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136화 (136/175)

136 신질서 (1)

1.

4월 19일 토요일 오후.

한남동 자택 서재에서 박태화는 말없이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비서실장이 공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서 있었다.

한참 서류를 읽던 박태화는, 그것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확실한 건 없지만, 높은 확률로 강철 그 친구가 거목의 실소유주다, 이거야?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으로만 본다면?”

“네, 그렇습니다.”

“이봐, 정황상으로만 보면 그 친구가 엄민식이 그 애 친부야. 근데 물증이 없잖아? 명확한 물증이 없으니까, 우리가 그 친구하고 죽은 한소영이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라 생각 안 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렇습니다만, 현재 상황에서 거목의 대주주, 그러니까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의 실소유주가 강철이라는 그 어떠한 물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박태화는 살짝 갑갑함을 느꼈다.

그가 원하는 건 명확한 것이었지, 이런 식으로 ‘그럴 것 같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볼 충분한 정황이 있다.’ 따위의 진술이 아니었다.

박태화는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비서실장은 곧장 부연설명을 이어갔다.

“보고서에도 기입해뒀지만, 거목그룹 엄근식 전 회장이 지주사 전환을 계획하고 있을 때, 그가 들고 있던 모든 종류의 비자금과 차명 지분이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는 얼마 전 미국에서 사업을 청산하고 몰타의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라는 곳에 모든 자산을 매각했습니다.”

“알아, 알아, 알아! 아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란 말이야!”

박태화의 언성이 높아지자 비서실장은 움찔했다.

“그, 그 시점을 전후로 강철 씨가 한소영 전 회장과 접촉했습니다. 아마도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고, 그 거래를 통해 강철 씨가 지분을 챙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야이 자식아!”

박태화가 결국 고함을 질렀다.

“했던 이야기 왜 또 하고 있냐고. 하, 진짜.”

박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비서실장에게 나가보라 손짓했다.

비서실장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박태화에게 인사한 후 서재를 나갔다.

‘강철…… 뭐 하는 친구일까?’

한소영이 죽으면서, 강철은 비로소 전면에 등장했다.

이전까진 한소영의 뒤에서, 경영지원실장 혹은 경호실장 등의, 고정되지 않은 타이틀을 가지고 은밀하게 활동하던 사람이, 한소영의 아들이자 유일한 상속자인 엄민식의 후견인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박태화만이, 현시점에서 재계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강철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박태화는, 여기저기서 총수들에게 강철이 뭐 하는 사람이냐? 하는 질문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적절한 대답을 해줘야만 그의 영향력이 유지되거나 혹은 더 향상될 터였다.

그랬기에 박태화는 비서실에 명령해 그간 강철에 대해 수집한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가져오라 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건, 결과적으로 정황증거만 그득한, 물증이라곤 하나도 없는 추측성 보고서였다.

‘막말로 이게 증권가 지라시랑 뭐가 달라?’

박태화는 보고서를 휴지통에 집어 던졌다.

‘거목과 일신의 지배자라…… 허!’

현재까지 박태화가 강철에 관해 알고 있는 확실한 정보는, 그가 92년생이라는 것과 고아라는 것,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다는 것 그리고 대산그룹을 비롯한 전국구 범죄단체와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에, 나머지 것들, 그가 거목그룹의 실소유주라든가, 한소영의 아들 엄민식이 사실 엄태욱의 아들이 아닌 그의 아들이라든가 하는 건 모두가 물증이 없는, 정황에 불과했다.

‘92년생이라는 것도, 고아라는 것도 전부 다 가짜 아니야?’

거목그룹의 지주사 ㈜거목의 대주주는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에서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로 변경됐다.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대표는 미국인 존 크리스토퍼 허버트였고,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의 대표는 조반니 그라치아니다.

하지만 박태화는 알고 있었다.

존 크리스토퍼 허버트도, 조반니 그라치아니도 모두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실제 그들이 나왔다는 학교, 다녔다는 직장 등지에는 그들에 관한 그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근데 강철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물론, 강철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그에게 귀를 물어뜯긴 동창도 있었고, 그에게 구타당한 3학년 때 담임도 있었으며,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고아원 원장도 있었다.

즉, 존 크리스토퍼 허버트나 조반니 그라치아니와는 달리, 강철은 그 실체를 알고 있는 증인이 많았다.

‘92년생이 고작 20대 초반의 나이에…… 아니지 10대 후반의 나이에 그런 일을 벌였다고?’

박태화는 씩 웃었다.

‘고아면 어떻고, 깡패랑 연루돼 있으면 또 어떻냐? 그 나이에 그런 짓을 벌일 정도로 담력이 있고 전략적 사고를 할 줄 아는데.’

박태화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어제 저녁을 같이 먹은 삼우그룹 회장 김대영에게로 향했다.

『듣자 하니 그놈 출신성분이 고약하다던데, 어떻게 그런 놈이 일신그룹과 거목그룹의 총수가 될 아이를 후견할 수 있다는 거요? 안 그래요, 박 회장?』

김대영은 묘하게 강철에게 불만이 있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삼우그룹과 싸우기는 힘들겠지? 우리 태성이나 현성 정도의 서포터가 있다면 몰라.’

김대영의 불만이 당장에는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을 터였다.

젊었을 때와는 달리, 나이가 든 김대영은, 특히 뇌출혈로 한 번 쓰러졌다 구사일생한 뒤로 김대영은, 굉장히 신중해졌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불만을 한동안 숨긴 채, 가만히 강철을 주시할 터였다.

하지만 언젠가 그는 강철을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박태화가 강철에게 딜을 넣을 때다.

‘정연이가 강철 그 친구랑 결혼이라도 하면, 태성과 일신 그리고 거목이 하나로 사실상 묶이는 거야.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트러스트? 카르텔?’

