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150화 (150/175)

150 장부 (2)

“으음…….”

침음성을 내뱉으며 박태화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김 회장이 좀 고지식하긴 하지. 좋게 말하면.”

나쁘게 말하면 구시대적이다.

이 인식은 박태화도 마찬가지로 강철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었다.

박태화뿐 아니라, 다른 재벌그룹 총수 상당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싸움은 삼우그룹이 걸어온 겁니다. 저는 삼우그룹과 대립할 생각이 아예 없었습니다.”

강철의 말에 결국 박태화는 더는 김대영과의 화해를 주선할 수가 없었다.

강철의 말마따나 이 모든 싸움은 삼우그룹 김대영이 택도 아닌 이유로 걸어온 것이지, 강철이 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래도 너무 멀리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네가 가장 잘 알겠지만, 이 세상엔 영원한 적이란 없으니까.”

자신을 생각하기에 박태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임을 잘 알았기에 강철은 그런 조언에 대해서까지 자신의 고집을 관철하려 들진 않았다.

“네, 조언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조언 자체를 수용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김대영이 먼저 걸어온 싸움이었고, 이제는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이어질 싸움이 됐다.

이 싸움에서 시간은 강철의 편이었다.

김대영은 길어봐야 2년만 더 살 수 있을 뿐이었다.

그 2년만 버티면, 김대영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고, 결국 강철이 승리하게 된다.

‘박 회장의 도움이 그때까지 지속되려면…… 흐음.’

일신과 거목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랬기에 강철에게는 삼우와 견줄 수 있는 대기업인 태성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힘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강철에게 분명하게 바라는 게 있다.

‘박정연.’

오늘은 일단 관련된 이야기를 중간에 강철이 사실상 잘랐지만, 언제까지고 자르고만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언젠가 강철은 박태화에게 그리고 박정연에게 답을 줘야 하고, 만약 그때까지 답을 주지 못한다면 박태화의 마음부터 떠날 수가 있다.

‘소영이 1주기가 지나면.’

그리고 강철은 그 날짜를 어느 정도 마음으로 잡아 둔 상태였다.

‘그때까지 김대영과의 싸움에서 얼마나 우위에 서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강철은 짬뽕을 마저 흡입했다.

3.

2015년 1월 5일 월요일 오전 10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곧 개각이 단행될 거라는 뉴스가 자자합니다.”

강철은 야당 대표의 사무실에서 그와 접견하고 있었다.

“여당에게는 정국 전환용이겠지만, 야당으로서는 무언가를 보여줄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강철의 말에 야당 대표는 허허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국민과 국가를 위한 개각이 돼야 하고, 인사 검증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철은 속으로 조소했다.

관심법을 통해 들려오는 야당 대표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야권에선 똑 부러지는 주자가 안 보이지 않습니까? 유력하다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다들 사실 여론조사를 보면 고만고만하고 말입니다.”

강철의 말에 야당 대표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강철은 그가 속으로 꽤나 흔들리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자기도 정치인이라 이거지.’

모든 정치인은, 하다못해 일개 구의원이라 하더라도, 최종적인 꿈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4선 의원인 현 야당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금처럼 야권 유력 대선 주자들이 고만고만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한 꿈을 꿀 여지가 있었다.

강철은 그것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응? 이게 뭡니까?”

강철은 야당 대표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야당 대표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강철을 바라보며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강철은 열어 보라며 손짓했다.

야당 대표는 조심스럽게 서류 봉투를 열었다.

서류 봉투 안에는 50장의 A4용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A4용지에는 특정한 장부의 복사본이 들어가 있었다.

야당 대표는 가만히 장부 복사본을 살폈다.

복사본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사이 그의 표정은 점차 얼어붙어 갔다.

“이, 이건…….”

“법무부 장관 후보자, 검찰총장 후보자 그리고 국세청장 후보자가 지난 20년간 모 재벌 총수로부터 후원받은 내역입니다.”

야당 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장부 복사본을 세심히 살피더니, 이내 그것을 내려놓았다.

“후우…….”

그리고 그는 얼굴을 감싸 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대중은 야당을 재벌 편, 부자 정당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그런 부정적 인식을 깨끗이 청산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강철의 말에 야당 대표는 가만히 손가락 사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삼우그룹을 치는 건……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대표님께 부탁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강철은 살짝 야당 대표를 띄워주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여야 통틀어 재벌의 돈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분이 대표님 아니십니까?”

야당 대표는 현금으로만 300억의 예금을 가진, 부동산과 주식 등을 합치면 자산 규모가 1,500억을 상회하는 부유층이다.

그렇기에 재벌들 그리고 업자들이 유일하게 돈으로 접근하지 않는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강철도 야당 대표에게 돈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었다.

“대표님께서 직접 청문회에서 이 자료를 공개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국민에게 보여주십시오. 우리 야당은 부자의 정당도 아니고 재벌의 편도 아니다. 우리는 서민의 정당이고 국민의 편이다. 라는 것을 말입니다.”

야당 대표는 눈을 감았다.

