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151화 (151/175)

151 장부 (3)

5.

“이거 참 우리가 다들 곤란해졌단 말이야.”

2월 25일 수요일 오후 3시.

여의도 여당 당사 당대표실.

강철은 여당 대표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당 대표는 습관적으로 3분에 1번씩 안경을 닦으며 구시렁거렸다.

“작년에 지방선거 이후로 분위기가 좀 다운되는 것 같다고, 쇄신이 필요하다고 응? 지도부가 청와대에 건의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말이야.”

여당 대표는 ‘우리’라는 말을 쓰며 책임을 분산하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얄팍한 수작에 불과했다.

이미 여권 내에선 당대표 책임론이 나오는 실정이었다.

왜냐하면, 최고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당 대표인 그가 개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청와대를 몰아붙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2월 25일 수요일 현재, 여당의 지지율은 20% 초반대로 주저앉아서 40% 중반을 기록한 야당에 거의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밀리고 있었다.

여당 지지율만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대통령 지지율도 24%로 떨어져서,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었다.

“이게 하필 그 김 대표가 재벌 돈 안 받는 양반이라서…… 하…… 아니, 우린 억울하다고. 솔직히 야당에 김 대표나 돈 문제가 없지 다들 돈 이야기 나오면 뒤에서 구린내가 펄펄 나는 사람들이잖나. 안 그렇나?”

여당 대표는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었다.

“아니, 자기 빼고 사실상 여의도에 있는 인간들 중에 재벌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 누가 있다고? 안 그래?”

그러면서 여당 대표는 강철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솔직히 작정하고 털면, 당장에 일신이랑 거목한테 받은 사람들도 우르르 나올 건데 말이야.”

그 말에 강철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죠. 당장 대표님부터 걸리시겠죠.”

그 말에 여당 대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살짝 굳었다.

그러나 평소에도 무뚝뚝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었기에, 관심법이 없었다면, 강철조차도 분별하기 어려운 수준의 표정 변화였다.

그래서 강철은 모르는 척 넘어 가주었다.

“에이, 이 사람 참. 말하는 거 하고는…….”

여당 대표는 다시 안경을 벗어서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그리고 다시 안경을 쓴 그는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당이 비대위 체제로 전환돼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어.”

여당 대표는 대통령과 계파가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이번에 후보자가 됐다가 삼우그룹의 후원을 받은 일로 인해 낙마한 법무부, 검찰, 국세청 수장 후보자들은 모두가 여당 대표 혹은 그의 계파에 속한 유력 정치인들이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으로야 어쨌건 다 같은 여당이었기에 서로 책임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당 내부에선 그 책임을 분산시키려 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야 자기들이 누구 좋은 사람 있냐길래 그냥 추천해준 거고, 그거를 최종적으로 고른 건 청와대 민정수석실 아닌가? 나도 예전에 청와대에서 일해 봤고, 총리도 해 봤지만 말이야.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이 말이야.”

대통령 계파에서는 이 기회에 당을 다시 대통령 중심으로 뭉치게 하려 하고 있었다.

레임덕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차기 대권 주자로 자기 계파 사람을 올리기 위한 일종의 사전 작업인 셈이었다.

당연히 대표로서는 그것을 묵과할 수가 없었다.

대표도 자기 계파를 이끄는 사람인지라, 자기 계파에 속한, 자기 말 잘 듣는 사람을 차기 대권 주자로 세우고 싶어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일단 자기 자리를 날려버리겠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이유였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나?”

그래서 대표는 강철을 찾았다.

“나는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게 싫다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지. 나한테도 김 대표한테 줬던 것처럼 좀 묵직한 거 하나를 전해주게. 내, 이 은혜 섭섭하지 않게 갚을 테니까.”

삼우그룹 장부 복사본을 야당 대표에게 건넨 사람이 강철이라는 것은, 여전히 비밀스러운 내용이었지만, 적어도 여야 주요 유력 정치인쯤 되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강철이 그것을 야당 대표에게 비밀로 하라 하지도 않았던데다가, 은연중에 자신이 장부를 넘겼다는 것을 다른 유력 정치인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면 난 다시 야인이야. 자네가 투자한 돈이 아깝지 않나?”

그랬기에 여당 대표는 강철에게 노골적으로 자기에게도 뭔가 공격할 거리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말해야 할 만큼 다급한 상황이긴 했다.

‘정치인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정도면 진짜 급한 모양이야.’

사실 여당 대표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그에게, 정확하게는 그가 이끄는 계파에게 강철이 투자한 돈이 있었던 만큼, 여기서 그 계파가 무너지면 결국, 강철은 그것을 모두 손실 처리하게 될 터였다.

‘그럼 곤란하지.’

강철은 그래서 준비해온 서류 봉투를 여당 대표에게 건넸다.

여당 대표는 강철이 별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봉투가 자신이 원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그는 곧장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야당 대표에게 전했던 것과 같은, 그러나 받은 사람과 액수는 다른, 장부 복사본이 있었다.

약 30장가량의 A4용지에 들어찬 장부 복사본을 유심히 읽던 여당 대표는 그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피우며 강철을 바라봤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이걸 들고 있단 말인가? 자네가?”

강철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아! 예상은 했는데 이 인간들…… 쓰읍…….”

