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암살 대상 (2)
3.
약속대로 박태화는 정부를 설득하고 나섰다.
출구전략의 필요성과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의 수익성, 정치적 상징성 등을 이야기하며 박태화는 정부를 설득했다.
거기에 다른 건 부가되지 않았다.
어차피 박태화 입장에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이었던 만큼, 말과 논리 이외에 그가 설득에 동원한 건 없었다.
박태화와 마찬가지로, 강철도 러시아 측을 설득하고 나섰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현재 태성의 박 회장이 한국 대통령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설득이라…….”
“한국 정부 입장에서도 출구전략은 필요한 상황입니다. 계속해서 남북 관계가 경색돼 있다면, 정권의 외교적 정통성이 흔들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4월 1일 월요일 정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강철은 알렉세이 밀레르와 만나고 있었다.
“흐음…… 그래서, 내가 뭘 해주길 바라나?”
알렉세이 밀레르의 말에 강철은 씩 웃었다.
“러시아 정부를 설득해 주십시오.”
“정부를?”
“러시아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입니다. 한국 혼자서 외교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크게 힘이 나는 건 없겠지만, 거기에 러시아가 맞장구를 쳐준다면,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알렉세이 밀레르를 퍽 기분 좋게 했다.
“어디 우리랑 한국만 한다고 소리가 나겠나? 조선도 거기에 동조를 해 줘야 하고, 중국이나 일본, 미국도 긍정적으로 반응을 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렉세이 밀레르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인간도 결국 한국인이야. 한국인이 보기에도 우리의 영향력이 그 정도로 보인다는 건데, 마음에 드는구만.’
치사량 수준으로 국뽕을 맞은 알렉세이 밀레르를 바라보며 강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국가 지도층이라는 인간의 생각이 이렇게 단순하니 약소국 하나 제대로 정리 못 해서 핵전쟁까지 일으켰지. 머저리 같은 것들.’
그러나 그런 경멸과 냉소를 구태여 드러낼 이유는 없었다.
“알겠네. 일단 오늘 저녁 비행기로 내가 평양에 갔다가 모레 저녁 비행기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는데, 조선에다가도 뜻을 전해두겠네.”
“감사합니다.”
푸틴의 핵심 측근 가운데, 에너지 부문을 담당하는 알렉세이 밀레르가 비밀 특사 자격으로 북한에 간다는 것은, 곧 2013년 현재 푸틴이 에너지를 지렛대 삼아 동아시아에서의 외교적 영향력을 올릴 생각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일이 생기면 거기에 집중하게 되지. 그리고 그 일을 자기 뜻에 맞게 해결해주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든 의심하기보단 신뢰하게 되기 마련이고.’
박태화가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에 진지하게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듯, 강철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남북 관계가 어쩌니, 경제 협력이 어떻니, 외교적 출구전략이 저떻니 하는 건 정치인과 학자들의 관심사일 뿐이었다.
강철의 관심사는 지금 자신이 이렇게 하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푸틴이 의심을 거두느냐는 것과, 의심을 거뒀을 때, 푸틴과 만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독대만 한다면, 죽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해. 그리고, 탈출하는 것도 가능하고.’
푸틴을 지킨다는 1만 명 규모의 군대, 그들이 펼치는 화력의 장막과 인간 방벽을 뚫고 들어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를 푸틴을 찾아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푸틴과 독대한 상태에서 그를 죽이고, 은신을 펼쳐 감시망을 빠져나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 은신한 초능력자를 찾아낼 기술이나 사람은 없으니까.
‘푸틴을 죽인다면 러시아는 혼란에 휩싸이겠지. 만약 내년 2월 전에 푸틴을 죽일 수 있다면…….’
2014년 2월.
원래 역사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탈하는 사건, 크림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결국 8년 뒤에 있을 러시아의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반대로 크림 사태가 없다면, 우크라이나 침공도 없다는 거겠지.’
우크라이나 침공이 없다면, 핵전쟁도 없다.
그리고 핵전쟁이 없다면, 인류 문명도 계속해서 보존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난 상당한 권력을 지닌, 부유하고 강한 유일한 초능력자로 살 수 있겠지.’
멸망에 대비해, 금을 모으겠다는 구상 자체는 여전히 폐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신그룹과 거목그룹의 힘을 동원해 경북 칠곡-핵전쟁에서 확실하게 살아남는 지역에 금 보관소를 만들고, 런던에 있는 한국은행의 금괴를 모두 거기에 가져다 놓는다는 구상은 실행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다.
그간 로비를 바탕으로,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 그리고 국회에 동조 세력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강철은 멸망을 막아보고 싶었다.
‘이게 다 자식을 만들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는, 사실 전부는, 바로 엄민식의 존재였다.
‘법적으론 내 자식이 아닌, 엄태욱의 아들이지만 실제론 내 자식이야. 내 유전자를 받은.’
강철은 부모의 정을 받지 못한 고아였다.
그래서 부모의 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강철은 부모의 정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정 안 되면…… 핵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민식이라도 빼돌려서 같이 벙커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한데…….’
그러나 일단은, 멸망이라는 선택지는 없애버리고 싶었다.
초능력자가 아니면 모두가 비참한 농노로 살아야 하는, 초능력자이더라도 애매한 능력치를 가졌으면 밟혀 죽을 뿐인, 그 비정한 세계에서 자기 자식이 살게 하고 싶진 않았다.
