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자격 (3)
5.
세르게이 블라소프.
2014년 기준으로 만48세가 되는 그는, 2013년까지 가스프롬에서 근무하며 CEO였던 알렉세이 밀레르의 수행비서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알렉세이 밀레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과 함께 폭사하자 그는 회사를 떠났고, 그길로 우크라이나로 넘어가 제법 큰 규모의 배터리 제조 공장의 고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강철과 세르게이 블라소프 사이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단지, 알렉세이 밀레르라는 존재와 한때 가깝게 지냈다는 것 이외에, 두 사람의 교집합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세르게이 블라소프가 6월 1일 러시아에서 출간한 자서전이었다.
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가스프롬 의장이었던 시절 보였던 이상한 행동에 관한, 신빙성 없는 폭로와 함께 푸틴과 밀레르에 관한 찬양과 추모가 주 내용이었는데, 문제는 푸틴과 밀레르를 찬양하는 가운데 한 명의 한국인이 등장한 것이었다.
<철 강. 한국식으로 읽으면 강 철. 그게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 남자는 미국계 투자사와 한국 대기업의 메신저였으며, 양자를 연결해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명확하게 강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러시아어 키릴 문자로 한 번 적은 것으론 부족했나 싶었는지, 친절하게 키릴 문자 옆에 괄호를 치고 강철이라고 한글로 적어둔 그 대목에서, 세르게이 블라소프는 굉장히 강철을 좋게 이야기했다.
<그 한국 젊은이는 올바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조국의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언급했다면, 강철 입장에선 그냥저냥 웃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미국 투자사로부터 받은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지 않고 밀레르 부의장께 드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과 한국, 서구 세력에 의해 분단된 내 조국의 평화를 위해 이 자금을 써 주십시오.” 밀레르 부의장께선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자금은 곧 평양에 전달됐다.>
거기가 전부였다.
그 이후로, 강철에 관한 언급은 책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그 부분 그 자체였다.
“이런 미친 새끼가!”
강철은 들고 있던 책을 집어 던졌다.
최병천은 폭스 뉴스 기사와 함께, 세르게이 블라소프의 자서전을 강철에게 전해주었다.
최병천이 물을 마시며 쉬는 동안 강철은 폭스 뉴스 기사와 자서전에, 친절히 최병천이 책갈피를 꽂아 둔 부분을 읽었고, 이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책을 벽에다 집어 던졌다.
“이 새끼 도대체 뭐 하는 새끼야?”
강철은 바닥에 널브러진 책을 가리키며 최병천에게 물었다.
“저야말로 여쭤보고 싶은 겁니다. 도대체 그 인간 뭡니까?”
강철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밀레르의 비서?’
알렉세이 밀레르와의 만남을 강철은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특별히, 그가 평양에 들어가기 전, 그에게 돈가방을 건네줬을 때의 만남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자서전을 들어 표지를 바라봤다.
표지에는 후덕하게 생긴 러시아 슬라브계 남자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가 세르게이 블라소프였다.
그리고 강철은 그를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알렉세이 밀레르는 경호원이나 몇 거느리고 다녔어. 무엇보다도 나와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그 경호원들조차 멀리 떨어뜨려 놓았지.’
물론, 밀레르가 그에게 돈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순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책에 나온 대로, 무슨 강철이 북한 간첩이나 할 법한 소리를 했다는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소리를 한 적도 없었고, 밀레르도 그런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은 아니었다.
‘뭔가 있다.’
강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뭔가 있다고.
‘근데 그게 뭐지?’
일단 강철은 러시아 쪽에 문의하기로 했다.
그는 곧장 폰을 꺼내 미하일 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그라치아니. 어쩐 일이십니까?]
“세르게이 블라소프.”
[네?]
“세르게이 블라소프라고, 예전에 가스프롬에서 일했다는 놈.”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까?]
“있었던데다가 자서전에다가 아주 내 이름을 깔아 놓았더라.”
[…… 확인해보고 전화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강철은 소파에 앉았다.
그런 강철에게 최병천이 말했다.
“그 러시아 사람도 러시아 사람이지만, 문제는 국내 언론입니다.”
“국내 언론이라고? 설마……”
강철은 곧장 폰을 꺼냈다.
그리곤 대형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곧 그는 볼 수 있었다.
메인을 장식한 속보 뉴스를.
<속보> 일신그룹 경영지원실장 강씨, 북한에 불법 자금 전달
<속보> 일신그룹 경영지원실장 강철, 불법 대북 송금
<속보> 일신그룹 경영지원실장 강모 씨, 러시아 통해 북한에 불법 자금 전달
태극일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 언론사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보도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에서?’
강철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러시아 내에서 일어난 음모나 공작이 아니라, 국내에서 일어난 음모나 공작이라는 것을.
‘누가?’
강철의 머릿속으로 용의자가 순식간에 쫙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 중, 이 정도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태화 회장이 그럴 리는 없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면, 나한테 무조건 들켰을 거니까.’
박태화는 그럴 능력은 있었지만, 그럴 의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와는 최근까지도 종종 만남을 가졌고, 그때마다 강철은 관심법으로 그의 내면을 읽었다.
박태화가 지닌 욕망은 강철을 어떻게든 박정연과 연결시키려는 것이지, 강철을 엿먹이려는 건 아니었다.
