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메드베데프
1.
2011년 3월 17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안 1973호가 통과됐다.
1973호의 핵심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이 특정 국가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도적 보호를 위해 지상군을 제외한 군사력을 투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보호책임 원칙이었다.
그리고 그때, 중국과 러시아는 이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기권을 택함으로써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카다피 정부군에 대한 폭격을 감행할 수 있는 합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1973호에 관해, 러시아 내부에서는 의견이 둘로 갈렸다.
총리였던 푸틴과 그 휘하 강경파는 당연히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반면 대통령이었던 메드베데프와 그 휘하 온건파는 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대할 이유는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1973호가 통과된 후, 푸틴과 메드베데프 사이에 설전이 오갔다.
푸틴이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 방송은 메드베데프의 리더십을 비난했고, 외교부도 나서서 미국과 프랑스의 공습을 비판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그 결정으로 인해,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마음에서 뒷전으로 밀려났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2020년, 메드베데프는 권력에서 밀려났고, 개혁파이자 온건파로서의 모습을 버리곤 핵무기 위협이나 하는 초강경파의 옷을 입게 됐을 수도 있다.
“70년 전, 우리는 세계를 자신들의 왜곡된 인종주의와 민족 우월주의로 지배하려던 악의 제국에 대항했던, 자유와 정의, 평화를 지켜내는 성스러운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 생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2013년 11월 11일 푸틴이 죽으면서 역사는 뒤틀렸고, 덕분에 영원한 푸틴의 이인자이자 사이드킥으로 살다가 마침내 스스로의 신념마저 바꿔야 했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당당한 일인자이자 주인공이 됐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그러한 악의 제국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 다시는 수많은 생명이 죽어간 비극적인 세계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에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2015년 5월 9일 토요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2차 대전 종전 7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러시아군뿐만 아니라, 발트3국과 조지아를 제외한 구소련권 국가의 군대 그리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군대까지 모두 참여한 열병식 이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전 세계에 중계되는 연설을 통해 자신의 꿈을 밝혔다.
“악의 제국과의 싸움은 70년 전에 끝났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와 함께한 뿌리 깊은 병폐와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강철은 붉은 광장 사열대 끄트머리 즈음에서 몰도바 총리 바로 옆에 앉아 연설을 듣고 있었다.
“부패, 차별, 증오 그리고 억압. 이 모든 악과의 전쟁을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수행해야 할 때입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승리의 날 70주년 기념사를 통해,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우리의 명분은 정당하며 적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우라!”
2차대전 독-소전을 상징하는 문구와 함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연설은 끝났다.
러시아 국기와 우크라이나 국기, 벨라루스와 중앙아시아 주요 국가들, 조지아를 제외한 캅카스 국가들 그리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국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러시아 국가가 웅장하게 붉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이 함께 열병식을 개최한다…….’
원래대로라면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로부터 강탈함에 따라 양국은 이런 식으로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없는 관계가 돼야 했었다.
하지만 푸틴이 죽고, 구심점을 잃은 강경파가 결국 온건파에게 권력을 상당 부분 내주는 바람에 크림반도 강탈을 비롯한 일련의 군사적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로워서 좋네.’
선글라스를 낀 채 붉은 광장을 내려다보며 강철은 가만히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바라보았다.
‘분명 2022년 10월쯤부터 노망난 사람처럼 개소리하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서 그렇게 신념을 버렸던 거겠지?’
적어도 연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메드베데프는 푸틴처럼 군사적 모험을 강행하는 대러시아주의자 혹은 극단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속마음도 그런가는 곧 확인할 수 있겠지.’
강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당일 저녁 8시.
강철은 크렘린 대통령 집무실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 독대하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이렇게 실제로 얼굴을 보니, 새삼 사람들이 왜 그라치아니 씨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메드베데프는 강철을 보자마자 그렇게 이야기하며, 그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강철은 메드베데프에게 적당한 예의를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메드베데프는 강철에게 홍차를 따라준 후, 초코 과자 하나를 건넸다.
“한국 과자인데, 맛이 좋습니다. 제가 즐기죠. 그라치아니 씨도 즐기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강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메드베데프는 알고 있었다.
미하일 킴에게 그라치아니는 위장된 신분이며 실제론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라고 미리 강철이 언질을 한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메드베데프는 강철을 공식적으론 이탈리아인 조반니 그라치아니로 대우해주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에서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하는 한국 과자를 주는 것으로서 자신이 강철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긴 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강철은 그런 메드베데프에게 간단한 감사의 예를 표할 뿐이었다.
