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자격 (1)
1.
“할 만한가?”
5월 22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강철의 물음에 술을 마시던 김덕흠은 술잔을 기울이다가 말고 다시 각도를 수직으로 맞췄다.
“술은 마시고 대답해.”
“아, 감사합니다.”
김덕흠은 술을 쭉 들이켠 후,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티슈로 입가를 닦고는 그에게 말했다.
“실장님 덕분에 차근차근 구조조정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아시다시피 해고도 아니고 인사이동을 가지고는 뭐 누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고는 참 잔인한 일이야. 사람의 밥그릇을 빼앗는 일이고, 깨는 일이고, 순식간에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로 몰아가는 일이잖아. 안 그래?”
그 말에 순간 김덕흠은 잘려나간 왼쪽 중지가 아려오는 걸 느꼈다.
“그, 그렇습니다.”
식탁 아래에서, 오른손으로 사라진 왼손 중지 부근을 어루만지며, 김덕흠은 강철의 말에 동조했다.
“거기다가 자칫 해고했다가 노조라도 들고 일어나면 굉장히 피곤해진단 말이야. 안 그래?”
“그, 그래서 그런 것까지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현재 한준영 측 인사들을 전부 한직으로 빼돌리고 있습니다.”
“잘 하고 있어.”
강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술을 쭉 들이켰다.
“한준영은?”
“뭐, 계열사 상무급들하고 열심히 3/4분기 영업이익 상승을 위해 미팅을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그게 자기 본연의 업무니까.”
“뭐, 회사 차원에선 영업 실황이 좋아지는 게 좋지만…… 한준영 측의 힘을 완전히 빼기 위해선 어느 정도 손해는 감수할 수 있지……”
“그건 안 되지.”
강철은 정색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강철은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가 너무나도 강경한 태도로 정색하고 나섰던 만큼, 김덕흠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그만 실언을…….”
“일신그룹은 나중에 고 한소영 회장님의 하나뿐인 아들 엄민식 군에게 돌아갈 회사야. 그런 회사가 단순히 내부 정치 문제 때문에 영업이익에 손실을 입어야만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건 진심이었다.
대외적으로 강철은 엄민식의 후견인이었고, 실제로는 아버지였다.
푸틴의 죽음으로 예정된 종말이 사라진 지금, 강철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엄민식이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김덕흠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일신그룹 영업이익 성장세의 둔화를 명목으로 자신의 대적자인 한준영을 완전히 날려버리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음을 알았기에, 강철은 화까지는 내지 않았다.
“다만, 한준영의 힘은 계속해서 빼야 해. 어쨌건 그 인간은 장기적으로 엄민식 군에게 적이 될 사람이니까.”
“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가을이 되기 전에 한준영 측 인사들은 말단 과장까지 전부 한직으로 밀려날 겁니다.”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이 한결 누그러지자 김덕흠은 계속해서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일신과 거목의 합병 말입니다. 그…… 대놓고 1대1 합병은 좀 힘들고 해서, 일단 각 사업 부문별로 공동출자 회사를 만들어서 차근차근 합병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말입니다.”
김덕흠에게 주어진 업무는 인사만이 아니었다.
훗날 엄민식이 경영 일선에 참여하게 됐을 때, 보다 원활하게 지금보다 큰 규모의 회사를 이끌게 하고자, 강철은 한 가지 구상을 했다.
그건 바로 거목과 일신의 합병이었다.
당장에는 어렵더라도, 차근차근, 시간이 걸리더라도, 강철은 거목과 일신을 하나로 합쳐서 엄민식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 계획의 초안을 김덕흠이 구상해서 강철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요지는 간단했다.
당장에 1대1 기업 합병은 주주들의 반발도 있을 것이고, 정부의 제재도 있을 터였다.
그러니 먼저 각 사업 부문 계열사들이 공동출자를 해 하나의 회사를 설립하고, 천천히 그 회사에 모든 일감을 몰아서 역으로 합자회사가 출자회사를 삼키는 방식으로 합병을 진행하자는 것이 김덕흠의 안이었다.
“흐음…… 시간은 걸리겠지만 제일 안전한 방법이겠어.”
“그리고 제일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전문적인 건 일단 전문가한테 맡겨 놔야지.’
디테일한 법리적, 경영학적, 회계적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맞다.
강철이 사람 죽이고, 뒤에서 판을 짜는 건 잘할지 모르지만, 디테일하게 숫자를 다루고 법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일에는 미숙했다.
그걸 본인이 잘 알았기에, 강철은 최병천이나 김덕흠 같은 전문가를 기용하고 그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권한을 줘가며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시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그가 지닌 초능력-관심법에 있었다.
‘만약 역사상 독재자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면, 자기가 모르는 비전문 분야에 손을 데다가 일을 망치는 짓을 하진 않았겠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강철은 김덕흠에게 지침을 내렸다.
“최종적으로, 합자회사에 한보성과 한준영 쪽의 통제력은 없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걱정 마십시오. 그쪽 인사들은, 전부 관련된 업무 담당자 리스트에서 빼고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김덕흠의 모습에 강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2.
한준영은 모든 면에서 강철에게 밀리고 있었다.
지분, 우호지분, 지배력 그리고 심지어 정계의 영향력까지.
그저 아버지 한경석의 그림자 밑에서만 살아왔던 그에게, 그 그림자가 사라진 순간 남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뒤늦게 부랴부랴 그나마 있던 돈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지만, 한소영이 총수로 있을 땐 모두가 한소영만 바라봤고, 강철이 실질적인 총수 자리에 올랐을 땐, 모두가 강철만 바라봤다.