그는 양팔을 소파 팔걸이에 걸친 채 목을 뒤로 젖히며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그의 고뇌를 읽은 강철은 계속해서 그를 설득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장부의 주인은 현재 여론이 안 좋습니다. 그 사람에게 돈을 받은 의원들, 관료들 그리고 심지어 언론인들까지도,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옹호하지 못할 겁니다. 기껏해야 침묵하는 게 전부일 겁니다.”

“그 침묵이 문제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이거를 가지고 청문회에서 날뛴다고 해도, 언론이 침묵하고 검찰이 외면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태극일보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움직여줄 겁니다.”

태극일보가 움직인다는 말에 야당 대표는 눈을 번쩍 떴다.

“……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당 대표는 다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입수 경위를 물어올 겁니다.”

“익명의 내부 고발자라고 하십시오.”

“자칫 잘못하면 우리 당 내에서 삼우에게 협찬을 받은 정치인들도 타격을 입을 겁니다.”

“다들 의원님의 반대파 아닙니까?”

강철의 말에 순간 야당 대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그는 이내 씩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전부는 아닌 모양입니다?”

강철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야당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회가 오면 활용해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은근슬쩍 강철을 떠보았다.

“혹시 가지고 있는 다른 자료에 누구 이름이 올라가 있는가 확인해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강철은 거기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국세청장 후보자는 현 대통령과도 굉장히 인연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동향사람부터, 같은 학교 동문 그리고 처남의 친구까지. 단순히 내각 인사 후보자를 검증하는 걸 넘어서서, 대통령까지 때리실 수 있을 겁니다.”

강철의 뜻을 파악한 야당 대표는 일단 더는 말을 잇지 않기로 했다.

“칼춤 한 번 시원하게 춰 보겠습니다. 허허허.”

4.

매춘 동영상에 대국민 사기극 인증 동영상 거기에 구시대적 계층 인식을 드러낸 녹음 파일까지.

2014년 하반기를 강타한 3가지 악재에 김대영은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가 됐다.

특히 그의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드러낸 녹음 파일은 외신에까지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며 삼우그룹의 평판을 깎아 먹었고, 소액주주협의회는 그것을 빌미로 김대영의 사퇴와 삼우그룹의 전문경영인체제 전환을 요구하고 나서며 그를 공격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에 대한 김대영의 대응은 무시였다.

김대영은 칩거했고, 침묵했다.

총수가 그렇게 나오자 그룹도 마찬가지로 대응했다.

삼우그룹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공보팀은 기자들의 입에서 총수와 관련된 질문이 나오면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물론 김대영이 마냥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아니었다.

대책 없이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신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국세청장이 임명되길.

자신에게 20년 넘게 후원을 받아온, 자신의 충실한 종복인 그들이 주요 사정 기관을 장악하길.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되길.

그날을 기다리며 김대영은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5년 2월 6일 금요일, 정부에선 중규모 개각을 단행한다는 발표를 했다.

개각 대상은 기획재정부와 교육부, 법무부, 통일부, 외교부 그리고 검찰과 국세청이었다.

그중 법무부와 검찰, 국세청의 수장으로 내정된 자들은 모두가 김대영의 종복이었다.

김대영은 이제 반격의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삼우그룹 차세대기획본부에 강철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도록 지침을 하달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인사청문회에서 무난하게 자기 종복들이 통과하여 내각에 입각하길, 그리하여 그들의 칼이 자신의 복수를 위한 춤을 추길.

[20년 넘게 특정 재벌로부터 정기적인 고액의 후원을 받아오신 분들이 과연 내각에 들어갔을 때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하실지, 아니면 그 특정 재벌을 위해 일하실지 저는 여쭙고 싶습니다.]

그러나 김대영의 구상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안 그래도 재벌 총수는 3·5법칙, 무슨 죄를 지어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내외가 나온다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대한 국민들의 지탄이 있는 상황에서 특정 재벌로부터 20년간 후원을 받으시고 고검장 퇴임 후에는 2년간 해당 기업으로부터 자문료를 받아오신 우리 후보자께서 검찰총장이 되신다면 과연 제대로 법치를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야당 대표가 총대를 메고, 장부 복사본을 들이밀며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그리고 국세청장 후보를 압박했다.

야당 대표는 ‘특정 재벌’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누가 봐도 그건 삼우그룹이었다.

<이 기회에 정경유착을 뿌리 뽑아 선진 시장경제를 이룩하자>

야당 대표가 총대를 메고, 태극일보를 필두로 한 주요 언론이 기름을 부었다.

하필 개각 발표가 설 2주 전이었고, 야당 대표의 폭로가 설 1주 전이었던 만큼, 설날 밥상에선 삼우그룹 장학생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됐다.

여론은 악화됐고, 결국 정부는 버티지 못했다.

삼우그룹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은 세 후보자는 모두 자진사퇴 했고, 검찰에서는 삼우그룹에 관한 조사를 시사하며 김대영을 압박해왔다.

“이 출신성분 고약한 근본 없는 천둥벌거숭이가…… 내 장부까지 훔쳐 가서 감히 나를 대적하고 있어?”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김대영은 자기 장부를 누가 훔쳤는지를 드디어 알게 됐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또 의식불명 상태로, 자택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식으로, 비를 피하는 것 말고는 마땅한 대응 방안이 없었다.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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