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박정연 (2)
3.
6월 1일 월요일 오전 6시 30분.
박정연은 눈을 떴다.
침대에서 한동안 멀뚱히 천장만 바라보던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창가로 가 커튼을 활짝 젖히곤 창문을 열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싱그러운 아침 바람이 들어왔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박정연은 가만히 온몸으로 햇빛과 바람을 맞고 있다가, 이내 왼쪽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진짜야?’
박정연은 조심스럽게 원탁으로 갔다.
거기에 놓여 있는 폰을 들어 그녀는 화면을 켰다.
바탕화면으로 설정된, 강철과 자신의 셀카를 보며 박정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짜네?’
그녀는 뭔가 온몸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다가, 이내 다시 침대로 몸을 던졌다.
푹신하고 드넓은 침대 위에서 그녀는 뒹굴었다.
‘어머 대박이야. 어떡하니?’
연애가 시작됐다.
오늘부로 2일 차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자신과 강철 그리고 박태화뿐이다.
그것이 박정연을 갑갑하게 했다.
박정연은 세상에다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이 강철의 애인이라고, 내가 이 남자의 여자라고.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쓸데없이 매스컴에 이름이 오르내리면 곤란해. 너도 그리고 강 실장도.』
지난밤, 박정연에게 박태화는 그렇게 경고했다.
『강 실장도 이 부분은 잘 이해하고 있을 거니까, 너만 조심하면 돼.』
태성그룹의 후계자가 일신과 거목을 지배하는 실력자와 사귄다.
분명 상당히 뜨거운 이슈가 될 터였다.
‘그래, 철이가 아직은 매스컴에 대놓고 자기를 잘 드러내진 않으니까…….’
문득, 그녀는 강철과 자기 사이의 호칭이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나, 철이. 이렇게만 부르기도 좀 그렇잖아. 뭔가 애칭 같은 게 없을까?’
통제된 재벌 총수 일가의 삶을 살아왔던 만큼, 그녀에겐 이번이 첫 연애였다.
그리고 처음인 만큼, 그녀에게는 많은 환상이 존재했다.
그 환상을 하나하나 충족시켜 나가고 싶은 것이 그녀의 욕망이었다.
‘주말에 데이트? 아니면 둘 다 회사가 근처에 있으니까, 점심시간에 틈을 내서 데이트?’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박정연은 자기가 아침 인사도 안 건넸다는 것을 깨닫곤 메신저 앱을 열었다.
그리곤 여전히 ‘일신 강철 실장’이라고 저장된, 강철을 찾았다.
“어?”
그리고 강철의 프로필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당황했다.
“이, 이게 왜 프사야?”
강철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어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강철이 자신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는 셀카였다.
“어?”
그리고 그것을 보고 그녀가 당황하고 있을 때, 기자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문자와 메신저 메시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태극일보 최 기자입니다. 혹시 일신그룹 강철 경영지원실장과 사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일신 강 실장 프로필 사진이……>
<일신 강 실장……>
모든 질문은, 단 하나만을 묻고 있었다.
강철과 무슨 관계냐?
‘아, 아빠가 비공개로 하라고 했는데……’
그리고 거기에 대해 그녀는 아무런 답장도 보낼 수 없었다.
4.
“진짜 사귀시는 겁니까?”
6월 1일 월요일 오전 8시 45분.
일신그룹 경영지원실장실.
강철은 자신을 찾아온 주요 일간지 경제부 기자들과 함께 모닝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자들이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아니 언제부터 썸을 타신 겁니까?”
그들은 강철과 박정연의 관계를 묻기 위해 각 언론사를 대표해서 찾아온 자들이었다.
“어제부터 1일입니다.”
그리고 강철은 기자들에게 그들이 듣고자 하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야.”
“대단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기자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특종을 잡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철은 그런 기자들의 기대를 살짝 꺾어줬다.
“기자님들 입장에선 특종이겠지만, 저와 태성 박 상무 입장에선 사생활입니다. 우리가 뭐 연예인도 아니고, 이제 겨우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인데, 기사화는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기자들은 살짝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 그렇습니까?”
“이게 아무리 그래도 재벌 기업 이사면 공인이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태성그룹 3세와 관련된 문제라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기자들에게, 강철은 당근을 던져줬다.
“이게 뭡니까?”
강철이 전화를 한 통 걸자, 경영지원실 직원들이 들어와 각 기자들에게 조그만 선물상자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제 곧 여름 아닙니까. 힘내시라고 홍삼 세트를 소박하게 준비해봤습니다.”
기자들은 선물상자를 열어보았다.
강철의 말대로, 홍삼 엑기스를 담은 조그만 포 30개가 담긴 조그만 상자 2개가 선물상자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옆에는, 조그만 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 봉투 안에는, 100만 원짜리 수표가 5장씩 들어 있었다.
“허허허허. 이거 참…… 항상 우리 챙겨주시는 분은 강 실장님뿐이십니다.”
“잘 챙겨 먹고, 열심히 일신그룹을 위해 좋은 기사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좋은 기사로 보답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강철은 기자들이 공식적으로 자신과 박정연의 연애를 기사화하는 건 막았다.
그리고 그것을 막자마자 강철은 프사를 내렸다.
[프사는 왜 내린 거야?]
강철이 프사를 내리자마자, 아침부터 왜 프사를 그거로 올렸냐며 전화를 했던 박정연이, 진짜로 내린 지 1분이 조금 지나서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침엔 올렸다고 뭐라 하더니?”
[그거야 당황스러워서 그랬던 거고, 아니, 그렇다고 진짜로 내려?]
강철은 박태화를 팔아먹었다.
