭐 김도은 사장한테는 호텔하고 리조트, 백화점 그리고 그 외 관광문화 계열사를 약속하긴 했는데, 나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감을 못 잡았다는 겁니다.”
“도은이한테?”
“네.”
“허허. 도은이가 반대표 행사했다는 말 듣고서 설마 했는데, 역시나, 손을 잡고 있었구만?”
“뭐, 그쪽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데, 뿌리칠 이유는 없잖습니까?”
박태화는 피식 웃었다.
“미쓰토모라고 했나?”
“네.”
“삼우건설, 삼우리조트, 삼우상사, 가야호텔. 이렇게 4개 회사만 지분이 있고?”
“네. 25%씩 있습니다.”
“이야…… 그럼 만약에 이대로 김 회장이 죽어서 태준이랑 도은이가 분할상속하면…… 자네가 대주주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따지면.”
“허허허. 아무리 그래도 허허허.”
박태화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거로 삼우그룹을 지배할 생각은 없습니다.”
강철은 그의 생각을 읽고는 딱 잘라 말하며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삼우그룹은 고작 그거 하나로 통제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아니 누가 뭐라고 했나? 허허허.”
박태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뜨끔했다.
‘이 친구…… 진짜 무슨 독심술 같은 거라도 배운 거야? 뭐야?’
그런 박태화를 바라보며, 강철은 생각했다.
‘김태준과의 협상을 빨리 끝내야겠어. 괜히 또 장인이랍시고 개입하려고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그 순간 두 사람을 위한 식사가 나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사업 이야기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며, 식사 자리를 편안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2.
8월 25일 목요일 저녁 7시.
가야호텔 사장실.
강철은 김도은과 마주 앉아 있었다.
“제가 가진 삼우전자 지분은 기껏해야 0.5%에요.”
“대신 삼우상사, 삼우건설 지분이 각각 9.23%, 8.5%가 되지 않습니까. 심지어 최근에 차명을 전부 실명화해서 다 김 사장님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것까지 다 미쓰토모로 넘기시면, 미쓰토모가 가지고 있는 삼우리조트와 가야호텔 지분을 전부 김 사장님께 넘기겠습니다.”
“그게 우리 약속이었죠.”
“그걸 이제 성문화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강철은 서류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일종의 각서였다.
“한국과 일본, 양국 법원에서 모두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양식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도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준비된 도장을 꺼내 자신을 위한 자리에 꾹 찍었다.
“이 계약서가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 미쓰토모와 삼우그룹은 그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게 되는 겁니다. 삼우전자만 제외하고 말이죠.”
“청산이라…… 우리의 관계도 청산하는 건가요?”
“뭐, 김 사장님이 더 이상 저하고 상관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끝내야지 않겠습니까?”
김도은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강 실장님하고 나하고는 계속해서 봐야 할 사이 아닌가요? 예은이도, 어쩌면 강 실장님하고 봐야 할 거고 말이죠.”
“그럼 계속 가는 거고 말입니다.”
강철의 말에 김도은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웃음기를 싹 빼고는, 강철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가 순순히 딜을 받아들일까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빠가 거부하면, 우리의 계약도 효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렇습니다.”
김도은은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은 마지막 불안감을 여전히 떨치지 못한 채, 강철에게 말했다.
“조심하세요. 오빠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그 말이 순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과, 김태준을 믿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됨을 알고는 강철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도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3.
8월 27일 토요일 오후 3시.
이태원동 김대영의 자택 별채 거실.
강철은 김태준과 소파에 마주 앉아 대면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또 대면할 줄은 몰랐어요.”
김태준은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강철에게 말했다.
강철은 무심한 얼굴로 가만히 김태준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버지하고 강 실장이 그렇게 싸울 때, 참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그 말 이 진심임을 알았기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준은 가만히 강철이 내민 서류를 들어 읽어보았다.
그리곤 이내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그대로 도장을 꺼내 자신이 마땅히 찍어야 하는 자리에 찍었다.
그 모습에, 강철은 심히 당황했다.
“왜요? 이게 강 실장님이 바라는 거 아니었어요?”
김태준의 말에 강철은 한 방 먹은 표정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김태준은 미소를 지으며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미쓰토모가 가지고 있는 건설, 상사, 리조트 그리고 가야호텔의 지분을 나와 도은이에게 모두 넘기는 대가로, 건설과 상사, 리조트, 생명 그리고 가야호텔이 가지고 있는 전자 지분을 모두 미쓰토모에게 건넨다. 심지어, 리조트랑 가야호텔은 미쓰토모 지분 전체가 도은이에게 가고, 나는 건설과 상사 쪽 지분만 얻는다.”
