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김도은 (2)
2.
“하아…….”
3월 8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김도은은 이태원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대기 중이던 가정부에게 옷과 가방을 건넨 후,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미리 준비돼 있던 욕조물에 몸을 담갔다.
‘적과의 동침…….’
강철은 삼우의 적이었다.
적어도 김대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김태준도 김대영과 크게 생각이 다르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김도은이 보기엔 그랬다.
‘잘한 짓일까?’
강철과 동맹을 맺고서, 그녀는 그것을 기념하고자 술을 몇 병 더 깠다.
강철은 그녀와의 술자리가 싫지 않았는지, 그것을 사양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녀는 살짝 취기가 올라올 만큼 술을 마시고 말았다.
그 모든 취기를 욕조 속에서 땀과 함께 분출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 말곤 방법이 없어.’
80년대 초, 막 5공화국이 출범하고 경제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되던 때에, 초등학생이었던 그녀의 기억 속에서, 김대영이 살고 있는 집은 항상 북적였다.
그곳에는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만 다섯 명이 있었고, 그들 모두는 그 당시 삼우그룹 내에서 계열사를 책임지고 있거나 구조조정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김대영은 비록 삼우그룹 회장직을 차지하곤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하건, 늘 형제들과 상의를 해서 처리해야만 했다.
그때 삼촌들은 그녀를 예뻐했다.
사촌 중에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이 83년을 기점으로 모두 사라졌다.
집에서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삼우그룹 내에서도 그들은 사라졌고, 그들의 이름도 사라졌다.
그들이 한 일은 모두 김대영과 그의 핵심 가신들이 한 일로 둔갑했다.
그 누구도 과거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김도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그녀가 다시 과거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 건, 그녀가 스무 살이 된 88년도 여름이었다.
『회장님.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니, 삼촌…… 제발 한 번만 도와줘요. 이대로 가면 우리 전부 다 죽어요.』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 묘한 감정적 관계를 잠시 맺었던 사촌이 추레한 몰골로 김대영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대영은 매몰차게 그 도움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공사판에 가서 일해. 일해서 돈 벌어. 너 몸 건강하잖아.』
그렇게 문전박대당한 사촌은, 얼마 후 조상이 묻힌 선산 나무에서 목을 맸다.
뒤에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당시 그는 사채업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진 빚 액수는, 50만 원 정도였다.
50만 원.
88년 기준으로,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재벌의 기준에선 푼돈이었다.
아니, 푼돈조차 되지 못하는, 먼지만도 못한 가치의 돈이었다.
그러나 김대영은 그 정도도 돕지 않았다.
그에겐 50만 원이 혈육의 정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었다.
“사장님?”
자신을 부르는 가정부의 목소리에, 김도은은 잠에서 깼다.
‘꿈을 꿨구나.’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취기에 그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욕조에서 나왔다.
“1시간 경과됐습니다.”
욕조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가정부에게 1시간 후에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것을 기억해내며, 그녀는 욕실 밖에 서 있는 가정부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목욕을 마무리 지은 후, 가운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두른 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베란다로 가, 아직은 서늘한 3월의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허공을 바라봤다.
‘나랑 예은이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2009년 7월, 그녀가 늦게 얻은 딸 도예은을 떠올리며 김도은은 마음을 다잡았다.
‘오빠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세상을 무관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자기 재산에 대한 애착은 상당해.’
김도은은 김태준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본 김태준은, 세상만사에 무관심하면서도 유일하게 자기 재산에 대해서 만큼은 상당한 관심과 집착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삼우그룹 전체를 내가 가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호텔만큼은 지켜야 해. 그렇게 하려면…… 이 방법뿐이야.’
만약, 강철이 그녀에게, 그녀가 맞이할 미래를 알려줬더라면,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진 못했을 것이다.
강철의 예언은, 그저 그녀에겐 위로로만 들렸을 것이고, 그 정도 위로로는 그녀의 상실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심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미안해요. 하지만 이해하시겠죠?’
그녀는, 그렇게 밤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3.
여야 대표와 그들이 이끄는 파벌이 합심해서 만든 국회 청문회 자리에, 김대영은 출석하지 않았다.
사유는 와병이었다.
대신 삼우그룹에선 김태준 부회장과 이도근 차세대기획본부장, 구대준 부본부장 그리고 박학기 삼우생명 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보세요! 김태준 증인! 자세를 똑바로 하세요. 여긴 민의의 전당입니다! 어디 감히 국민의 대표 앞에서 자세를 흩트리는 겁니까!”
“김태준 증인, 항상 답변을 하실 때 잘 모르겠다, 확인해보겠다 하시는데 경영도 그렇게 하십니까? 아는 것도 없고 확인해본 것도 없는 사람이 삼우그룹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미국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온 두 번째 동영상 도입부를 보면, 분명 김태준 증인이 분명 당시 의료기록상으로는 의식불명이어야 할 김대영 씨와 대화하는 장면이 찍혀 있어요. 심지어 그 동영상을 보면, 김태준 씨가 일종의 포주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도 나와요. 이런대도 계속 모른다고만 하실 겁니까!”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때가 아니면 언제 삼우그룹 회장이 될 사람한테 큰소리치겠냐는 심정으로, 김태준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중에는 상당히 김태준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며 소리치는 의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내용 없는 아우성만 내지를 뿐이었다.
