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세 친구 (2)
3.
2015년 10월 12일 월요일 오전 10시.
경기도 남양주 외곽.
주위에 민가라곤 으리으리한 대저택 하나뿐인 곳.
그곳 대저택 뒷마당에서, 한 노인이 흔들의자에 앉은 채 자신에게 온 편지를 보고 있었다.
“허허허. 태화 이 녀석…… 전화로 내가 간다고 했는데 뭘 이런 것까지 다 보내고 있어?”
편지는 박태화의 딸 태성국제상사 상무 박정연과 일신그룹 경영지원실장 강철의 약혼식 초대장이었다.
분명 며칠 전 박태화와의 통화에서 참석하겠다는 뜻을 전했건만,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손수 초대장까지 보냈다.
그만큼 박태화가 노인을 신경 쓴다는 뜻이기도 했고, 딸의 약혼식에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 자기 그룹을 물려줄 딸자식 약혼식이니까, 당연히 이렇게 하겠지.”
노인은 껄껄 웃으며 편지를 접어 흔들의자 옆에 있는 조그만 원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노인은 가만히 뒷마당에 핀 가을꽃과 또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며 혀를 내밀고 있는 자신의 반려견, 아프간하운드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회장님.”
정갈한 인상의 남자가 뒷마당으로 폰을 들고 들어왔다.
“마츠모토 상사로부터 전화입니다.”
남자의 말에 노인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마츠모토?”
노인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공손하게 양손으로 폰을 건네주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노인의 입에선 유창한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네, 맞습니다. 접니다.”
노인은 가만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일본으로부터의 소식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 노인은 눈을 지긋이 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내로 찾아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노인은 잠시 폰을 든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로…….”
노인의 마른 눈가에 아주 가볍게 이슬처럼 습기가 맺혔다.
잠시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던 노인은 그때까지도 떠나지 않고 자기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동경행 비행기…… 최대한 빠른 것으로 알아봐. 일본에 좀 갔다 와야겠어.”
“네, 차 대기 시키겠습니다.”
남자는 곧장 뒷마당에서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노인은 한동안 가만히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식아, 가자.”
노인의 부름에 멍하니 꽃을 보고 있던 아프간하운드가 꼬리를 흔들며 그에게 다가왔다.
노인은 아프간하운드 영식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준 후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하나둘씩 떠나가고 나만 남았구나.’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차갑다고 느끼며, 그렇게 노인, 굿프렌드그룹 명예회장 맹우균은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4.
“늦었지만, 아드님 결혼 축하 선물입니다.”
10월 26일 월요일 오전 10시.
강철은 여의도 야당 중앙당사 대표실에서 야당 김 대표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허, 뭘 이런 걸 또.”
김 대표는 강철이 건넨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양주를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하필 또 그날 러시아에 일정이 생기는 바람에 저 대신해서 김덕흠 부회장을 보낸 게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강철의 말에 김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허허.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시고. 어차피 또 결혼 전에 따로 전화도 주고 했으니까, 된 거 아니겠어?”
“신혼여행을 즐기는 부부한테 찾아가서 전해주기는 그렇고, 저도 또 저대로 준비할 일이 많아서 오늘 말고는 또 당분간 볼 날도 마땅찮으니 원.”
강철의 말에 김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식 준비는 잘돼 가고?”
“박 회장님 덕분에 잘돼 가고 있습니다. 초청장 받으셨습니까?”
“받았지. 내 그날 우리 지도부 다 끌고 가려고.”
그렇게 말하며 김 대표는 자기 딴에는 농담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우리 당 사람들한테 축의금 받아놓고, 파혼하면 곤란해. 다 추징해버릴 거야.”
그것이 딱히 악의가 없음을 관심법을 통해 읽었기에, 강철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 양반이 과연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2012년 총선에서 역사가 한 차례 뒤틀리고, 그 여파로 그해 대선에서까지 원 역사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서, 이전 생의 역사에선 대권주자로 올라섰다가 순식간에 몰락했던 김 대표가 현재 야권의 유일무이한, 대체 불가능한 대권주자가 돼 있었다.
‘분위기도 여당이 이길 수 없는 분위기고 말이지.’
이제 반년이 조금 넘게 남은, 오는 2016년 총선에서 여당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크게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또 그렇게 크게 잘한 일도 없었기에, 여당의 인기는 시들했다.
거기다 여당 내부에서 당 대표 계파와 대통령 계파 그리고 제3의 계파가 분열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었기에, 자칫 총선 공천 시즌 때 분당될 가능성도 있었다.
‘여당에 중심인물이 없는 것도 김 대표의 대권가도에는 큰 도움이 되고 있고 말이지.’
그런 만큼, 강철은 유력한 차기 대통령인 김 대표에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가 삼우그룹과는 그렇게 친하지 않으니 다행이야.’
다행히 김 대표는 삼우그룹보다는 태성그룹이나 현성그룹과 더 친했다.
그의 부인이 태성전자 1차 하청기업의 대주주였고, 이번에 사돈 관계를 맺은 집안이 현성자동차 1차 하청기업 오너 일가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삼우그룹이 돈으로 사기엔, 본인이 돈이 많기도 하고 말이야.’