“한국은 우리 러시아와 매우 깊은 인연이 있는 나라입니다. 과거 소련 시절에는 서로가 이념과 냉전이라는 장벽으로 인해 가깝게 지내진 못했지만, 이후로 수교가 되고 30년 가까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메드베데프에게 있어서 강철은 비공식 외교 사절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일단 속마음을 잠시 숨겨둔 채 공식적인 언어를 통해 자신의 뜻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꺼내 들기 시작했다.
“이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한 단계 더 진전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전임 대통령이 불운의 테러로 서거하면서 논의가 중단되긴 했지만, 러시아와 한국을 잇는 가스관 연결 사업은 분명 중요한 진전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메드베데프는 강철에게 가볍게 윙크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라치아니 씨가 운영하는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가 한국에도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으니, 힘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강철은 최대한 온 에너지를 집중해 메드베데프의 의식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갔다.
‘다행히 전쟁을 일으킬 인간은 아니군.’
관심법을 통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의식 깊은 곳까지 들어가 조사한 결과, 강철은 그가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음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
적어도 푸틴이 그랬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에 대한 어떤 군사적 조치를 취할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하나도 없었다.
‘완전히 안도할 수는 없지만.’
물론, 강경파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계속해서 주장할 경우, 그가 따를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미하일 킴을 통해 계속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던 만큼, 얼마든 대처가 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 본인의 의지라고 강철은 생각했다.
그리고 대통령 메드베데프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 멸망은 없겠어.’
강철은 또 한 번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확인하곤 마음을 놓았다.
“대통령님의 뜻을 한국 측에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강철은 메드베데프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였고, 메드베데프는 강철을 흡족하게 여겼다.
강철은 그렇게 메드베데프에게 러시아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한 한국 초코 과자 한 박스와 홍차 한 세트를 선물로 받았고, 유로화를 가득 담은 007가방 2개를 선물로 건네주고는 크렘린을 떠났다.
2.
“이고르 세친과 니콜라이 파트루셰프는 점점 고립되고 있습니다.”
메드베데프와 만난 후, 하루가 지난 5월 10일 일요일 오후 1시.
모스크바에 자리한 미하일 킴의 집 거실에서, 강철은 그와 메드베데프에게서 받은 홍차와 초코 과자를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국방장관 세르게이 쇼이구가 곧 경질될 예정이고, 파트루셰프도 국가안보회의 서기에서 물러날 예정입니다. 뭐, 물러난 이후로 적당한 국영기업에 꽂아줄 예정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권력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미하일 킴을 통해 강철은 러시아 국내 정세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이 되어 가는 해, 그와 그의 측근인 온건파는 강경파와 공유했던 권력을 점차 빼앗고 있었다.
“이거 참…… 곧 해외정보국 국장이 되실 분한테 겨우 홍차에 초코 과자라니…… 내가 너무 성의가 없는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그러한 권력 투쟁 속에서 강철의 핵심 관계자인 미하일 킴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미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미하일 킴의 말은 진심이었다.
강철이 뿌려놓은 뇌물 덕분에, 미하일 킴은 꿈에서나 보았던 해외정보국 국장 자리까지 오르게 됐다.
미하일 킴은 그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강철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로써 완전히 안전하게 됐어.’
메드베데프와의 만남에서, 그리고 곧 해외정보국 국장으로 취임할, 자신을 두려워하는 미하일 킴과의 대화에서, 강철은 이제 더는 러시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처럼만 관리해도 러시아는 충분해. 3차 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러시아는 더는 내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될 나라지.’
강철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동쪽이었다.
‘한국에 내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가 됐어.’
러시아는 지금처럼 늘 나가는 비용만 내보내면 된다.
미하일 킴으로부터 특별한 보고가 없는 한, 이곳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강철이 신경 써야 할 곳은 한국뿐이다.
‘삼우그룹 내에서 김도은을 따를 만한 파벌을 모아야 해. 그리고 삼우그룹 바깥에서 김도은을 도와줄 만한 사람들도 모아야 하고.’
강철이 러시아에 방문한 건, 삼우그룹과의 결전을 앞두고 혹시 모를 외부적 변수가 있는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변수가 완벽하게 사라졌음을 확인한 이상, 이제 강철은 삼우그룹과의 싸움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삼우그룹과의 싸움에서 내게 큰 힘이 되진 못하겠지만, 러시아 정부를 통해 한국 정부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이 되겠지.’
강철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선 미하일 킴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만간 서울에서 봤으면 좋겠어. 메드베데프 대통령님과도 함께 말이야.”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미하일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빈방문을 추진해보겠습니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미하일 킴의 모습에 강철은 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