‘한준영한테는 그럴 능력이 없어.’
한준영은 그럴 의지나 동기는 충분히 있었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는 러시아에 그 어떠한 인맥도 없었다.
‘도대체 누가? 정권에서? 아니면 야당에서?’
정치권으로도 의심의 눈초리를 돌려 보았지만, 마땅히 그럴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강철은, 영향력이 생기기 시작한 때부터, 여당과 야당 모두에게 충실하게 약을 쳐뒀기 때문이었다.
‘군소정당에도 약을 쳤는데 정치권에서 이럴 리는 없어. 걔들이 내 뒤통수를 언제든 칠 놈들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주도적으로 치진 않을 놈들이야.’
강철은 혼란에 빠졌다.
‘누구야, 도대체 누가?’
강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강철에게 최병천은 말했다.
“일단 김명길 회장이랑 서용태 이사랑 협의해서 의심 갈 만한 인물들 중심으로 감시망을 깔아 놓은 상태입니다. 한준영과 여야 대표 및 원내대표한테 사람을 붙여두었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사람 있습니까?”
그 물음에 강철은 잠시 고민하다가 몇 사람을 더 언급했다.
“윤경태, 윤준태 그 인간들한테도 사람 붙여 둬. 그 인간들도 거목을 노리던 놈들이라, 용의선상에 오르기엔 충분해.”
“네, 알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용의자 색출이 우선이었다.
‘의도가 뭐건, 곱게 죽여주진 않으마.’
6.
강철이 알렉세이 밀레르를 통해 북한에 자금을 전달했다는 이야기.
진위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세르게이 블라소프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지만, 한국 언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다.
태극일보와 함께 3대 일간지로 불리는 무궁일보, 고려일보는 세르게이 블라소프의 자서전과 폭스 뉴스의 보도를, 그리고 나머지 일간지는 각각 3대 일간지의 보도와 폭스 뉴스의 보도를 레퍼런스로 하여 기사를 쏟아냈다.
<폭스 뉴스에 따르면……>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블라소프에 따르면……>
폭스 뉴스는 한국이 친러 국가가 되는 과정에 한국인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고, 그걸 받아쓰는 한국 언론은 그 한국인이 일신그룹과 거목그룹의 대주주인 엄민식 군의 후견인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을 넘어서 여적죄를 적용할 수도 있는 사안이라고 봅니다.]
[사실 확인은 필요하겠지만, 어쨌건 이런 일에 연루돼 있다는 것만으로도 과연 이 사람에게 후견인 자격이 있는가? 그런 의문이 생깁니다.]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이 사람이 죽은 한소영 전 회장의 비자금 총책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후견인까지 됐다는 거야.]
종편에서는 하루 종일 관련 이슈를 떠드는 패널들로 가득했고, 그들 중 일부는 아예 자기 상상 속 이야기를 사실인 양 떠들기도 했다.
진지하게 이 이슈를 다루는 패널이건, 반쯤 오락성으로 다루는 패널이건, 공통적으로 그들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그리고 여적죄까지 적용 가능한 행위를 했다는 의혹이 있는 사람에게, 과연 한국 20대 재벌그룹 두 곳의 대주주로 있는 사람의 후견인 자격이 있는가? 이게 결국 이번 사건의 핵심입니다.]
오로지 태극일보만이 조심스럽게 무죄추정의 원칙과 세르게이 블라소프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강철을 옹호하는 기사를 작성하긴 했지만, 아무리 태극일보라도, 숫자에서 밀리는 이상,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거 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6월 11일 수요일 저녁 8시.
강남 일식집 룸.
삼우그룹 회장 김대영은 김태준, 한준영을 좌우에 앉히고서, 술을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 방에 그 인간의 자격을 전 국민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야당에서도 말이야. 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어. 그…… 그 근본이 고약한 놈한테 돈 받은 것들이 좀 있어서 공식적으로 담화문 같은 걸 내진 않겠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분위기를 달구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거야.”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이 아니셨다면,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 출신성분 고약한 천둥벌거숭이를 계속 때리라고. 자네가 어쨌거나 그…… 그 누구야?”
김대영이 헷갈려 하자 가만히 스시를 먹던 김태준이 답했다.
“엄민식입니다, 아버지.”
“그래…… 그 민식이. 민식이 외삼촌이잖아. 안 그래?”
“명심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한준영은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김대영에게 말했다.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일신정밀기계 매각은 제가 꼭,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
김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술자리는 1시간 정도 더 이어지다가 파했다.
김대영과 김태준이 먼저 차에 올라타 식당을 떠났고, 한준영은 그런 두 사람의 차 뒤꽁무니에 허리 숙여 인사하며, 차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차가 사라지자 그는 후련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래, 그 출신성분 고약한 새끼가 민식이 후견인으로 있는 건, 일신그룹 실세로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애초에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잖아.”
그러면서 그는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혹시 소영이 그 자식이랑 놀아난 거 아니야? 진짜 왜 그 인간을 그 자리에 올려둔 거지?”
그 순간, 대답은 그의 내면이 아닌, 뒷좌석에서 들려왔다.
“지옥에 가서, 천국에 있는 소영이한테 직접 물어봐.”
“헉-!”
분명, 아무도 없었다.
백미러를 통해 본 뒷좌석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운전석 바로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곧장 한준영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쳐서, 그를 기절시켰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