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138화 (138/175)

138 신질서 (3)

6.

“나는 러시아 연방 대통령의 권한을 수행함에 있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2014년 5월 7일 수요일, 올림픽 등을 이유로 헌법을 어기면서까지 시간을 질질 끈 끝에 마침내 러시아 대선이 치러졌다.

“…… 러시아 연방 헌법을 준수하고 수호하여 국가의 주권과 독립성, 안전과 완전성을 수호하며……”

당초에 지배 세력 간의 분열과 그로 인한 후보 난립으로, 상당히 혼란한 선거 양상을 보일 거라던 서방 정치 평론가들의 분석과는 달리, 러시아 지배 세력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을 단일 후보로 내세웠다.

“…… 국민에게 성실히 봉사할 것을 선서합니다.”

러시아 공산당에선 늘 그랬듯 겐나디 주가노프가 후보로 나섰다.

늙은 공산당 지도자는 재벌과 방송, 국가기관의 도움을 받는 상대적으로 젊은 현직 총리를 이기지 못했고, 투표 결과는, 부정선거 의혹이 있긴 했지만,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무난하게 67%를 얻으며 당선되는 것으로, 시시하게 끝났다.

“드미트리 아나톨리예비치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러시아 대통령의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2014년 5월 14일 수요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의 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푸틴을 대신해 3대 대통령에 잠시 앉았다가 물러 난지 3년 만에 크렘린으로 당당하게 복귀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푸틴처럼 모든 권력을 완전하게 장악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의 경쟁자이자 강경파를 주도하는 이고르 세친을 총리로 임명하고, 세친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니콜라이 파트루셰프를 계속해서 국가안보회의 서기로 유임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착실하게 강경파로 가득한 러시아 정부를 자신의 세력으로 채워나갔다.

그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리고 강철과 잘 아는 사람 하나도, 그런 인사이동의 결과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게 됐다.

“아무리 러시아 상황이 혼란하다곤 하지만, 일개 대위가 순식간에 별을 달고 해외정보국 부국장까지 올라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5월 21일 수요일 오후 2시.

모스크바 야세네보 해외정보국 본부 부국장실.

외국인은커녕 러시아인이라도 정당한 공무가 없으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강철은 새로이 해외정보국 부국장이 된 미하일 킴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새 대통령께서 아무래도 새로운 바람을 원하시는 만큼, 기존 사람보단 새로운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원하신 것도 있고, 또 제가 비슬라브계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번 선거에서 비슬라브계 러시아인들한테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셔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미하일 킴은, 강철에게도 공을 돌렸다.

“물론,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허버트 대표님과 그분의 뒤를 이어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신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의 그라치아니 대표님 덕분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물론 미하일 킴이 지난 3년간 마냥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때로는 중국과 일본에서 열심히 공무 수행을 하며 조직 내에서 업적을 쌓아 나갔다.

강철은 대위에서 순식간에 별을 달았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는 2013년에 이미 대령까지 진급한 상황이었다.

그의 말대로 강철이 존 크리스토퍼 허버트와 조반니 그라치아니의 명의로 뿌린 돈과 푸틴과의 차별화 및 자기 세력을 키우기라는 새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인사 기조가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맞았다.

하지만, 미하일 킴이 마냥 운이 좋거나, 든든한 스폰이 있기만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피로 물든 계급장이라…….’

한국과 중국, 일본 등지에서 행한 그의 ‘공무수행’은 명백한 의미에서 ‘살인교사’ 및 ‘살인’이 포함된 것이었다.

강철의 생각대로, 미하일 킴의 계급장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강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의 돈에도 피가 듬뿍 묻어 있긴 마찬가지였으니까.

‘중요한 건, 나에 대해 두려움을 품은 인간이 보안기관의 요직에 올라갔다는 거지.’

미하일 킴은 기존에 강철이 러시아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고위 관계자들과는 달랐다.

예를 들어, 푸틴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폭사한 알렉세이 밀레르의 경우 강철에게 친근함을 느꼈고, 그와 동업자라는 의식은 있었지만, 두려움을 갖고 있진 않았다.

강철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고, 기껏해야 강철이 미숙한 암살자를 제압하는 모습만 봤기 때문이었다.

즉, 강철의 힘을 몰랐기에, 알렉세이 밀레르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좋게 봐 줘봐야 대등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아니면 자신에게 뇌물이나 바치는 동양인으로만 봤을 뿐이었다.

그건 메드베데프 정부 하에서도 크렘린 대변인직을 유지하게 된 페스코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하일 킴은 달랐다.

그는 강철이 순식간에 중무장한 연방보안국 요원들을 제압하는 것과 자신의 상사를 찢어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큰 두려움이 됐고, 그 두려움이 본질적으로 다른 러시아 내 지도층 인사가 강철을 대하는 것과 그가 강철을 대하는 것의 태도적 차이를 만들어냈다.

‘푸틴은 죽었고, 강경파는 차츰 세력이 약해지고 있으니까,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겠지. 더 나아가 세계가 멸망하는 핵전쟁도 당연히 일어나지 않을 거고.’

어쩌면, 헨리 키신저가 이야기한 미국과 러시아가 연대해 중국을 견제하는 일까지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강철은 생각했다.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러시아와 그런 러시아에서 나를 두려워하는 고위 관계자라…….’

이제 러시아에서, 강철이 개인적으로 얻어낼 이익은 따로 없었다.