“장인어른이 내리라고 하시더라.”
[자, 장인어른? 아빠?]
“그럼, 내가 뭐 따로 또 애인이라도 있었나?”
박정연은 그 이후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마디 건넨 후,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모솔 특징인가?’
강철은 되게 어린아이 같은 모습의 박정연을 보곤 피식 웃었다.
그리곤 통화를 끝내자마자 박태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그래, 내 예비 사위가 됐다는 걸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특히, 삼우그룹 사람들한테 좀 많이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강철의 말에 전화기 너머로 박태화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퍼뜨린 거다?]
“박 상무한테는 박 회장님 지시로 프로필 사진 내렸다고 했으니, 그렇게 알아 두시면 되겠습니다.”
[허허, 아주 나를 죽어라 활용하는구만?]
“이왕 도와주시는 거, 화끈하게 도와주십시오, 회장님.”
강철은 미소를 지었다.
수화기 너머 박태화도 껄껄 웃었다.
[그래, 좋아. 그렇게 하라고. 그리고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밥이나 먹지. 정연이까지 껴서 셋이서.]
“네, 알겠습니다. 좋은 와인 한 병 챙겨 가겠습니다.”
[하하하. 말이 잘 통해서 좋아.]
전화를 끊고 나서, 강철은 가만히 창가로 갔다.
그리곤 담배를 한 대 물고 불을 붙인 후,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모아둬야지.’
삼우그룹과의 싸움은, 일시 휴전 상태일 뿐이었다.
김대영이 살아 있는 한, 그리고 김태준이 김대영의 뜻까지 상속해 자신을 적대하기라도 하는 한, 전쟁은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강철은 결코 쓰러질 생각이 없었다.
단순히 금만 모으자던 소박한 목표는 이미 사라졌다.
푸틴의 죽음으로 3차 세계 대전과 핵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문명 종말의 위협이 사라진 이상, 그의 목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고 더 키우는 것으로 변했다.
‘이 끝에 뭐가 있느냐 따위의 철학적 논쟁은 지금은 사치일 뿐이지.’
박정연과의 연애는, 일차적으로는 완벽하게 박태화를 자신의 편으로 굳히기 위함이었다.
물론, 지금도 박태화는 강철의 편이었다.
그러나 만약 강철이 삼우그룹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강철이 박정연의 연인이 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박태화의 사위가 된다면, 그래서 박태화와 강철이 한 식구가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나에 대한 공격은 곧 박태화에 대한 공격이 되는 셈이지.’
일신과 거목의 힘에 강철의 초능력만으로 유지하는 힘의 균형이, 어쩌면 완전히 강철 쪽으로 쏠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김도은의 힘으로는 삼우산업의 탄생을 막을 수가 없어.’
삼우그룹과의 싸움을 끝내는 방법은, 조만간 있을 삼우상사, 삼우건설, 삼우리조트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합병을 막는 것이었다.
그 합병만 무산되면, 그리고 이후 김대영이 예정대로 2017년에 사망하면, 그대로 삼우그룹은 4개로 분할되고, 그 중 중요한 파트인 삼우전자는 아예 주인 없는 회사가 돼 버린다.
‘삼우전자를 내가 삼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애초에 그게 가능한 크기가 아니니…….’
합병을 막기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을 두고 강철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삼우그룹이 합병을 위해 했던 행동의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삼우산업의 탄생에는 연기금이 큰 기여를 했어.’
이전 생에, 삼우그룹은 자사 주를 5% 이상 들고 있는 연기금이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로비했다.
그것을 강철은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일단 여당 대표가 내게 우호적이라곤 하지만, 여전히 삼우그룹이 더 앞서고 있어, 영향력 측면에서는.’
삼우그룹의 관리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하다못해 별 볼 일 없는 비례대표 의원까지도 관리대상으로 두고 주기적으로 뇌물을 제공하며 자기네 바운더리 안에 넣어두고 있었다.
현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현찰로, 그걸 안 받는 사람에겐 상품권이나 골프 이용권 혹은 술 등의 현물로.
‘장부만 봐도 그 영향력 자체가 엄청나.’
장부가 김대영에게서 사라졌다곤 해도, 김대영이 여태껏 투자해온 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상당수의 정부 인사는 삼우그룹의 편이었다.
그리고 만약 삼우그룹이 총수 일가의 사활이 걸린 합병안을 밀어붙이기 위해 전방위적인 로비를 할 경우, 지난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삼우산업 탄생은 성공할 터였다.
‘태성그룹의 힘을 빌려서, 내가 쥔 장부의 능력을 합치면, 역공작이 성공할 수도 있을 거야.’
강철은 거기에 역공작을 걸 생각이었다.
즉, 삼우그룹이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연기금을 압박하면, 강철은 반대표를 던지도록 압박하겠다는 게 전략이었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 이게 아니고선…… 힘들지.’
그렇게 하기 위해선, 태성그룹도 상당한 출혈을 각오해야 했다.
그랬기에 강철은 박태화를 아예 식구로 만들 생각으로, 박정연과 연애를 시작한 것이었다.
‘뭐, 그리고 예쁘잖아. 나이도 나랑 비슷하고. 나도 내 성을 딴 자식 하나는 둬야지? 안 그래?’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가능하면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약혼식을 올렸으면 좋겠어. 그래야 확실히 못 박는 게 가능할 거니까.’
삼우그룹이 아직 조용히 있을 때,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하자.
그게 강철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강철은, 자신의 생각에 박정연과 박태화 모두 동의해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적어도 강철이 읽은 그들의 내면 의식에 따르면, 그들이 거부할 리는 없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