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129화 (129/175)

129 혁명의 고향 (1)

1.

알렉세이 밀레르의 경호원은 셋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렉세이 밀레르의 명령으로 두 사람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곳에서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처음 여자가 나타났을 때에도, 여자가 칼을 꺼냈을 때에도, 소리를 지르며 알렉세이 밀레르에게 달려들었을 때에도, 그들은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알렉세이 밀레르는 당황했다.

그의 작은 눈은 동공과 함께 확대됐고, 입은 벌려졌으며, 콧구멍은 넓어졌다.

경호원들은 당황해서 그제야 부랴부랴 달려오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속도로는, 알렉세이 밀레르의 배에 칼이 박히기 전에 도착해 그를 보호하는 건 불가능했다.

여자, 소피아 예브게니예브나 포포바는 자신의 칼이 알렉세이 밀레르의 복부에 깊숙이 들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칼이 그의 배를 찔러 생명을 앗아감으로써, 자신의 20년 짧은 인생이 의미 있게 끝날 수 있다고 그녀는 믿었다.

알렉세이 밀레르와 동행하는 동양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까앙-!]

그러나, 그녀가 신경조차 쓰지 않던 동양인이 알렉세이 밀레르의 앞을 막아섰고, 손으로 단검 칼날을 붙잡았다.

칼이 살을 가르는 소리가 아닌,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났다.

[까득-!]

그대로 칼날은 부러졌고, 소피아 포포바는 강철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아악-!”

강철은 그대로 소피아 포포바를 구속했다.

순간적으로 손에 두른 오거닉 메탈을 다시 해제한 후, 그는 그대로 소피아 포포바의 양팔을 잡아 뒤로 꺾은 뒤 바닥에 그녀를 눕혔다.

“……!”

알렉세이 밀레르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그는 언제든지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부의장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경호원들은 알렉세이 밀레르를 살폈다.

그제야 알렉세이 밀레르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잔뜩 흥분한 채 이번에는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쳤다.

“이 자식들아! 수상한 인간이 내 주변에 올 때까지 너희들은 뭐 하고 있었어!”

드넓은 공터에, 따로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된 것도 아닌 곳에서, 외부인 통제를 못 한 것을 탓하는 알렉세이 밀레르의 반응은 분명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경호원들은 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알렉세이 밀레르의 비정상적인 반응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허버트 씨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바닥에 누워서 뒤져가고 있었을 거라고 이 멍청한 자식들아! 바퀴벌레처럼 기어 다니기나 하지,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 말에 경호원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알렉세이 밀레르는 경호원들을 보며 한동안 씩씩거리더니, 이내 시선을 강철에게로 그리고 그의 무릎 아래에 등이 깔린 채 구속돼 있는 소피아 포포바에게로 돌렸다.

“고마워, 허버트. 덕분에 살았어.”

먼저 알렉세이 밀레르는 강철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곤 소피아 포포바를 보며 분노를 토했다.

“개 같은 년! 너 서방의 스파이지! 좋아, 너 잘 걸렸다!”

알렉세이 밀레르는 폰을 꺼냈다.

그는 곧장 블라디보스토크 연방보안국 총책임자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잠깐만요.”

그때, 강철이 알렉세이 밀레르를 막아섰다.

“이 여자…… 제가 개인적으로 데려가서 심문해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강철의 말에 알렉세이 밀레르는 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는 잠시 소피아 포포바의 얼굴과 몸매를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원래 이런 건 보안국에다가 말을 해야 하지만…… 크리스토퍼 자네가 날 살려준 것도 있고…….”

그 순간, 알렉세이 밀레르의 머릿속으로 얼마 후 있을 기공식 행사가 떠올랐다.

‘괜히 이번 습격 사실을 알렸다간 또 대역이 올 수도 있어. 그건 곤란해. 내 위신에 문제가 생긴다고.’

그는 그다음 말을 잇진 않았지만, 강철이 소피아 포포바를 수습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호원들을 바라보며 당부했다.

“오늘 있었던 일,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될 거야. 특히 보안국 놈들은 절대로!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희들, 직무 태만으로 짤리기 싫으면 입단속 잘 하라고.”

밥그릇을 가지고 하는 협박에 누가 감히 저항하겠는가?

경호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시찰은 할 건 다 했고, 난 먼저 사우나에라도 가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있어야겠어. 재미…… 아니 심문 잘 하라고. 허허허. 저기 컨테이너 가건물 보이지? 저기가 임시 사무소인데, 아무도 없을 거야.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까, 조용하고 얼마나 좋아? 허허허.”

알렉세이 밀레르는 강철에게 한 차례 윙크한 후 경호원을 시켜 그에게 가건물 열쇠를 건네게 한 뒤 그들과 함께 그 장소를 떠났다.

열쇠를 받아든 강철은 소피아 포포바를 일으켜 세웠다.

소피아 포포바는 이미 저항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강철이 맨손으로 칼을 잡아 날을 부러뜨리는 것을.

그 말도 안 되는, 동양적 신비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능력을 보고서, 그녀가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강철에게 양손이 구속된 채 질질 끌려서 컨테이너 가건물로 들어갈 뿐이었다.

강철은 그곳으로 들어간 후, 조명을 켜고는, 의자에다가 소피아 포포바를 앉혔다.

그리곤 창문을 블라인드로 가린 뒤 관심법을 확장시켜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소피아 포포바를 바라보며 말했다.

“반갑소, 로자 동무.”

강철의 말에 소피아 포포바는 화들짝 놀랐다.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대의 목숨은 물론 내 신분까지 들킬 뻔했으니 말이오.”

“서, 설마…… 당신이?”

