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자격 (2)
3.
“이젠 좀 괜찮아진 겁니까?”
5월 26일 월요일 정오.
중구 일신그룹 본사 인근 양식당 룸.
“응. 덕분에 괜찮아졌어.”
“괜찮아졌다니 다행입니다.”
강철과 박정연은 함께 마주 앉아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근데 저번에 우리 말 편하게 하기로 하지 않았어?”
“누님만 편하게 하시기로 한 겁니다. 전 이게 편합니다.”
“에이, 너무 관료적으로 느껴지는데?”
박정연은, 작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테러 사건 직후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좋아져 있었다.
여전히 아버지에 의존적이었고, 아버지의 총애와 관심 그리고 사랑을 갈망하는 뒤틀린 심리는 그대로였지만, 예정된 의무복무기한도 못 채우고 군복을 벗어야만 했을 만큼 정신적 충격이 심했던 사건 초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나아졌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이런 말투에.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누님에게 이런 말투로, 아니 더 공손한 말투로 말할 테니 말입니다.”
“…… 넌 내가 그럴 자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철이 박태화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태성의 후계자에 관한 어떤 언질을 충분히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랬기에 그녀는 기대하고 있었다.
강철의 입에서 나올 말을.
“뭐…… 상식 아닙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강철은 그렇게 대답하며 폰을 꺼내 인터넷 블로그 게시물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게 뭐야?”
“재벌에 관심이 많은 어떤 블로거가 운영하는 건데, 거기에 태성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성그룹 후계자에 관한, 개인 블로거의 의견에 불과한 글이었지만, 강철이 보기에도 그것은 상당히 정확한 분석이었다.
지라시는 배제하고, 오로지 공개된 뉴스 보도만 가지고 분석한 그 블로거의 글에서, 태성의 후계자는 박정연이 유력했다.
“수상한 이유로 군 면제가 된 박동진과는 달리, 비록 석연찮은 이유로 의병 전역을 하긴 했지만 장교로 2년 가까이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박정연은 습관처럼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며 정독했다.
그러는 사이 요리가 나왔고, 강철은 박정연이 요리에 신경을 쓰건 못쓰건 상관하지 않고 먼저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강철이 스테이크 절반 정도를 먹었을 때, 박정연은 폰에서 시선을 뗐다.
“이거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누님이 봐도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박정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며, 폰을 강철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곤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사람들은 재벌에 대해 하나는 알고 둘은 몰라. 아니, 어쩌면 하나조차도 몰라.”
그녀는 거기까지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분명 그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재벌 총수의 마음은 갈대 같아서, 변덕이 심해. 절대 체계적이지도 않고, 계획적이지도 않아.’
그것이 재벌가에 몸담고 있는 그녀가 인식하는 재벌이었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아버지 박태화로부터 받은 정형화된 재벌에 관한 이미지였다.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구만.’
어쩌다 보니, 박태화 때문에 그녀와 엮이게 됐다.
자연스럽게 강철은 그녀를 한소영과 비교하게 됐다.
그리고 한소영과 비교했을 때, 박정연은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나도 많이 하는 타입이었다.
‘한심하기는.’
그 모습이 강철에겐 한심하게만 여겨졌다.
“역사적 상식을 생각하면 됩니다.”
강철의 말에 박정연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세습 군주는 자기 뒤를 이을 후계자가 뛰어난 존재이길 바랐습니다. 장자상속제가 확립된 곳에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 장자를 교육했고, 그렇지 않은 곳에선, 최대한 유능한 자식을 근처에 두고 키웠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거란 거야?”
“박 회장님이라고 다를 건 없을 겁니다.”
“그럼…… 내가 오빠보다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중국에서 사고치고 반쯤 가택 연금 상태로 있는 사람보다야, 오늘부터 태성전자 마케팅부에서 일하게 된 사람이 더 유능하지 않겠습니까? 정확하게는, 더 앞날이 유망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 자체는 박정연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이 박정연의 호감을 산 건 확실했다.
‘뭐, 선만 안 넘으면 되니까.’
강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박태화의 호의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활동을 마무리 지어갔다.
4.
2014년 6월 4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는 별다른 비극적인 사건도, 희극적인 사건도 없는 평범한 분위기 속에서,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적인 성격이 가미되면서, 야당의 승리로 끝났다.
야당은 서울과 인천,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와 강원도 그리고 전통적 표밭인 영남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여당은 충청도와 제주도 그리고 전통적 표밭인 호남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야당 입장에선 고무적인 결과였고, 2년 후 있을 총선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기반을 다진 셈이었다.
여당 입장에선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 및 남북러 3자 정상회담이 흐지부지되며 내세울 만한 치적이 사라졌고, 무엇보다도 건보 재정 확보를 위해 담뱃값을 올리면서 민심이 이반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내부적 자성의 목소리가 대두되는 가운데, 대통령과 반대되는 파벌들 간의 합종연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역사가 바뀌어도, 담뱃값은 오른 걸 보면 참…… 이런 건 변하지 않는 역사인 건가?’
6월 7일 토요일 오후 1시.