여당 대표는 잠시 고민했다.

그것은 이것을 어떻게 써먹느냐는 고민이었다.

그리고 곧, 그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거기에 대해 강철이 따로 조언할 건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여당 대표는 강철과 같은 대응 방안을 구상했기 때문이었다.

“잘 활용하도록 하지.”

여당 대표의 말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에게, 그가 미처 빼먹은 생각을 하나 보충적으로 첨언해 주었다.

“여야가 공동으로 삼우그룹 비자금 국정조사나 특검을 개시하시는 것도 좋지 싶습니다.”

“공동으로?”

“네.”

“흐음…….”

잠시 고민하던 여당 대표는 은근슬쩍 강철을 떠보았다.

“대통령 쪽 인간들 장부도 있나?”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당 대표는 씩 웃으며 말했다.

“국정조사가 될지, 특검이 될지는 사실 정치가 워낙 복잡하니 가 봐야 알겠지만, 아마 국정조사가 되지 않을까 싶네. 특검으로 가 버리면, 증거가 필요한데 아무래도 이 원본을 자네가 제공할 순 없지 않겠나?”

그 말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이제 전문 정치인 분들이 하시면 되지 싶습니다.”

여당 대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게. 나나 김 대표나 다들 잔뼈가 굵은 사람들 아닌가? 하하하하.”

6.

3월 2일 월요일 오전 10시.

국회 정론관에서 여당 대표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최근 여당에서 비대위 체제 전환 이야기가 나오고 있던 만큼, 기자들과 정치인들은 여당 대표가 관련 입장을 표명하고 거취를 밝히고자 기자회견을 자청했다고 생각했다.

“여기, 삼우그룹으로부터 오랜 세월 후원을 받아온 유력 정치인의 이름이 적힌 장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당 대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삼우그룹의 후원을 받은 정치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 조금 전 제가 말한 세 사람은 다들 아시겠지만,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고 중진입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그렇게 특정 재벌, 특정 재벌 거리면서 욕을 해놓고 정작 자기들도 똑같이 돈을 받아 왔다는 게? 이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가 공개한 장부에는, 야당의 유력 대권 주자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무려 30년간, 그들이 각각 검사와 판사 시절부터 정계 입문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삼우그룹으로부터 관리를 받아 왔음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는 장부의 복사본을 흔들어대며 여당 대표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주장했다.

“야당에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야당이 당당하다면, 이왕 사태가 이렇게 된 김에 국정조사가 됐건 특검이 됐건, 정경유착을 뿌리 뽑아 봅시다. 이건 정파적인 당리당략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국민을 위한, 정의로운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꼭, 야당으로부터 양심에서 비롯된 답변이 오길 기대하겠습니다.”

장부 공개의 여파는 상당했다.

낙마한 장관급 인사부터, 유력 야권 대선 주자에 이르기까지.

삼우그룹의 관리력이 상당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인 만큼, 대중은 이 사태를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아무리 그놈이 그놈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다 도둑놈들뿐이야, 도둑놈뿐이라고.]

[이 기회에 정경유착의 근본을 뿌리 뽑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론조사에서 여당 대표가 주장한 국정조사 혹은 특검의 필요성에 대한 찬성이 70%에 육박할 정도로 분위기는 고조됐다.

“여당의 국정조사 요구는 억지입니다. 진위여부가 불분명한, 조작의 가능성이 다분한 A4용지 쪼가리를 가지고 국가 경제의 핵심을 담당하는 대기업을 조사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이건 인민재판이지, 자유민주주의 법치가 아닙니다.”

삼우그룹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온 것으로 지목된 야당 대권 주자 두 사람은 그렇게 반대했지만, 여론을 이기진 못했다.

“오늘 여야는 삼우그룹의 정관계 로비에 관한 국회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으며, 세부적인 일정은 추후 여야 간사 협의에 따라……”

마침내 3월 10일 화요일, 여야는 국정조사도 아니고 특검도 아닌, 국회 청문회 형식으로 관련 사건을 들여다보기로 합의했다.

상당히 빨리 합의가 이루어진 까닭은, 삼우그룹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최근의 위기에서 기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여야 두 대표의 뜻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삼우그룹은 조용히 변호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국내 최대 로펌에 회사 내부 법무팀까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최고 수준의 법조인들이 거의 합숙하다시피 하며 다가오는 청문회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김대영은 공식적으로 의식불명 상태로 집에서 누워서 나오질 않았으며, 부회장인 김태준도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며 청문회 준비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삼우그룹의 일원 중 또 다른 한 사람은, 직접 강철을 찾아왔다.

“작년에 한 회장님 장례식 때 뵙고, 처음 보는 것 같네요.”

3월 15일 일요일 저녁 8시.

여야가 청문회를 4월 1일 수요일부터 7일 화요일까지 6일간 개최하기로 합의한 날.

강철은 한 사람의 부름을 받고, 강남 와인바로 와 룸에 앉아 그 사람과 대면하게 됐다.

“그땐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제라도 정식으로 인사하게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유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물음에 강철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가야호텔 총괄사장 김도은이에요.”

여자, 삼우그룹 김대영 회장의 딸이자 김태준 부회장의 여동생인 가야호텔 총괄사장 김도은은 그렇게 말하며 강철을 향해 우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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