“박학기 증인, 증인께서 삼우생명 회장으로 가기 전 차세대기획본부장으로 재직할 때 비자금을 운용하신 것으로 이 장부 복사본에 보면 나와 있는데, 이런데도 부정하실 겁니까?”
김태준에게 따지는 것은 무의미함을 깨달은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박학기 삼우생명 회장에게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장부 자체의 진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것만 가지고 저를 이렇게 몰아붙이시는 건 정의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향한 의원들의 질문에 박학기는 당당하게 그런 식으로 답변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태도는, 모든 의원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박학기 증인! 자세 똑바로 하세요!”
“말투가 그게 뭡니까, 말투가!”
“지금 여기가 삼우생명 사무실인 줄 아십니까? 어디서 그런 태도로 답변하는 겁니까!”
“청문회가 장난이야!”
그렇게 4월 1일 수요일부터 7일 화요일까지 6일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청문회는 이어졌다.
실시간 생중계된 청문회는, 별다른 소득 없이 시시하게 끝났다.
청문회는 그 삼우그룹 비자금과 정관계 로비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고, 그저 무의미한 국회의원들의 고함 소리와 삼우그룹 측의 불성실한 답변 태도만을 논란으로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검찰은 오는 금요일 박학기 삼우생명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는 내부 방침을 세운 가운데 구속영장 발부를 위한 세부적인 법률 검토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렇게 삼우그룹에 대한 모든 조사가 끝난 건 아니었다.
어쨌건 장부는 실존하고 있었고, 그 장부 내역에 따르면 박학기가 차세대기획본부에서 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정관계 로비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검찰은 그를 구속하겠다며 공개적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박학기 뿐만이 아니었다.
현 차세대기획본부장인 이도근도, 부본부장인 구대준도 모두 검찰의 구속 리스트에 올랐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당분간, 김대영에서 김태준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 작업에 차질이 생겼다.
그것은 분명, 김대영과 김태준에게는 위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 자체가 기회인 사람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김도은이었다.
4.
4월 16일 목요일 오전 10시.
강철은 한소영의 묘지를 방문했다.
타인의 시선을 끌기 싫었기에, 오전에, 그는 홀로 이곳을 방문했다.
‘소영아. 거긴 어떻니?’
죽음.
강철은 이미 한 번 경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
2030년 어느 날, 강철은 오길동에 의해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저승에 있지 않았다.
그는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법적인 자신의 생일날 학교로 돌아와 있었다.
그랬기에 한소영은 그보다 앞서 죽음 이후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난 여전히 바쁘다. 다음 달엔 모스크바로 가서 크렘린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하고 독대해.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를 삼우그룹과의 싸움도 하고 있고.’
강철은 가만히, 한소영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민식이는 잘 크고 있어. 너무 잘 커서, 이대로 몇 년만 더 지나면 여자친구도 만들 기세야.’
강철은 가만히 묘비를 쓰다듬었다.
‘박정연 알지? 박태화 회장 딸. 걔가 나를 꽤 마음에 들어 하나 봐. 박태화 회장도 날 사위로 삼고 싶어 하고.’
강철은 가만히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묘비를 끌어안았다.
‘민식이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아마 난 박정연하고 결혼을 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런 나, 용서해 줄 거지?’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강철은 죽은 자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동의를 구하고 싶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 강철의 볼을 간지럽혔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대기현상이었다.
하지만 강철은 그것을 한소영의 허락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맙다.’
강철은 가볍게 묘비에 입을 맞추었다.
문득, 강한 상실감이 그의 마음에 큰 구멍을 뚫었다.
‘이런 느낌이려나. 김도은이 그렇게 공포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강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영이하고는 특별한 사이였나 봐요?”
그 순간, 강철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빠르게 뒤로 돌아섰다.
‘김도은?’
검은 옷을 입은 김도은이, 국화 한 송이를 든 채 서서 강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언니동생 하던 사이였어요. 하지만 그래도 묘비 앞에 무릎 꿇고 묘비에 입을 맞출 정도는 아니었죠.”
관심법은 항상 발동하고 있는 게 아니다.
거기다 강철은 한소영에게 속으로 말을 거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다면…… 아, 그래도 죽는 일은 없었겠구나.’
일단 강철은, 경계심을 살짝 풀었다.
그러면서 그는 관심법을 발동했다.
강철이 그러고 있는 사이 김도은은 한소영의 묘비 앞에 들고 온 국화 한 송이를 놓았다.
그리곤 가만히 양손을 모아 기도한 후,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영이는 좋겠어요. 죽어서도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