잠원동 펜트하우스 단지 내 편의점에서 4,500원을 주고 담배 한 갑을 사서 나오면서, 강철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재벌들의 운명이 바뀌고, 세계의 운명도 바뀌었어. 그건, 그 운명의 힘이 그만큼 약했다는 해석이 되겠지. 그런데 담뱃값은 올랐단 말이야. 그럼, 담뱃값 인상이라는 역사적 운명의 힘이, 세계 종말이라는 역사적 운명의 힘보다 강하다는 건가?’
그러다가 강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심심한 모양이네. 이딴 정신병자 같은 생각이나 하고.’
강철은 피식 웃으며, 아파트 단지 내 흡연구역으로 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러시아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이지만, 실제 역사보단 온건해지고 있어. 그렇게 될 거고.’
푸틴이 죽고, 그 충격의 여파가 수습된 후, 정상적인 정부가 들어선 러시아는, 실제 역사보다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에 대해 덜 강경하게 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완강히 반대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내 친러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실제 역사에서처럼 동부 지역에서 반군을 지원해 괴뢰국을 세운다거나 크림반도를 강탈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이지 않았다.
‘국내 정치는 뭐 늘 그랬듯, 양당이 주거니 받거니 할 거니까, 적당히 양쪽 모두에 약 좀 쳐 두면 될 거고.’
실제 역사에서 대통령이 됐을 사람들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그렇지 않고 정계 은퇴를 했을 사람이 대통령이 되거나 유력주자로 거론되곤 있었지만, 아무래도 불확실성이란 측면에서 봤을 땐, 충분히 관리 가능한 상태였다.
‘이젠 민식이가 클 때까지 일신그룹과 거목그룹을 잘 키워두고, 두 기업을 잘 합병하고, 한준영 일가 쪽 영향력은 완전히 박살 내기만 하면 되겠어.’
강철은 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다.
아무것도 할 일 없는, 무료한 토요일.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배신할 생각이 없는 전문가들에게 실무를 맡겨둔 채, 큰 그림만 관리하면 되는 삶.
분명히 이전 생보다 평화롭고 부유하며 안락한 삶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삶이 강철이 꿈꾸던 진정한 삶이었을 것이다.
‘이대로 한 30년 정도 지나서, 내가 50대가 되고 민식이가 30대가 되면, 그때부터 차근차근 지분을 물려주면 되는 일이야.’
자신의 성인 강씨 성을 따르진 않지만, 강철은 그런 것에 연연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의 성조차도 진짜인지 아닌지, 진짜라면 모계인지 부계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중요한 건, 자신의 유전자를 절반이나 품고 있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 아이를 위해 이제 자신은 전념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났다.
엄민식은 훌륭한 어른이 됐고, 강철은 그에게 일신그룹과 거목그룹을 하나로 합친, 10대 재벌의 반열에 오른 대기업 집단의 지배 지분을 물려주기 시작했다.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다.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최악의 상황으론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렇게 강철의 이야기는 끝났다.
[……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이잉-! 지이이이이잉-!]
“으응…… 응?”
탁자 위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진동에 강철은 눈을 떴다.
‘잠들었나?’
강철은 먼저 거실 벽에 걸린 벽걸이 세계를 확인했다.
시침과 분침이 각각 5와 3을 가리키고 있었다.
‘4시간 정도를 이렇게 잔 건가?’
강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평화롭긴 평화로운 모양이야.’
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한 차례 기지개를 켠 후, 폰을 확인해 보았다.
‘뭐지?’
부재중 전화가 무려 15통이나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최병천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강철은 순간 불길함을 느꼈다.
한 번씩 강철이 최병천의 전화를 받지 못한 적은 있었지만, 그럴 때면 보통 최병천은 연락 바란다는 문자만 남겨뒀지 이런 식으로 미친 듯이 전화를 걸진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어.’
본능적으로 강철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다시 폰이 진동했다.
역시나 발신자는 최병천이었다.
이번에 강철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요?”
강철의 물음에, 수화기 너머에서 최병천의, 굉장히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나왔다.
[대체 왜 전화를 안 받으시는 겁니까?]
처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최병천은 단 한 번도, 강철에게 불평을 한 적이 없었고, 이렇게 다급하게 말한 적도 없었다.
눈앞에서 강철이 흉기를 든 깡패와 싸워 그들을 때려눕혔을 때에도, 최병천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최병천이 다급하게 강철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요?”
강철의 물음에 최병천은 따지는 걸 멈추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큰일 났습니다. 이상한 폭로가 나왔습니다.]
“이상한 폭로?”
[러시아에서 자서전 하나가 나왔는데, 거기에 실장님 실명과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강철의 표정이 굳었다.
“러시아? 아니, 거기 자서전에 왜 내 이름이?”
[지금 실장님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최병천은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5초 후, 초인종이 울렸다.
강철은 빠르게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최병천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걸 보십시오.”
들어오자마자 최병천은 강철에게 문서 하나를 건넸다.
영어 기사였다.
‘폭스 뉴스?’
강철은 살짝 초능력을 끌어올렸다.
러시아에서 얻은, 통역 초능력은 말뿐 아니라 글자에서도 효력을 보였다.
곧, 강철의 눈으로 들어온 영어가 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자동으로 한글로 번역됐다.
“이게 무슨 소리야 씨발!”
그리고 강철은, 자기도 모르게 쌍욕을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