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황제 (2)
3.
삼우그룹과 혼맥으로 이어진 집단은 크게 3개였다.
하나는 김대영의 부인 조성자가 속한 재계 서열 39위의 광복그룹.
다른 하나는 김태준의 부인 여은수가 속한 재계 서열 27위의 대은그룹.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김도은의 전남편이 속했던 한국 3대 언론 중 하나인 무궁일보그룹이었다.
그중 광복그룹과 대은그룹은, 사돈인 삼우그룹과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삼우그룹이 지닌 재계 서열 1위라는 권위를 존중해주긴 했지만, 종속적인 관계를 가능한 피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삼우그룹은 광복그룹과 대은그룹에게, 비즈니스적인 것 이상의 일을 부탁하거나 그것에 관한 협조를 구하진 못했다.
물론, 총수 일가의 수호를 위하여 공권력을 동원할 일이 생겼을 때, 혹은 미처 삼우그룹의 인맥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생겼을 때에 그 정도를 보충해주는 것까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사돈의 치부에 함께 참여하여 그 뒤를 닦아주는 행위는 격하게 거부했다.
반면, 무궁일보그룹은 거의 자발적으로, 삼우그룹에서 따로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열심히 삼우그룹의 똥을 닦아주는 똥닦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것은 김도은이 과부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덕분에 무궁일보그룹이 발행하는 모든 발간물에는 늘 삼우그룹 계열사의 광고가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 종편방송국이 개국했을 때에는, 시청률이 1%도 나오지 않았던 때에도 풀타임으로 광고를 넣어줄 정도였다.
“구도가 좋네. 편집해서 어디다가 팔아도 될 정도야. 음성이 없으니 그건 안 되겠지만.”
5월 13일 수요일 새벽 1시.
광화문 무궁일보 사옥에서, 논설주간이자 그룹 상무인 고금필은 두 기자가 찍어온 포르노를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뽕을 빨게 해서 그런가, 아주 정열적이야. 소리까지 녹음돼 있었으면 아마 여기서 딸딸이라도 쳤을 것 같네.”
고금필은 동영상을 끄고는 피로에 찌든 두 기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들 거기서 딸딸이 치진 않았겠지? 너희들 흔적은, 고추털도 하나 남으면 안 돼.”
그 말에 선임자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주 장갑에 모자에, 흔적 하나 안 남기고 철저히 했습니다.”
그 말에 고금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고금필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펜을 들어 책상 모니터 앞에 놓인 백지에다가 자기만 알아볼 수 있게 몇 글자를 끄적였다.
그리곤 두 기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만 퇴근하고, 내일 하루는 쉬어. 내가 어디 지방에 취재 간 거로 이야기해 둘 테니까.”
그 말에 선임자와 후임자의 표정이 모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금필은 두 사람에게 나가보라 손짓했다.
곧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나갔다.
“흐음…….”
혼자가 된 고금필은 다시 모니터에 유아영과 홍민아의 격한 애정행각이 담긴 영상을 틀었다.
그것을, 마우스와 키보드를 이용해 쭉쭉 넘기면서 고금필은 중간중간 특정 장면의 시간을 메모해두었다.
그렇게 또 40분을 더 동영상을 본 고금필은 이내 아예 컴퓨터까지 꺼버리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이곤,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담배를 반쯤 태웠을 때, 별안간 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넣었다.
약간의 시간이 소요된 끝에, 상대방은 전화를 받았다.
“고금필입니다. 일단 제가 편집할 만한 구간을 체크해두긴 했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같이 하는 게 어떨까 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혹시 주무시고 있었습니까? 아, 다행입니다. 그러면 제가 그쪽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상대방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밀어붙였다.
“회장님께서 직접 지침을 하달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에너지를 짜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금필은 그렇게 담배를 마저 태운 후, 다시 자리에 앉아 3번째로 동영상을 체크하며, 2번째로 주요 구간을 확인했다.
그렇게 그가 또 일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서 담배를 막 입에 물었을 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아, 오셨습니까.”
“회사에 있었으니까, 뭐 새벽이라 차도 없고, 금방 왔습니다, 고 주간님.”
“앉으십시오.”
들어온 남자는 삼우그룹 차세대기획본부 총무실 의전총괄국장 이영민 전무였다.
“피차 피곤하니까, 일을 빨리 끝냈으면 합니다.”
이영민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가 아닌, 고금필의 자리에 앉았다.
“이겁니까?”
이영민은 고금필에게 바탕화면에 나와 있는 동영상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고금필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영민은 곧 파일을 열었다.
“흐음…….”
이영민은 모니터 앞에 놓인, 숫자가 적힌 종이와 영상을 비교해서 보며, 숫자에 따라 시간을 옮겨가며 영상을 확인했다.
“흐음…… 여기 뽑아두신 리스트대로 편집하면 적당히 60초 내외로 괜찮은 거 하나 나올 것 같습니다.”
“따로 이 전무님이 보실 건 없으십니까?”
“고 주간님이 뽑아두신 거면 충분하지 싶습니다.”
이영민의 말에 고금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내일 저녁까지 편집해서 제게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영민의 말에 고금필은 피식 웃으며 그에게 나와보라 손짓했다.
이영민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고금필은 곧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열더니, 능숙하게 영상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10분이면 됩니다. 잠시 앉아서 숨이라도 돌리고 있으십시오.”
이영민은 살짝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앞에선…….’
이영민은 소파에 앉았다.
