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주목 (2)
3.
“IRS에서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를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8일 화요일 오전 9시.
이제는 거목그룹 법무총괄이사가 돼 부회장급 대우를 받는 최병천 변호사가 강철에게 안 좋은 소식 하나를 건넸다.
“IRS? 미국 국세청이? 왜? 그쪽에 세무 관련된 문제가 있나요?”
“그건 아니고…… 아무래도 우리가 러시아랑 중국 쪽에 로비한 게 미국 정부에 발각된 모양입니다.”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돈을 가져다 쓰는 건 강철이었지만, 입출금을 담당하는 건 최병천이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세탁을 한다고 했는데…….”
강철은 그 문제를 두고서 최병천을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미국은 좀 힘든데…… 많이 힘든데…….’
부패했다곤 해도, 중국이나 러시아와 비교하면 미국은 깨끗했다.
비유하자면 중국과 러시아가 빨아도 떼가 안 빠질 걸레라면, 미국은 아직 쓰지 않은 걸레였다.
‘거기다 미국은 러시아나 중국 같은 적성국과 관련된 문제, 국제 패권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여야가 따로 없으니까.’
강철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것을 확인한 최병천은, 좋은 소식 하나를 건넸다.
“그래서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자금을 몰타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 말에 강철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몰타?”
“네. 지중해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인데, 스위스에 가려져서 그렇지 거기도 만만찮게 자금 은닉을 많이 하는 곳입니다. 전 세계의 부자들이.”
“흐음…… 그럼 미국도?”
“미국과 유럽연합에선 매의 눈으로 감시는 하지만, 몰타 정부가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초강경한 입장이라 아무 문제 없습니다.”
강철의 표정이 활짝 폈다.
“그거 듣던 중 다행이네요.”
“아마 이번 주 안으로 자본 이전은 다 끝날 겁니다. 미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조사를 할 때쯤이면, 남는 건 껍데기밖엔 없을 겁니다.”
“그럼 몰타에다가는 아예 새로 법인을 만든 거요?”
“그렇습니다. 대표자 신원도 새로 하나 만들어 뒀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법인명은 에우로파 인베스트먼트, 대표자는 이탈리아 국적의 조반니 그라치아니입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쪽에 어떻게 뚫어보니까 쉽게 시민권 하나를 만들어 줘서 말입니다.”
강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단 자본금은 다 지켜내긴 했는데…… 미국 정부가 우리를 주시하기 시작한 건 확실하고, 우리가 자금을 몰타로 뺀 이상 더 의심하기 시작할 겁니다. 미국 정부가 어디까지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병천의 우려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태평양 지역의 주요 동맹국이 적성국과 손을 잡고 지각 변동을 꾀하고 있으니, 당연히 신경이 곤두서겠지.”
문득 강철은, 이전 생의 역사와 지금의 변한 역사를 비교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때도 한국이, 보수 정권이었는데도 중국 쪽으로 기울어서 미국이 곤란해했다는 뉴스를 본 것 같은데 말이야.’
정권은 바뀌었지만, 역사적 흐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이 지도자 개인보다 사회 구조가 우위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겠지.’
정권이 바뀌어도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
‘잠시만 그러면 혹시 지금 대통령도 탄핵을?’
그 부분은 기대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며 강철은 피식 웃었다.
“일단 최 이사는 자본 이전에만 신경을 쓰세요. 나머지 정치적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순간, 강철의 머릿속으로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잠시만…… 혹시?’
다가올 2014년에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건이 발생할 예정이다.
이대로 푸틴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당장 2월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4월이 되면, 한국에선 2010년대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발생할 것이다.
‘이 정도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강철은 최병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저번에 내가 거목그룹하고 일신그룹 빅딜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잖아요?”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빅딜도 빅딜인데, 그것만 지켜보고 있을 순 없잖아요, 안 그래요?”
“네, 그건 그렇습니다.”
“…… 거목그룹이 해운회사 적당한 거 몇 개 사서, 해운업에 진출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 해운업 말입니까? 음…….”
현재 거목그룹이 국내에서 생산한 제품 중 수출품목은 모두 외부의 해운사에 의해 국외로 반출됐다.
최병천은 그걸 거목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으로 강철의 말을 이해했다.
“네, 뭐, 시간은 걸리고 비용은 꽤 발생하겠지만, 문제없습니다. 추진하겠습니다.”
“그…… 해운회사 중에서 말이에요. 청해진해운이라고 하나 있단 말입니다. 그건 꼭 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청해진해운. 네, 알겠습니다.”
“수고 좀 해 줘요.”
4.
10월 11일 금요일 오후 5시.
주한미국대사관.
“전부 몰타로 빠져나갔습니다.”
CIA 한국지부장 빌 라이언의 말에 주한미국대사 조지 스팅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부 말입니까?”
“네, 전부입니다. 젠장…… IRS놈들…… 연방법이 어떻고, 와이오밍주법이 어떻고…… 그런 쓸데없는 관료주의적인 거나 따지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스팅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일단 그럼 이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유럽 쪽에서…….’
그러나 이어진 라이언의 말은 그런 안도감을 싹 날리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다행히 한국 국정원에서 흥미로운 자료를 줬습니다.”
라이언은 스팅에게 서류 3개를 건네주었다.