심지어 그룹 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한준영 추종 세력까지 강철로부터 구조조정 전권을 받은 김덕흠에 의해 모두 한직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으며 자진 퇴사하거나, 조용히 한준영과의 연을 끊거나 했다.
그야말로 모든 측면에서 강철은 한준영을 압도했다.
그러나 딱 하나, 그 한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한준영이 여전히 강철을 압도하고 있었다.
바로 혈통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7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 재벌이란 존재는 귀족이 됐다.
1세대까지는 비교적 그런 부분에서 자유로웠지만, 2세대를 거치며 혈통적 통제가 강화됐고, 그것은 3세대에 이르러 완벽하게 공고한 그들만의 아성이 됐다.
마치 중세 유럽의 귀족 가문처럼, 한국 재벌가는 혼인으로 복잡하게 엮여서 몇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사돈 관계가 되는, 그런 수준까지 나아갔다.
한준영도 그런 혈통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대단했다.
일단 그의 외가부터가 재계 서열 4위의 대기업 집단 시그니엘그룹의 방계 일가였고, 처가는 보국그룹 연씨 일가였다.
그것이 강철이 가지지 못한, 유일하게 한준영이 강철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 우위에 서 있는 요소였다.
그리고 그 요소는 꽤나 강력한 것이었다.
“요즘 다들 말이 많아, 말이. 이 어디서 출신성분 고약한 천둥벌거숭이 하나가 나타나서는 이 30대 재벌 기업 2개를 쥐락펴락한다고 말이야.”
5월 25일 일요일 저녁 6시 30분.
서초동의 한 한식당 VIP룸.
한준영은 공손히 무릎까지 꿇은 채 맞은편에 앉은 노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 조선천지에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그런 일은.”
목소리부터 행동거지까지 굼뜨기 짝이 없는 노쇠한 남성의 정체는 대한민국 재계 서열 부동의 1위인 삼우그룹의 회장 김대영이었다.
“이미 고인이 됐지만, 그래도 한소영이는 근본이 있잖아? 경석이가 아버지고 시아버지는 근식이고 어?”
죽은 한경석이나 엄근식보다도 형님뻘인 김대영의 말이었기에, 그 누구도 그게 무례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그…… 그 출신성분 고약한 천둥벌거숭이는 뭐야 도대체? 그 이름이 뭐였더라? 태준아, 그놈 이름이 뭐였지?”
김대영의 물음에, 김대영이 앉은 상석을 기준으로 우측, 즉 한준영의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국을 떠먹고 있던 삼우그룹 부회장이자 김대영의 장자인 김태준이 말했다.
“네, 강철입니다. 강철.”
“그래, 그 강철. 이름도 무슨…… 저기 제철소에서 쇠질이나 하면 딱인 놈이 말이야. 이 근본도 없는 놈이. 걔는 부모가 뭣 하는 인간인지도 모르는 고아잖아.”
자신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김대영의 말에 한준영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 회장님.”
“요즘 세상이 아무리 뭐 변하니 뭐니 해도, 사람은 근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근본이 있어야 정통성도 생기고, 누가 시비를 안 건다고.”
“세상이 썩었습니다, 회장님.”
“이거는 썩은 정도가 아니야. 완전히 회까닥 돌았어.”
“맞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회장님께 조언을 구하고자 바쁘신 분 붙잡은 거 아니겠습니까?”
한준영은 김대영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가 김대영의 잔을 채워주자 김태준이 술주전자를 건네받아 자기 잔을 먼저 채우고 한준영의 잔을 마저 채워주었다.
김대영은 술잔을 쥔 채, 들진 않은 상태로 말했다.
“그…… 누구라 했지? 자네 조카.”
이번에도 대답은 김태준에게서 나왔다.
“민식입니다. 엄민식.”
“그래, 민식이. 걔 봐봐. 걔 얼마나 근본이 있어? 아버지는 거목그룹의 엄태욱이고, 할아버지는 엄근식이고. 어머니는 일신그룹의 한소영이고, 외할아버지는 한경석이고. 이 얼마나…… 어? 그…… 혈통부터가 남다르잖아.”
한준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양친이 모두 직계 혈통이잖아. 그런 그…… 귀한 아이를 말이야. 그런 근본 없는 놈이 후견인으로 있는다는 건 이 말이 안 되는 거야.”
“저도 소영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 인간의 자격에 대해 시비를 걸어야 해. 과연 네놈이 우리 조카의 후견인 자격이 있느냐? 어?”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게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고…… 어쨌건 이놈의 법이라는 게 이…… 중졸 고아라서 후견인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라서…….”
“그러니까…… 그 자격 없음을 증명할 것들을 찾아내야지.”
한준영은 본능적으로 김대영이 지금 자신에게 딜을 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가 못나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회장님. 저의 힘이 돼 주십시오. 그럼 저도 회장님의 힘이 돼 드리겠습니다.”
김대영은 말없이 잔을 들어 홀로 술을 쭉 들이켰다.
한준영이 그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김대영은 한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랑 여적죄, 이 정도면 충분히 자격에 문제가 되겠지?”
그 말에 한준영의 눈이 떨렸다.
“구, 국보법 위반에 여, 여적죄면 그건 후견인 자격을 넘어서 대한민국 국민 자격도 문제 삼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충분합니다.”
그 말에 김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한준영도 잔을 들었고, 고기를 뜯어 먹던 김태준도 잔을 들었다.
“근본 있는 사람끼리 잘 뭉쳐야지.”
그게, 김대영의 건배사였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