박태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2.

갈 사람은 가고, 살 사람은 산다.

한소영은 죽었지만, 강철과 엄민식은 살아있다.

엄민식은 슬픔을 딛고 언제 그랬냐는 듯 유모 및 가정부 그리고 가정교사들과 어울리며 활발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철도 상실감과 비탄에 빠지지 않은 채, 자신이 구상해둔 일정대로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인천에 아오야마 최청산입니다. 편하게 아마라고 불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돼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광주 서일산입니다.”

4월 21일 월요일 오전 10시 45분.

송파구 대산그룹 본사 대강당.

김명길의 회장 취임식이 열리는 자리에서, 스포트라이트는 김명길이 아닌 강철에게 쏠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김명길은 고작 대산그룹이라는, 자산규모 2조 원가량의 중견기업 대표지만, 강철은 무려 거목그룹과 일신그룹의 대주주였기 때문이었다.

거목그룹만 하더라도 자산규모가 15조가 넘었고, 일신그룹은 26조에 육박했다.

“아이고, 생각보다 더 거물이시더구만유.”

생전 처음 보는, 그러나 충분히 각 지역에서 나름 방귀 좀 뀌고 다닌다는 건달 보스들로부터 인사를 받던 차에, 능글맞은 충청도 방언이 강철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강철은 씩 웃으며, 곽기명을 바라봤다.

“전부 다 곽 사장이 준 ‘위스키’ 덕분이지.”

“워매, 이게 챙겨주는 거래유? 아니면 나중에 뒤져불어도 같이 뒤지자는 물귀신 작전이래유?”

악의 없는 그의 농담에 강철은 활짝 웃으며 그와 한 차례 악수를 나누었다.

“근디 지가 이렇게 공식적으로 대산에 이름을 올려도 되는 게, 참말로 맞나 모르것슈. 솔찬히 대산하고는 크게 연관도 없었는디 말여유.”

“그래서 내가 지분을 좀 챙겨줬잖아. 잔말 말고, 김 회장이랑 같이 열심히 해 보라고.”

“허허허. 귀찮은 일만 안 시키면.”

반가운 얼굴은 곽기명뿐만이 아니었다.

“12년 만 일하고 은퇴하고 유유자적하게 살겠다더니, 4년 만에 이렇게 커버리면,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겠단 건가?”

한때 대산의 대주주였던 존재이자, 강철에게 순순히 10억을 받고 대산 지분을 넘겼던 존재, 여수어시장 황제 배금태가 씩 웃으며 강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철은 그 손을 맞잡고 흔들며 화답했다.

“8년 동안 대대손손 먹고 놀아도 남을 만큼의 재산을 만들어야지.”

“허허허. 이미 그만한 재산은 모은 것 같은데?”

“난 아직 배고파.”

강철의 말에 배금태는 껄껄 웃었다.

“자네가 무슨 히딩크인가?”

“아무튼, 앞으로 김 회장 잘 좀 도와줘. 그쪽이 상임고문으로 있으면서, 한 번씩 조언도 해 주고, 김 회장이 호남 쪽에다가 뭐 사업하려고 할 때, 누가 방해하고 하면 사람도 붙여주고.”

“허허허. 귀찮은 일 없애려고 지분을 넘겼더니, 더 귀찮은 일을 맡기는구만.”

“그쪽도 이득 볼 게 있으니까, 수락을 한 거 아닌가?”

“허허허, 이 사람. 똑똑하구만, 똑똑해.”

그렇게 강철이 전국에서 올라온 주요 건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주인공인 김명길이 도착했다.

강철은 자기 주변에 모여 있던 건달들에게 김명길에게 가서 인사하라 눈짓을 보냈다.

곽기명부터 배금태 그리고 그 외 전국에서 올라온 건달 보스들이 모두 김명길에게 우르르 몰려가 그에게 인사했다.

“마, 선배님들 잘 받들어 모시가꼬 이 대산을 지금보다 10배는 더 큰 회사로 마 키워 보겠십니다!”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강동구 길동에서 오피스텔 매춘 업소와 단란주점 ‘콜걸’ 정도나 관리하던, 그저 그런 동네 건달에 불과했던 자신이 자산규모 2조에 전국구 건달의 스폰서 노릇을 하는 대산그룹의 회장이 됐다는 사실에 김명길은 살짝 흥분해 있었다.

강철은 오늘만큼은 그가 흥분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앞으로 2조짜리 회사 굴리면서 전국구 깡패들 교통정리까지 해주려면 골머리가 아플 거니까, 오늘은 뭐.’

잠시 후, 11시 10분이 됐을 때, 회장 취임식은 시작됐다.

직전 회장이었던 조민석의 짤막한 은퇴사에 이어, 김명길의 그리 길지 않은, 열정으로 가득한 취임사가 낭독됐다.

전국에서 올라온 건달들은 단상을 두드리며 자기 임기 내에 회사를 10배 규모로 키우겠다는, 그러니까 일신그룹과 비슷한 덩치의 대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김명길을 보며 웃거나 환호하거나 박수를 보내곤 했다.

‘건달들에게 인정받는 김명길이 회장으로서 간판이 되고, 그런대로 생각이 깊은 서용태가 뒤에서 잡아주고, 곽기명이나 배금태가 오버하지 않게 케어해주고.’

그리고 자신이 든든한 빽으로 뒷받침해준다면, 대산은 분명 건재할 터였다.

‘그리고 대산이 일신과 거목 더 나아가 태성의 모든 더러운 일을 다 하청을 받는다면, 여러모로 일 처리하기도 편해지겠고.’

그렇게 자신의 구상을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하며, 강철은 가만히 취임사 낭독을 끝마치고 참가자들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김명길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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