세 사람의 인적 사항이 담긴 서류였다.
스팅은 그것을 집어 들어 하나씩 살펴보았다.
“조민석, 한소영 그리고 강철. 이렇게 세 사람이 거목그룹의 경영권 분쟁에 연루가 된 사람들입니다.”
“…… 한 사람은 갱단 두목이고, 한 사람은 현재 다른 대기업의 총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총수 경호원이고…….”
스팅은 라이언을 바라봤다.
라이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세 사람이 거목그룹을 작업했다는 게 국정원의 결론입니다.”
“…… 국정원이 벌써 이렇게 조사를 해서 결론을 내렸단 말입니까?”
“미리 조사해 둔 모양입니다. 듣자 하니 그쪽에서 일하는 윤경태라는 요원이 금융계에서 일하는 자기 동생이랑 손잡고 거목을 털어먹으려고 했다는 모양입니다.”
“국정원 요원이? 아니 왜?”
“거목그룹 전 총수 엄근식의 조카라고 합니다.”
스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엮이고 싶지 않단 말이야.’
2012년 5월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한 스팅은, 내년 5월 한국을 떠날 예정이다.
그리고 그는 한국을 떠나면 국무부에서 은퇴한 후 월가에 고문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내 후임자한테 이 일을 다 맡겨두고 가고 싶은데 말이지.’
워싱턴 D.C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자신의 후임자로는 현 대통령의 측근 중 하나가 올 예정이라고 했다.
‘나보다야 차라리 대통령하고 친한 사람이 이런 일을 처리하는 게 맞지 않나?’
스팅은 노회한 관료이자 정치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현 대통령의 측근까지는 아니었다.
“일단…… 천천히 접근합시다. 지금 모든 주요 국가들의 눈이 이곳 서울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우리가 들쑤시고 다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당신이나 나나 둘 다.”
그러면서 스팅은 손날로 목을 그어 보이며 말을 마쳤다.
‘이 양반이?’
그 모습을 보며 라이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가에서 고문으로 꿀 빨기 위해, 자기 커리어를 망치긴 싫으시다?’
대사관의 협조가 없이는, CIA라도 함부로 움직일 순 없었다.
더군다나 한국은, 스팅의 말대로 주요 국가의 눈이 집중된 상태다.
“네, 천천히 접근합시다. 함께.”
일단 라이언은 한발 빼기로 했다.
‘꼭 대사 허락이 없어도, 우리가 움직일 자원은 있단 말이지.’
5.
10월 13일 일요일 오후 3시.
블라디보스토크.
“자 보라고, 여기서 액화천연가스가 가공이 되면, 파이프라인을 타고 조선을 거쳐 한국으로 간단 말이지. 어때, 멋있지 않나?”
강철은 알렉세이 밀레르 가스프롬 CEO와 함께 드넓은 공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세이 밀레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것저것 설명을 해대고 있었다.
“지금 각하께서 이 일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고 계셔. 지난번에 한국 대통령하고 회담하고 나서 러시아, 한국, 조선 3국 정상회담을 개최하겠다고 하셨지? 그거 진심이셨어. 지금 우리 외무부랑 정보부 쪽에서 조선하고 물밑 접촉을 계속하고 있단 말이야.”
비록 지난번엔 대역을 만나서 성사가 되지 못했지만, 푸틴을 제거하겠다는 생각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강철은 알렉세이 밀레르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자신을 초청했을 때, 군말하지 않고 비행기 표를 예매해 날아왔다.
‘이번엔 진짜를 만날 수도 있을까?’
그리고 알렉세이 밀레르는, 강철에게 가스프롬이 건설할 예정인 블라디보스토크 액화천연가스 가공기지의 터를 소개하며, 꽤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많이 전해 주었다.
“착공은 다음 달 11일이야. 그날 기공식을 할 건데, 아마 각하께서 직접 참여하실 가능성이 커.”
그 말을 하는 순간, 알렉세이 밀레르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떠올랐다.
‘푸틴이 직접 오는 건가?’
그것은, 대역이 아닌 진짜 푸틴이 기공식에 참석한다는 생각이었다.
강철은 가만히 알렉세이 밀레르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강철이 대역과 만난 이후, 계속해서 푸틴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던 지난 나날들을,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 액화천연가스 가공기지 기공식에는 꼭 직접 참석하겠단 약속을 받아낸 사실을.
그러한 것들을 강철은 알렉세이 밀레르의 기억 속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기회인 건가?’
한국에서 푸틴이 죽는 것보다는, 러시아 본토에서 죽는 게 좀 더 그림은 좋았다.
‘솔직히 그날 대역이 아니라 진짜였으면 내가 당장 죽이긴 했겠지만…… 한국 자체가 엄청난 외교적 압박에 직면하게 됐을 거야. 만약 그게 성사됐다면.’
세계 멸망을 막기 위해, 단기적으로 한국이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긴 했지만, 이왕이면 그런 게 없이 푸틴을 제거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알렉세이 밀레르의 말에 따르면, 그런 기회가 곧 올 예정이다.
‘그때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강철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죽어!”
온통 관심법이 알렉세이 밀레르에게만 쏟아지고 있었을 때,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의식은 전혀 읽지 못하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치며 알렉세이 밀레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고, 그 단검은 단호한 기세로 알렉세이 밀레르의 복부를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