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신질서 (2)
3.
엄태욱과 한소영이 모두 죽음으로써,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거목그룹 지분 합이 9%는 모두 엄민식이 받게 됐다.
또한 한소영이 보유하고 있던 일신그룹 지분 20%도 엄민식에게 상속이 되면서, 엄민식은 유치원생이 되기도 전에 재계서열 12위, 17위 대기업 집단의 주요 대주주가 됐다.
여기서 공정거래위원회의 고민이 생겼다.
순수하게 지분만 놓고 보자면 엄민식이 동일인, 즉 총수로 지정되는 게 맞았지만, 문제는 엄민식이 아직 미성년자라는 것이었다.
그 문제에 관해, 강철은, 3년 전보다 더 강화된 정관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거목과 일신, 모두 지주사 법인이 동일인으로 지정이 될 거요.”
4월 25일 금요일.
강철은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가 있기 전, 미리 위원장으로부터 언질 받은 내용을 최병천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최 변호사의 어깨가 더 많이 무거워질 거란 이야깁니다.”
강철의 말에 최병천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무거운 만큼, 앞으로 더 무거워진다 하더라도, 견뎌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강철은 미소를 지었다.
“회장으론 적당히 전문경영인 한 명 앉히고, 최 변호사는 지금처럼 법무총괄전무로 있으면서,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끄세요. 사업 관련된 일은 전부 회장한테 맡기고, 그 외에 일들은 전부 최 변호사가 하시면 됩니다.”
“네, 꼬박꼬박 결재를 받아 가면서 하겠습니다. 아, 근데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계속 실장이십니까?”
최병천의 물음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신그룹 경영지원실장 자리는 계속 지킬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회장이 될 순 없잖아요?”
“뭐, 못 될 것도 없잖습니까?”
“나 대신 총알 맞아줄 사람이 있어야죠.”
그 말에 최병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껄껄 웃었다.
“거목그룹이야 실장님 지배력이 확고하니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결국 일신 아닙니까?”
최병천의 말대로 거목그룹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지난 3년간, 극동개발탐사가 지닌 지분은 전부 청월이라는, 국내 투자사에 매각됐다.
그리고 그 청월의 대주주는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가 100% 지분을 들고 있는 싱가폴 국적 투자사 블루문 홀딩스였다.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 -> 블루문 홀딩스 -> 청월.
이 3개의 지배구조 사이에는 물론 더 많은 복잡한 지배구조가 있어서, 한국 금융당국은 아무리 조사해봐도,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를 찾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는 여러 독점 조항을 피해가며 거목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의 실소유주인 강철은, 거목에서만큼은 굳건한 권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일신이었다.
일신은 엄민식이 20%, 한보성이 차명 8%를 포함한 20% 그리고 한준영이 2%를 들고 있었다.
여기에 최근 몇 년 사이 청월이 알음알음 지분을 긁어모아 3%를 보유하게 돼, 결과적으로 보자면 강철의 지배력이 23%, 한보성과 한준영의 지배력이 22%로 박빙을 이루고 있었다.
즉, 강철이 근소한 우위에 있긴 했지만, 완전한 우위에 서 있진 못하다는 의미였다.
“한준영에게는 예전 같은 영향력이 없어. 한보성은 아직 대학생이고. 거기다가 한보성이 가지고 있는 지분 중 8%가 차명 지분이야. 쉽게 써먹기 어렵겠지.”
강철은 마냥 낙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한준영이 다시 역전의 체크메이트를 노릴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
꼭 한준영이 아니더라도, 한보성이 갑자기 각성해서 자기 할아버지의 정당한 유산을 받겠다며 난동을 부릴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일단 그룹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해서 넓혀나가고 있었다.
“일신은 언제 임시주총을 열 계획입니까?”
“다음 달 7일.”
“혹시 제가 따로 도와드릴 건 없겠습니까?”
최병천의 물음에 강철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최 변호사는 거목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최병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안도했다.
예의상 한 말이었지만, 강철이 자신에게 일을 맡긴다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미리 읽었기에, 강철도 최병천에게 따로 일을 더 주진 않았다.
‘거목 하나만 케어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일 테니까.’
4.
일신그룹 지주사인 ㈜일신의 주총이 5월 7일 수요일 오후 3시에 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됨에 따라, 사람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오빠, 우리 좀 도와주라. 응?”
“아니, 나보고 뭘 어떻게 도우라는 거야? 나도 그렇지만 우리 보국도 너희 쪽에 지분 가진 게 하나 없잖아?”
“지분은 없어도, 연기금 쪽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잖아. 응?”
“연기금은 이번에 중립을 지킨다더라. 괜히 이런 일에 개입해봤자, 좋은 꼴 못 본다고.”
한준영의 아내이자 한보성의 모친인 연은진은 둘째 오빠인 보국그룹 부회장 연명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명진은 난색을 표했다.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그 누구야, 민식이 걔 후견인한테 가서 쇼부를 봐. 그게 제일 좋다니까?”
그러면서 그는 현실적인 방법을 조언해주었다.
하지만 연은진은 그 조언에 만족하지 못했다.
“말이 통하는 인간이 아니라니까?”
“말은 해 봤고?”
연은진의 억지에 연명진이 카운터를 날렸고, 연은진은 결국 아무 소득을 얻지 못했다.
“형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아내가 둘째 매형을 만나고 있을 때, 남편인 한준영은 첫째 매형 연경진 부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우리가 뭘 어떻게 도우란 말인가? 안 될 말이야.”