김태준은 피식 웃었다.
“아마 옛날의, 그러니까 지금 강 실장님 나잇대의 저였다면 이딴 제안은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땐, 저도 욕심이 많았으니까요.”
김태준은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김태준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욕심이 많은 분이셨어요. 자신의 장자권을 인정받고 싶어 하셨죠. 그래서 이복형제들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셨던 거고요.”
본래 김태준은, 김대영의 아들답게, 그리고 그가 유도한 대로, 욕심 많은 아이로 자라나고 있었다.
“근데…… 그렇게 욕심을 내면서 많은 것을 가져봤자…… 자기 혈육에 대한 측은지심 하나 못 가지니까, 사람이 참 무섭게 되더라고요.”
김대영은 자기 이복형제와 그 자식들에게 굉장히 가혹한 조치를 내렸다.
모든 재산이 몰수됐고, 그들 대부분은 빈민층이 됐으며, 심지어 김대영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은 끝내 자살까지 하고 말았다.
“스물다섯 살 때, 유학 간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술이나 진탕 마시자면서 단란주점으로 절 데려가더라고요. 그때까진 걔들이 제가 재벌인지 몰랐으니까, 그랬던 거겠죠.”
그리고 그곳에서, 김태준은 유흥접대부로 전락한 사촌을 보게 됐다.
“충격이었어요. 그 애나, 저나.”
김태준은 사촌과 따로 방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촌은 김태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고, 김태준은 안타까운 마음에 사촌에게 돈 100만 원을 일단 주고는, 다시 찾아올 테니 이 일을 청산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갔을 때, 지배인이 그러더라고요. 그 아이가 자살했다고.”
김대영의 친족에 대한 가혹한 처분은, 김도은에게만 트라우마를 남긴 게 아니었다.
김태준에게도 똑같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다만, 트라우마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그 이후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죽으면 다 두고 떠날 건데, 뭐 하러 그렇게 욕심을 내야 할까?”
김도은이 자신의 소유를 잃을 것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면, 김태준은 소유욕의 허망함을 느끼며 공허감에 휩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래서 내가 삼우 회장이 되면, 강 실장하고는 따로 만나서 화해를 하려고 했어요. 아버지 대의 일은 다 잊자고. 근데…… 일이 이렇게 됐네요.”
김태준은 다시 시선을 강철에게로 돌렸다.
“제가 여기에 도장을 찍은 이상, 강 실장이 삼우전자의 대주주가 될 거예요. 물론, 표면상으론 미쓰토모겠지만요.”
김태준은 서류를 직접 서류 가방에 넣은 후, 그것을 밀봉한 뒤 강철에게 밀었다.
“총수 일가가 사라진 삼우전자는, 아무리 대주주라고 해도, 함부로 쉽게 움직일 순 없을 거예요. 강 실장도 알겠지만, 재벌 기업의 경영은 단순히 지분이 얼마나 있느냐가 전부가 아니잖아요?”
김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철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류 가방을 챙겼다.
“식사라도 대접해야겠지만, 뭐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 집안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조문객으로 만나서, 같이 이야기나 나눕시다.”
강철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김태준은 그런 강철을 집 대문까지 배웅했다.
“강 실장은 아직 젊으니까, 내 말이 이해가 잘 안 갈 거예요. 근데 명심하세요. 진짜 소중한 게 뭔지를 깨닫는다면, 지분이니 권력이니 하는 게 다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될 거에요. 조심히 가세요. 차 운전 조심하시고.”
김태준은 그렇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강철은 차 안에서 잠시 김태준을 바라보다가, 이내 차를 출발시켰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라…….’
강철은 그길로 근처 한남동에 있는 엄민식의 집으로 향했다.
“삼촌!”
집에서 강아지와 함께 놀고 있던 엄민식은, 강철이 오자 반갑게 웃으며 달려와 안겼다.
“민식이, 잘 놀고 있었지?”
“응! 길동이랑 같이 잘 놀고 있었어!”
엄민식의 말에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앙-! 앙-!]
그 모습을 바닥에서 지켜보던, 조금 전까지 엄민식과 놀고 있던 치와와 ‘길동이’가 앙칼진 울음소리를 냈다.
“길동이 쉿!”
엄민식은 강철의 품 안에서 그런 치와와 ‘길동이’에게 조용하라 손짓했다.
[앙-! 앙-!]
길동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앙앙거렸고, 엄민식은 계속해서 조용하라며 손짓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강철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게 무엇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됐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