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박정연 (1)
1.
5월 31일 일요일 오후 12시 30분.
“오랜만인 것 같다, 그치?”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단둘이 밥을 먹는 건 거의 1년 만이죠.”
실제로 1년하고도 5일 정도가 지났다.
박정연이 막 태성전자 마케팅부서에 입사한 후 만나서 밥을 먹은 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렇네? 어쩜, 너나 나나 이렇게 바빴을까?”
그러면서 박정연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나보단 너가 더 바빴겠지만.”
강철은 미소를 지었다.
“피차 똑같이 바쁜 겁니다. 누구는 더 바쁘고, 누구는 덜 바쁘고가 아니라.”
그러면서 강철도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누님은 바쁘게 산 덕에 1년 만에 태성국제상사 상무가 되신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박정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어디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런 거겠어? 그냥 내가 회장 딸이니까 그런 거겠지.”
그러면서 그녀는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러고 보니 1년 전에도 여기서 먹었었네? 우연인가? 아니면 네가 계획적으로 잡은 건가?”
“우연입니다.”
우연이었다.
강철은 계획적으로, 1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에서 또 만난 게 아니었다.
적당한 식당을 잡다보니, 그저 이곳, 양식집으로 잡혔을 뿐이었다.
“계획적인 것 같은데?”
“일요일에도 우리 둘 다 일하는 처지에, 회사가 있는 중구에 식당을 잡는 게 적당하고, 또 중구에 이렇게 프라이빗 룸을 갖춘 식당이 몇 없지 않습니까? 우연인 겁니다. 아니, 필연인 거죠.”
“말장난이네.”
박정연은 그렇게 말하며 스테이크를 한 조각 썰어 입에 넣었다.
“어제 박 회장님한테 전화를 받았습니다. 거의 12시가 다 돼 가던 한밤중에 말입니다.”
“아…… 맞다. 나도 들었어. 아빠가 좀 술에 많이 취했었지?”
“뭐, 이성을 잃으실 만큼 취하신 건 아니었습니다. 야당 대표와 술을 한 잔 걸치셨다던데,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원래 아빠가 술에 잘 안 취하셔.”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
강철은 포크를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박정연은 그런 강철은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혹시…… 내 이야기를 하셨나?’
박정연의 관심사는, 박태화가 강철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 그러니까 태성그룹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를 했느냐는 것이었다.
강철이 1년 전에 해준 말도 그렇고, 최근 그녀의 고속 승진도 그렇고, 언론에 공공연하게 보도되는 내용도 그렇고, 모든 측면에서 태성그룹의 후계자는 박정연이라는 게 주류 여론이었다.
그 누구도 박동진이 후계자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부친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박정연에게, 그 속마음을 읽으면서, 강철은 말했다.
“뭐라고 했는데?”
“언제 사귈 거냐고.”
“…… 응?”
박정연은 귀를 의심했다.
“박태화 회장님께서, 저보고 언제 누님하고 정식으로 연애 시작할 거냐고 물으셨습니다. 술에 취하신 채로.”
박정연은 얼굴을 붉혔다.
“어머, 아빠도 참…….”
그녀는 물을 한 컵 쭉 들이켰다.
“그래서, 우리 언제 사귈 겁니까?”
그런 박정연에게 강철은 돌아가지 않고 다이렉트로 물었다.
“푸흡-!”
물을 마시던 박정연은 그만 불을 뿜고 말았다.
다행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마시고 있던 터라, 그 물은 바닥에나 분출됐을 뿐이었다.
“뭐, 뭐?”
박정연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강철을 바라봤다.
1년간 사무실에서 일하고, 또 피부 관리도 받고 하느라 군 복무 시절보단 한결 피부가 밝아진 상태였기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은 금방 표가 났다.
“솔직히 누님도 저한테 호감을 갖고 있잖습니까?”
2013년 11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 테러 사건 이후, 박정연은 자신을 감싼 강철에게 호감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강철은, 그 호감이 단순히, 두려운 상황에서 함께 한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흔들다리 효과’의 일환인지, 아니면 진심인지를 분간할 필요가 있었다.
관심법으로 당장 파악 가능한 건, 박정연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이었을 뿐, 그 호감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까진, 그 당시엔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철은 무려 1년을 그녀와 만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강철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상당히 깊은 수준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이 계속해서 말을 놓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함마저 느끼고 있다는 것을.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한참 일하는 사람 불러내서 밥 먹자는데 덥썩 나온 거 아니야. 그것도 당일에 부른 건데.”
강철은 말을 놓았다.
박정연의 마음이 흔들리는 건, 꼭 관심법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표정과 안색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였다.
“…… 진심이야?”
“그럼, 내가 공연한 헛소리를 할까?”
“왜 갑자기…… 아니…… 로맨스가 하나도 없잖아.”
“로맨스가 뭔데?”
“그, 그건……”
로맨스 타령하는 박정연에게 강철이 로맨스의 정의 자체를 묻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게 됐다.
“박 회장님이 그러시더라. 계속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사이 유지하면, 자기도 마냥 기다려줄 순 없다고. 누나랑 선보고 싶다는 다른 집안들 많다고.”
박정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철의 말대로, 그녀가 태성국제상사 상무가 된 올 5월 1일부로, 공개적으로 그녀에게 혼담을 넣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중에는, 강철과 분명한 대립 관계에 있는 한보성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사귄다고?’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미처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당황해했다.