그는 잠시 고금필이 하는 것을 바라보더니, 고금필이 작업을 거의 다 끝낼 때쯤, 입을 열었다.
“여당에선 강북 쪽에 자리 하나 봐준다고 하고, 야당에선 울산 쪽에 자리 하나 봐준다고 합니다. 선택은 주간님이 하시면 되지 싶습니다.”
그 말에 고금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이영민을 바라봤다.
“여당 달고 강북을 나가든가, 야당 달고 울산을 나가든가, 그겁니까?”
“둘 다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 싶습니다.”
고금필은 코웃음을 쳤다.
“하기야, 제가 초등학교는 울산에서 나왔고, 고등학교 때까진 도봉구에 살았습니다. 대학도 성북구 쪽이고 말입니다.”
“선거자금 걱정은 하지 마시고, 적당한 거로 하나 고르십시오.”
“알겠습니다.”
고금필은 다시 작업에 열중했고, 2분 후, 그는 67초짜리 짧은 편집본 영상 하나를 뚝딱 만들어냈다.
“USB 주십시오.”
고금필의 말에 이영민은 USB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고금필은 곧 USB에 편집본과 원본을 담아주었다.
“근데 이거로 충분하겠습니까?”
고금필의 물음에 이영민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거 말고도 많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고금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태극일보가 완전히 저쪽 편입니다. 거기다 여야 대표가 저 인간한테 최근에 호의를 입었습니다. 고작 이 깡패 애인 하나로 뭔가 일을 도모하긴 힘들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고금필은 이영민의 말을 100% 신뢰할 수 없었다.
‘이도근이하고 구대준이가 사라졌어. 차기본도 예전만 못한 상황이겠지.’
삼우그룹 총수 일가를 결사옹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친위대와도 같은 조직이 차세대기획본부다.
그리고 지금, 친위대 핵심 간부들이 줄줄이 구치소에 있거나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곧 나올 예정이긴 했지만, 그 전까지 차세대기획본부는 예전만한 힘을 발휘하진 못할 터였다.
‘이영민이가 너무 서두르고 있어. 야심이 있다 이거지.’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상급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이영민은 회장의 눈에 들고자 애쓰고 있었다.
‘자기가 저질러 놓고, 막상 내가 이 시간에 일처리를 하자니까 당혹스러워했어. 저런 인간이 얼마나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딱 거기까지만 걱정할 뿐이었다.
어차피 그가 원하던 건 이미 다 받은 상태였다.
‘강북구가 낫겠지. 서울이 지역구면 관리하기도 편하고.’
4.
강철에게 약점이 될 만한 건 대산그룹과 협업 관계를 맺고, 조민석을 회장에 앉히기 위한 공작을 펼치던 시절 저지른 살인과 폭력 정도였다.
그 외에 재벌과 엮이며 저지른 살인과 폭력 그리고 사기 및 외화 무단 유출은, 증거를 잡기도 힘들뿐더러 잡더라도 거기에 엮인 관료들이 많아서 관료제 내에서 자체적으로 컷될 것들이었다.
그랬기에 강철은, 대산그룹 초창기 시절의 행보를 떠올리며, 그때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역추적해 혹시나 남은 증거가 있는가 확인하고, 있다면 삭제하는 일을 반복했다.
거기에는 서용태와 김명길 그리고 최병천이 큰 도움을 줬다.
서용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김명길은 조직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최병천은 법률적인 측면에서 각각 강철의 약점을 찾아 지워나가며,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들의 일처리는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완전히 완벽하진 않았다.
사람이 하는 일은 으레 그렇듯, 그들의 일처리에도 어느 정도 구멍은 분명히 있었다.
예컨대 박용수가 그랬다.
한때 조민석의 오른팔이자, 강철에게 차기 대산 회장이라는 비전을 부여받은, 그러나 결국에는 자기 주군인 조민석과 함께 은퇴해야만 했던 남자.
그러나 여전히 마음속에 어떤 야망이란 것을 품고 있던 남자, 박용수는 감히 강철이 저지른 몇 건의 살인-강대산과 김태영에 관해 증언하고 하남 대마 농장의 존재를 고발하려는 짓을 꾸몄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 구멍은, 그러나 박용수의 행적을 추적하던 서용태와 김명길에 의해, 박용수가 고발장을 들고 송파경찰서를 찾아가기 직전, 매워졌다.
박용수는 조용히 살지 않은 대가로 하남 대마 농장에 끌려왔고, 그곳에서 강철에게 내면을 모두 읽힌 뒤 분쇄기에 들어가 거름으로 재탄생했다.
“새끼, 그냥 있는 돈 가지고 편안하게 쳐 살면 되지 만다꼬 설치다가 디지삐는 기고? 안 글나?”
“그러게.”
거름이 돼 대마 밭에 뿌려지는 박용수를 바라보며, 김명길과 서용태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지켜보면서 강철은 생각했다.
‘삼우그룹에서 대산그룹 쪽을 캐고 있어. 전라도 쪽에도 그리고 부산에도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고 있겠지.’
강철의 손이 닿지 않는 곳, 즉 목포와 부산에는 그에게 호되게 당하고 지분을 빼앗겼던 옛 지방 주주들이 있었다.
‘그쪽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을 건데…… 이거 어디서 복병이 나올지 모르니…….’
직접 부산과 목포를 방문해서 마저 정리해야 하나? 그렇게 강철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응?’
별안간 그의 폰이 울리며 전화가 왔다.
그리고 발신자를 본 강철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유아영?’
아주 오랜만에, 유아영으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