“리 동무로부터 러시아의 혁명가 동무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고 있었소. 나, 조선 프룬제혁명당 킴이라고 하오.”

2.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당제 자유 민주주의를 수용한 러시아 연방이 탄생했다.

신생 러시아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올리가르히라는 과두 재벌 집단에 의해 독점 자본주의로 타락했고, 다당제 자유 민주주의는 올리가르히와 결탁한 옐친 일당에 의해 혼란과 혼탁의 상징이 돼 버렸다.

결국 러시아는 국가부도를 경험했고, 체첸 내전까지 터지면서 소련 붕괴 이후 또 다른 국가 붕괴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때, 푸틴이라는 존재가 신성처럼 등장했다.

옛 KGB 요원 출신의 젊은 남자는, 옐친에 의해 총리로 지명된 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대통령이 됐다.

그는 체첸 내전을 종식시켰고, 고유가를 기반으로 경제를 안정화시켰으며, 올리가르히를 정계에서 완전히 퇴출시켰다.

그러나 그의 통치하에서 다당제 자유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했고, 올리가르히가 사라진 자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들과 옛 KGB 출신 그리고 군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집권 세력, 소위 푸틴 신디케이트라 불리는 세력이 자리하게 됐다.

그 20여 년의 경험 속에서 러시아는 혁명 세력을 잉태했다.

과거 볼셰비키가 그러했듯, 그들도 타락한 러시아의 기성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 정의로운 체제의 수립을 희망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들은 폭력도 불사하기로 다짐했다.

소피아 포포바가 속한 지하 혁명가 조직 ‘트로츠키의 아이들’이 그런 혁명 세력의 전형이었다.

물론 그들의 세력은 굉장히 형편없는 수준이라, 극동에는 회원이 겨우 소피아 포포바 하나뿐이었고 나머지 10여 명의 회원은 모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린부르크 등에 흩어져 있었다.

사실 그들은 지하 혁명가 조직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존재였다.

그저 인터넷에서, 러시아 당국의 감시를 피하고자 그것도 미국의 사이트에서, 따로 자기들끼리 채팅방을 개설해 어설픈 트로츠키주의 영구혁명론이나 떠드는 게 전부였다.

<알렉세이 밀레르가 어제부터 우리 집 근처에서 돌아다니고 있어. 경호원들도 별로 없고, 내일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난 그를 죽이겠어. 그리고 재판에서 우리의 이상을 읊고 굶주린 러시아 인민과 세계 프롤레타리아에게 각성을 촉구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장 투쟁과 혁명에 관한 로망이 있었고, 특히 소피아 포포바는 언제든 기회가 생기면 혁명적 투쟁에 한 몸 불사르겠다는 광기 어린 생각을 품고 있었다.

때마침 그녀가 사는 아파트 주변에 천연액화가스 가공기지가 건설될 계획이 잡혔다.

그것 때문에 알렉세이 밀레르가 자주 나타나 시찰하기 시작했고, 별다른 직업도 없이 집에서 살며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생활하던 그녀는, 망원경을 구매해 그것으로 알렉세이 밀레르를 감시하며 습격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을, 그녀는 10월 13일 일요일 오후 3시에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녀의 습격은, 성공 직전에 웬 동양인의 방해에 의해 실패했다.

소피아 포포바는 이미 죽기로 다짐했기에,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이 분개했을 뿐, 제압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두렵진 않았다.

그러나 동양인이 자신을 따로 심문하겠다며 어두컴컴한 컨테이너 가건물로 끌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굉장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나, 조선 프룬제혁명당 킴이라고 하오.”

그러나 자신을 데려온 동양인은 구세주였다.

적어도 그녀에게, 그 동양인은 자신과 인종과 성별만 다를 뿐, 나이도 비슷하고 사상도 비슷하며 걸어가는 길도 비슷한, 어쩌면 오히려 더 험난한, 그런 혁명 동지였다.

‘재미있는 실험이 되겠어.’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을 걱정하다가, 동지를 만나 안도하며, 그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하는 소피아 포포바를 바라보며 강철은 씩 웃었다.

‘내가 직접 푸틴을 죽이는 것보단,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것처럼 꾸미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미래를 위해서라도?’

트로츠키의 아이들은 망상가였다.

강철의 기준에서도 그리고 일반 사회 상식적인 선에서도 그들은 망상가였다.

그들의 망상 속에는, 해외 혁명가 동지들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조선 프룬제혁명당이었다.

과거 김정일을 죽이려던, 소련 유학파 출신 청년 장교단의 후예라는 설정을 가진, 모스크바에 사는 어떤 소설가 지망생 회원이 이야기한 존재.

그 존재를, 강철은 실재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혁명가의 손에 죽는 독재자라…… 뭔가 러시아스러워서 좋네.’

소피아 포포바를 제압하고, 관심법으로 그녀의 내면에 침투했을 때, 강철은 시나리오를 하나 즉흥적으로 구상했다.

단순히 푸틴을 죽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던 이전 계획을 좀 더 보강해, 푸틴을 죽인 이후 상황을 상정한 시나리오에서는, 강철은 푸틴 암살과 무관한 존재로, 오히려 억울하게 암살에 휘말린 피해자로 역사에 남게 될 터였다.

‘이 친구들이, 그 정도로 용기가 있다면 말이야. 뭐, 가스프롬 CEO를 여자 혼자 습격할 정도면 그 정도 광기는 있어 보이긴 하는데 말이지.’

역사를 바꾸건, 바꾸지 못하건, 강철의 목표는 변함이 없다.

그는 쫓기는 도망자의 삶이 아닌, 누리는 지배자의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을 위해선, 푸틴 암살 이후까지도 고려를 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최적의 존재를 찾아낸 것이었다.

강철 회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