연명진보다 능력치는 낮지만, 특유의 보수성과 꼰대 기질이 있었기에, 연경진도 한준영의 부탁을 외면했다.
“출가외인이야, 딸은 시집가면 남이라고. 어떻게 우리가 남의 집안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자네도 잘 알겠지만 우리한테는 그럴 능력이 없어. 지분이 있어야 뭘 해줘도 해주지.”
결국 한준영도 별 소득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두 형제 모두로부터 퇴짜를 맞은 한준영-연은진 부부는 그 길로 함께 연승준 회장을 찾아갔다.
“…… 뉘시우?”
그러나, 이미 중증 치매에 시달리어 아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오로지 장손만 겨우 알아보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연승준에게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 인간하고 직접 대면해서 쇼부를 봐야 하는 거야?”
“그래야지, 어쩌겠어?”
“그래, 그럼 날 한 번 잡아 봐.”
“저기…… 우리가 직접 만나는 것보단 차라리 보성이랑 만나서 쇼부보게 하는 게 어떨까?”
“보성이랑?”
“아니, 왜 둘 다 동년배잖아. 보성이가 91년생, 그 인간이 92년생.”
“92 맞아? 하는 짓은 72 아니면 62 수준의 능구렁이인데?”
“일단 보성이한테 쇼부보게 하자. 또 알아? 둘이 친해져서 일이 의외로 쉽게 잘 풀릴지?”
그렇게 두 사람은 아들 한보성에게 강철과 만나 쇼부를 볼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한보성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강철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먼저 보냈다.
그렇게, 주총을 일주일 앞둔 4월 30일 오후 1시에, 강철은 한보성과 강남의 어느 커피숍에서 만남을 갖게 됐다.
5.
“내가 형이니까, 말 놔도 되지?”
아메리카노를 반 잔이나 쭉 들이켜고 나서, 다짜고짜 한보성은 강철에게 그렇게 말했다.
강철은 코웃음을 치며 냉소를 머금었다.
“씨발,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예상치 못하게 강철이 강하게 나오자, 한보성은 상당히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 강철은 씩 웃으며 말했다.
“기선제압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한보성 씨. 그런 식으로, 청유형으로 하는 건 기선제압이 안 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강철이 예의를 갖춰 말하자 한보성은 침을 꼴깍 삼켰다.
“…… 네, 잘 배워갑니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강철도 바닐라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뭐 한보성 씨가 저를 보자고 한 이유는, 당연히 다음 주 주총 때문이겠지요.”
예열도 없이 강철이 훅 본론을 치고 들어오자 한보성은 또 적잖이 당황했다.
‘확실히 아직 어리네.’
2014년 현재 기준으로, 강철은 스물셋이었고 한보성은 스물넷이었다.
법적으로 강철은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21세였고, 한보성은 생일이 지나 만23세였다.
세는 나이로 1살, 만으로 2세 차이가 났지만, 정신적 그리고 존재적 측면에서 나이는 강철이 훨씬 더 많았다.
‘정신적으로만 보면 벌써 나도 40대 중반이니까.’
강철은 어린 한보성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좋게좋게 가려고 만난 거 아닙니까? 협의도 하지 않고 주총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는 것보단 여기서 미리 협의를 해서, 주총장에선 모양 예쁘게 잘 뽑아내야 하니까.”
강철의 말에 한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그, 그게 아무래도 보기 좋으니까.”
“우리 쪽에서 회장과 경영지원실장 그리고 전무급 이사 둘을 임명하겠습니다. 나머진 그쪽에서 임명하시면 됩니다.”
“네?”
한보성은 귀를 의심했다.
“우리가 넷, 그쪽이 나머지를 임명하는 겁니다. 충분히 그쪽을 배려해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 아니…… 사실상 회장이랑 경영지원실장이 전부고 나머지 전무니 상무니 하는 자리는 있으나 마나 한 건데……”
“어허, 있으나 마나라니요?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공정위에서 일신의 동일인으로 ㈜일신을 지정한 것을? 무려 동일인으로 지정된 법인의 이사입니다.”
강철의 말은 표면상으론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강철이 모든 걸 다 쥐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최, 최소한 회장이라도 우리 쪽에서 임명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보성의 말에 강철은 피식 웃었다.
“이보세요, 한보성 씨.”
“……”
“연기금에서 중립을 지키고, 우리랑 한보성 씨 지분이 비등비등하다면, 결국 나머지는 소액 및 기타 주주들의 뜻에 따라 다수결로 결정이 될 겁니다.”
강철은 바닐라라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거목과 일신 양쪽 모두의 지분을 가진 엄민식 군의 후견인과 일신 쪽 지분을, 그것도 표면상으로는 겨우 12%밖엔 가지지 못한 한보성 씨 중 누가 더 많은 표를 받을 것 같습니까?”
한보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불안한 눈초리를 숨기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남은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애인 집안일 가지고 협박할 필요도 없겠네.’
한보성에게 대응하기 위해, 강철은 나름대로 그의 주변 인물에 관한 뒷조사를 해둬서 자료를 확보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말 몇 마디에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떨기만 하는 이 어린 대학생 예비역에게, 그런 음모를 펼치는 것조차도 사치라고 그는 생각했다.
‘뭐, 그래도 너무 몰아붙이면 곤란하겠지.’
강철은 풀어줄 때가 됐음을 느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설마, 엄민식 군이 커서 사촌 형님한테 피해가 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 말에 한보성의 눈은 또 요동쳤다.
이번에는 기대감과 희망으로 인한 떨림이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