극동개발탐사의 지분은 이미 한국의 청월로 옮겨졌고, 푸틴도 죽었으니, 이곳에서 그가 개인적으로 볼 일은 이제 없었다.

하지만 강철 개인이 아닌, 그가 통제하는 거목그룹과 일신그룹 그리고 그와 협력하는 태성그룹은 즉, 법인들은 이곳에서 볼일이 아주 많았다.

‘한국 정부에도 이런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민주주의 국가랑 권위주의 국가가 같진 않겠지만…….’

그런 측면에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엘리트의 존재는 굉장히 큰 자산이 될 터였다.

“아, 그리고 조만간에 한 번 대통령 각하와 독대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러시아 연방과 한국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해주시는 분인 만큼, 대통령 각하께서도 흔쾌히 동의하실 겁니다.”

미하일 킴의 말에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가 잡히는 대로 연락 줬으면 좋겠어. 메드베데프 대통령께 필요한 선물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그렇게 러시아에서도, 신질서가 수립되고 있었다.

7.

“부회장님, 다음 미팅까지 10분 남았습니다.”

5월 22일 목요일 오후 5시.

중구 일신그룹 본사 17층 부회장실.

비서의 일정 보고에 책상에 앉아 가만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고스톱이나 치고 있던 한준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늦으시면 안 됩니다.”

비서는 그런 한준영을 보며 그렇게 이야기하곤 서둘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미팅은 개뿔.’

게임을 대충 마무리하고, 한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손수 정장 재킷을 입고는 부회장실 곁에 마련된 소그룹 미팅실로 들어갔다.

그가 먼저 원탁에 앉자, 차례로 사람들이 들어와 앉았다.

잠시 후, 5시 10분이 되자 미팅 인원 5명이 모두 모였다.

한준영은 가만히 네 사람의 면면을 확인해 보았다.

‘씨발.’

모두가 각 계열사에서 올라온 상무급 영업이사였다.

“1/4분기 계열사 영업이익이 상당히 부진…… 2/4분기도 예상치가……”

“3/4분기에 반등이 필요한 상황……”

“국내 시장만으로는 한계에 직면한 만큼 적극적인 해외 시장 개척을……”

“정부가 남북러 삼각협력 사업에 관심이 있는 만큼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실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한준영은 그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부회장님?”

“응?”

딴생각만 하던 한준영은 자신을 부르는 미디어 계열사 상무의 부름에 그를 바라봤다.

“하실 말씀이라도 혹시?”

“아…… 어…… 그래. 다들 열심히 하자고. 아무래도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인 만큼 어…… 모두들 합심해서 응? 열심히 하자고.”

“아…… 네.”

그렇게 미팅은 예정보다 빠른 5시 45분에 끝이 났다.

의문을 가득 품고서 소그룹 미팅실을 나가는 이사들을 보며 한준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건데…….’

지난 5월 7일 수요일, 러시아에서 대통령 선거가 열렸던 날, 한국에선 일신그룹의 지주사인 ㈜일신 주총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회장으로는 오랜 세월 일신그룹의 각종 주력 계열사 총괄사장을 역임하며 능력을 입증해온 전광석이 임명됐다.

부회장은 두 명이 임명됐는데, 그중 하나는 한준영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일신레코드 사장으로 있던 김덕흠이었다.

과거 경영지원실 시장조사본부 본부장으로 있으면서 한준영에게 줄을 섰다가 좌천된 그가, 이제는 한준영과 동급으로 당당하게 복귀한 것이었다.

아니, 심지어 동급도 아니었다.

같은 부회장 직함이긴 했지만, 한준영의 업무가 경영일반총괄인 것에 반해, 김덕흠은 구조조정총괄이었던 만큼,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한준영보단 김덕흠을 더 위로 쳐주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게 다 그 인간이 그 새끼한테 붙어먹은 덕분이겠지.’

주총장에서 한준영은 볼 수 있었다.

김덕흠과 전광석이 강철에게 상당히 가까이 붙어 있었던 것을.

특히 김덕흠은 무슨 개라도 된 양 강철에게 온갖 아양을 떨고 아부를 하며 바짝 엎드렸다.

‘더러운 세상…….’

그래도 일단 한준영은 자기 사람을 9명이나 ㈜일신 이사회에 집어넣은 것에 만족하고 참기로 했다.

비록 회장과 구조조정총괄 부회장 그리고 막강한 실권을 가진 경영지원실장 자리는 모두 강철 쪽이 가져갔지만, 그래도 일단은 참호를 팠다는 점에서 한준영은 만족하려고 했다.

그러나 약 1개월이 흐른 지금, 한준영은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구조조정총괄이라는 명목으로, 지주사와 각 계열사 심지어 지방공장에까지 인사를 단행해 자신의 세력에 속한 사람들을 쳐내는 강철의 집요함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는 것을.

‘우호지분이 다 저쪽으로 붙기 시작했으니…….’

한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래도 포기하긴 일러.’

그러나 그는, 쉽게 포기하진 않았다.

‘나한테는 아직 무기가 있어. 그 인간이 가지지 못한 무기가.’

한준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소그룹 미팅실에서 나갔다.

그리곤 다시 자기 책상에 앉아 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넣었다.

신호음은 제법 길었지만, 한준영은 참고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아, 회장님. 저 준영입니다. 한준영. 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제게 주신 선물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식사 대접을 한번 하고 싶은데……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준영에겐 아직 무기가 몇 개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는 끈질긴 희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벌이라는 혈통과 거기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인맥이었다.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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