“가시는 길에 평양의 친구분들에게 선물이라도 하십시오.”
강철은 알렉세이 밀레르에게 고급 양주 세트와 돈 가방을 건넸다.
“허허허허허. 잘 전해주겠네.”
이 선물들이, 결과적으로 세상의 멸망을 막는다면, 강철은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내 돈은 아니니까.’
4.
첫 번째 임신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러나 두 번째 임신은 첫 번째만큼 쉽지가 않았다.
첫 번째 임신할 때보다 한소영이 나이가 든 것도 있었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두 사람이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성이한테 그냥 다 줄까? 사람들이 다 내 얼굴만 보고, 내 말만 기다리고 있잖아.”
한소영이 일신그룹 총수로 지목되고, 강철도 한소영을 통해 일신그룹을 통제하게 되면서, 자연히 그냥 거목그룹 사모님이던 시절에 비해 한소영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거기다 엄민식의 탄생으로 인해 한남동에 따로 집을 마련하게 되면서, 강철과 물리적으로도 떨어지게 됐다.
물론 주말마다 한소영이 잠원동 펜트하우스로 오긴 했지만, 일주일 내도록 붙어서 사랑을 나누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효율은 떨어졌다.
“너무 거기에 집착하진 마. 민식이 하나만 잘 키워도 충분하니까.”
임신이 되지 않는 것에 한소영이 스트레스를 받자, 강철은 그녀에게 마음을 비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소영은 쉽게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냥 우리 다시 살림 합치면 안 될까?”
“안 돼. 박태화가 나를 주시하고 있는데, 우리가 살림을 합치기라도 하면 무슨 이야기가 돌겠어?”
“감시당하고 있어?”
“아직 감시는 안 하고 있지만, 당신이랑 내가 한 지붕 아래 살게 되면 자연히 감시를 하게 되겠지.”
그래도 두 사람은 일주일에 최소한 하루 정도는, 둘 다 시간을 비워두고 오롯이 함께하는 데에만 힘썼다.
그 덕분이었을까?
2013년 9월 1일, 마침내 한소영은 둘째를 가지는 데 성공했다.
“둘째는 딸이었으면 좋겠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딱 좋잖아?”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임신이 될지도 모를, 두 번째 임신 사실을 확인한 후, 한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오랜만에 활짝 웃어 보였다.
“내년 6월인가?”
“5월 말일 거야, 아마도.”
“2014년 5월 말이라…… 그땐 세상이 지금보단 아름답겠지?”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워.”
그렇게, 둘 사이에 사적인 일은 사적인 일대로 흘러가서 나름의 성과를 냈다.
물론 사적인 일에만 성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공적인 일에도 충분한 성과가 있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가스관을 설치하고, 그것이 북한을 지나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대로 값싸고 질 좋은 에너지를 얻고,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수익을 내고, 북한은 또 북한대로 이득을 챙기는, 더 나아가 이러한 긴밀한 경제적 연결로 남북러가 긴밀히 공조하게 되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13년 9월 2일 월요일.
대통령은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을 공식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전에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 그리고 국제연합 및 야당과 이야기를 해둔 상태였기에, 대내외적 반발은 크지 않았다.
“한국과 북조선, 러시아의 협력이 역내에 안정을 가져오길 기원하지만, 그것이 국제연합 제재를 회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은 이 정도 선에서 반응하며 관망세를 유지했다.
“우리가 지난 대선 때 이야기했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과 유사한 만큼,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따질 건 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당도 원론적인 입장 정도나 보일 뿐이었다.
강철에게 중요한 건, 자유 진영 국가들의 반응도 아니었고, 한국 야당의 입장도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러시아, 정확하게는 크렘린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9월 30일 월요일, 드디어 강철에겐 원하던 반응이 내려왔다.
5.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시그니엘타워 호텔.
검은 정장을 입고, 그 안에 권총을 휴대한, 다부진 체격의 러시아인들이 삼엄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 곳.
그러한 경계태세는 단 한 곳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주요국 정상급 인사 혹은 그에 준하는 재계 인사에게만 제공되는 VVIP특실.
그곳 거실 소파에 앉아, 강철은 알렉세이 밀레르와 마주 보며, 상석에 앉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대통령이란 자리가 바쁜 자리야. 좀 늦을 수도 있으니까, 양해하라고.”
알렉세이 밀레르의 말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강철의 긴장을 자기 식대로 해석한 알렉세이 밀레르는 씩 웃으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진 마. 막상 만나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실 거니까.”
그러나 강철이 긴장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오늘이…… 오늘이 어쩌면…….’
강철에겐 총도, 칼도 없었다.
그러나 총이나 칼보다 더 강한 무기가 그의 심장에서 분출될 준비를 끝마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께서 오십니다!”
곧, 한 경호원이 거실을 바라보며 그렇게 고함쳤다.
강철은 알렉세이 밀레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한 남자가, 복도를 돌아 경호원들을 좌우에 대동한 채 거실로 들어왔다.
특유의 걸음걸이, 굳은 표정, 다부진 체격.
“오셨습니까, 각하.”
그가 강철 앞에 섰다.
그리고 강철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
그것을 보는 강철의 눈동자는 의문과 당혹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강철 회귀