‘마음의 준비니 로맨스니…….’
강철은 그런 박정연의 심리를 읽으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싫어?”
강철은 그러면서도 겉으론 그것을 표현하지 않은 채, 박정연에게 말했다.
박정연은 흠칫 놀랐다.
“아, 아니…… 그게…… 싫은 건 아닌데…… 너무 갑작스럽게……”
“원래 연애는 갑작스럽게 진전이 되는 거야. 무슨 준비 기간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니라고.”
“그래도……”
“싫으면 말고. 박 회장님이 올 상반기 안에 해결 안 보면, 바로 선자리 내보낼거라고 하시던데…… 아쉽게 됐네.”
박정연은 다시 컵에 물을 따라 그것을 쭉 들이켰다.
그리곤 마음을 살짝 가라앉힌 후, 강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난 당연히 좋지.”
“…… 너도 내가 좋다고?”
“싫으면 내가 구태여 이렇게 하겠어? 그냥 박 회장님한테, 아, 네 그렇게 하십쇼. 했겠지?”
박정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강철의 눈을 바라보았다.
강철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박정연의 시선을 담담하게 마주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로맨틱하지도 않고…… 갑작스러워서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너도 좋다고 하고…… 나도 좋으니까…… 그리고 아빠도 좋다고 하실 거니까…….”
그렇게 박정연은 강철의 제안을 수락했다.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박정연에게 다가갔다.
박정연은 살짝 당황했다.
강철은 박정연의 옆에 가서, 무릎을 살짝 굽혀 그녀의 앉은키 어깨높이와 맞춘 채, 그녀와 어깨동무하고는 폰을 꺼내 카메라를 작동했다.
“자, 그럼 우리 1일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자고.”
그렇게 말하며, 강철은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변경했다.
“스마일~”
강철은 활짝 웃었다.
박정연은 얼굴 가득 홍조를 띄운 채 수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 표시를 했다.
[찰칵-!]
그리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직전, 강철은 기습적으로 박정연의 볼에 입을 맞췄고, 카메라는 그 장면을 그대로 담아 파일로 남겼다.
2.
<오늘부터 1일입니다.>
그 한 문장과 함께, 강철로부터 온 사진 한 장.
박정연은 홍조를 띄운 채 살짝 당황하고 있고, 강철은 그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다.
“허허허-!”
자택 식당에서 해장국을 앞에 두고서 그 사진을 보며 박태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원 참, 이 친구. 아주 속전속결이구만. 젊어서 그런가?”
그러면서 박태화는 뚫어져라 사진을 바라봤다.
“허허허허.”
그렇게 한참을 실없이 웃던 그는, 이내 강철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 딸 잘 부탁하네, 사위님.>
그리고 그는 폰을 내려놓은 후 마저 해장국을 떠먹었다.
“어으, 시원하다.”
뚝배기를 모두 비워낸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서재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고, 연애면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지. 여기저기 들어오는 선으로 만나서 조건 따져가며 거래하듯이, 인수합병하듯이 하는 것보다야.’
박태화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을 실패작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실패작이었다.
대신 그는 박정연의 생모와의 결혼을 성공한 결혼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한 결혼이었다.
‘정연이가 내 뒤를 이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왕 사위를 맞이할 거면, 좀 제대로 된 놈을 맞이해야지.’
제대로 된 놈이라는 측면에서, 강철은 그 조건에 충분히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겨우 24세의 나이에 거목과 일신이라는 두 재벌 기업을 접수했고, 러시아 정부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한국 제1의 재벌인 삼우그룹과의 싸움에서 현재까지는 판정승을 거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왕이면 그 인간과 사랑하는 사이여야 하고.’
그리고 다행히 박정연은 분명히 강철에게 마음이 있었다.
한 번씩 박태화가 박정연을 떠볼 때면, 그녀는 그런 마음을 숨기질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둘 다 바빠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박태화 입장에선 갑갑할 노릇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제 박태화는 현재 차기 대권주자 1위인 야당 대표와 만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야당 대표로부터 강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신에 강 실장 그 친구, 패기가 넘치고 좋아요. 패기가 넘칠 뿐 아니라, 이 기민하기까지 한 게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에요.』
그러면서 그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듣자 하니, 정치권에서도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디다. 여당 이 대표가 자기 조카를 소개해주려고 한다던데.』
결국, 박태화는 술에 취한 채 강철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고백하라고, 그게 아니면 그냥 박정연 선보게 해버리겠다고 질러버렸다.
그리고 그 지름에 강철은 박정연과의 뽀뽀 셀카로 응답해주었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딸을 낳고, 그 딸이 엄민식하고 결혼을 하면, 이제 태성과 일신, 거목을 합한 거대한 기업이 내 손자 대에 나오게 되겠지?’
박태화는 그런 상상을 하며 실실 웃었다.
‘삼우그룹하고만 어떻게 화해를 해 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물론, 리스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에는 휴전 상태라곤 하지만, 강철은 분명히 삼우그룹과 전쟁 중이었다.
단순한 쩐의 전쟁이 아닌, 서로의 위상과 목숨을 건 전쟁이었다.
‘태준이하고 한번 봐야 하나?’
이미 강철은 박태화의 마음속에서 예비 사위가 된 만큼, 이제 박태화는 적극적으로 강철과 삼우그룹 사이를 중재할 생각을 하게 됐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