즉, 김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적어도 당분간 삼우그룹의 영향력은 태성이나 현성에 비해 약해질 것이란 것이다.
물론 계속 약해진 상태로 있진 않을 것이다.
강철이 김대영의 장부를 통해 확인한, 수십 년 세월을 돈으로 쌓아 온 인맥의 범위와 깊이로, 삼우그룹은 정권 출범 후 반년만 지나면 모든 영향력을 회복할 터였다.
그래도, 김 대표가 된다면, 그리고 지금처럼 강철이 태성그룹과 식구가 되고 현성그룹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삼우그룹은 강철에게 더는 위협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거목과 일신의 합병도 일사천리로 해결될 거고.’
비단 강철이 유력 대권주자인 김 대표에게 신경 쓰는 것은, 삼우그룹 때문만은 아니었다.
삼우그룹이라는 외적과의 싸움 이후엔, 거목과 일신의 합병이라는 내부적 일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두 거대 그룹의 합병은, 분명 순탄치만은 않을 터였다.
‘거목이야 어차피 내가 완전하게 통제하니까 문제가 없겠지.’
문제는 일신이었다.
거목과는 달리, 일신은 소위 주총꾼이라는 사람들이 딴지를 걸려면 얼마든지 걸 수 있는 구조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은 한보성이었다.
‘차명 계좌를 내가 접수했다곤 하지만, 여전히 합법적으로 들고 있는 지분이 너무 많아.’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인 한준영이 들고 있던 2%는 없는 셈 치더라도, 한보성이 합법적으로 자기 명의로 들고 있는 12%는 여전히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비록 강철이 이전에 엄근식의 차명 계좌를 훔쳤을 때 그리고 김대영의 장부를 빼돌렸을 때처럼, 비슷한 방법으로 한보성의 차명 주식 8%를 빼돌려 청월의 소유로 돌렸다곤 하지만, 그래도 완전하게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한보성의 외가인 보국그룹이 삼우그룹과 손을 잡고 공정거래위원회라도 압박하면 합병 승인이 나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지.’
그랬기에 강철은 권력과 친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가장 유력한 미래 권력과는 확실하게 친분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지만 강철은 한쪽에 모든 것을 베팅하진 않았다.
김 대표와의 만남이 끝난 후, 강철은 중구 일신그룹 본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가서 여당 대표와 만남을 가졌다.
“내년 총선이 참 걱정이에요, 걱정.”
여당 이 대표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호남 쪽 중진들은 비대위 만들자 하고 있고, 수도권은 초선 중심으로 조기 전대 이야기나 하고 있고.”
호남 중진은 여당의 고만고만한 차기 대권 주자 중 그나마 지지율이 5%가 넘는 한 의원의 파벌이었다.
그리고 수도권 초선은 대통령 중심의 파벌이었다.
“그나마 충청권이랑 영남 소장파, 원외 지역위원장들 그리고 비례의원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이 대표는 자신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충청권과 영남 소장파를 언급하면서, 아차 싶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강 실장님도 계시고.”
강철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강철에게 이 대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항상 강 실장님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덕분에 내가 이 우리 의원들 소고기도 사주고 말이에요. 허허허.”
야당 김 대표와는 달리, 여당 이 대표는 그렇게 돈이 많지가 않다.
그렇기에 그는 돈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돈을 가려가며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그가 돈을 받지 않는 존재는 삼우그룹이었다.
그것은 삼우그룹에 대한 그의 사적인 악감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삼우그룹의 돈을 받는 순간 그 거미줄에 걸려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신 그는 적당한 레벨의 재벌로부터 후원받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적당한 레벨의 재벌에는 일신과 거목이 포함돼 있었다.
“저야 뭐, 나라를 이끄시는 분들이 밥을 잘 챙겨 드시길 바라는 마음뿐이지 않겠습니까?”
러시아와는 달리, 한국에선 한쪽 정파에만 집중 투자를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았기에 강철은, 유력한 대권주자이자 강력한 당내 리더십을 구축한 김 대표와 인맥을 통한 친분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여당의 이 대표에게도 섭섭잖게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학생 운동권 세력의 큰 형님이자, 재야의 대부, 노동 운동의 마지막 깃발. 이런 사람은 본인이 크게는 못 돼도, 광범위한 인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여당이 총선에서 패배한다면, 한동안 이 대표는 잠행을 해야 할 터였다.
어쩌면 정계 은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정계에서 모습을 감추더라도, 범여권 정파 내에서 그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정치를 이어갈 것이다.
지금은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결국 호남 중진들과도 그는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 만큼, 강철은 그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 11일에 제 약혼식 있는 건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죠. 허허. 한 의원하고 또 호남 선배들하고 같이 찾아갈 예정이에요.”
“그날 제 약혼식장에 김 대표님도 온다고 했습니다.”
“허허허. 거기서 여야 당수회담이라도 해야겠네요. 허허허.”
“편안한 마음으로 오십시오.”
강철은 그렇게 약혼식을 앞두고, 미래를 위한 포석을 준비해 놓았다.
‘삼우그룹 4개 관계사 합병 절차는 내년 4월 이후에 시작될 거야. 그 전에 무조건 그걸 막을 힘을 구축해 둬야 해.’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